21화
태동하는 재앙-6
땡! 땡! 땡!
조그만 종이 세 번 흔들렸다. 출항을 의미했다. 해금령이 풀리자마자 선원들은 살 판 났다며 얼른 출항을 서둘렀다. 활기찬 고함들이 배 위를 오갔다.
“돛 풀어라 이것들아!”
“허이야!”
“밧줄 풀고! 닻 올리고!”
“우효!”
“방금 이상한 환호 지른 놈 누구냐!”
선원들이 소리를 치며 명령을 내리고 기합을 지르며 힘을 쓰는 어지러운 광경을, 소년은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팔 한 쪽 없는 조그만 아이에게 팔뚝만한 줄을 당기는 일을 시킬 바보는 없으니까.
소년은 조용한 눈길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소년에게 선장이 슥 다가왔다.
선장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소년을 복잡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선장의 눈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이 애를 싣고 다녀야 되냐는 의구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소년이 말한 사흘째가 되었으나 아무도 죽은 이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해금령 때문에 항구에 발이 묶여 바다로 나가지도 못했다. 거리마다 군대가 돌아다니는 통에 싸움이 붙어 누군가 불운하게 죽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홉킨스 선장은 소년을 태워서 그런 건지 그저 우연의 일치인지 재고 있었다.
빈민가에서 별별 감정을 다 보고 산 소년은 선장의 눈빛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소년은 관심없었다. 선장이 슬프건 기쁘건 무슨 상관이람.
“햐아악!”
고양이 존슨이 한쪽에서 소년을 향해 경계의 하악질을 하자 소년이 빈 나무 양동이를 휙 던져 멋지게 존슨을 덮었다.
덜그럭거리며 두꺼운 나무 양동이 안에서 야옹거리는 존슨을 내버려둔 채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갈 거야?”
무례하게도 선장에게 존대를 쓰지 않는 소년.
선장은 교육 담당 항해사와 갑판장 크롬웰을 통해 이 꼬마가 지지리도 말을 안 들어 처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굳이 화를 낸다거나 핀잔을 주거나 하진 않았다. 장교 생활 중에는 이 꼬마보다 훨씬 더한 머저리들을 많이 봤기도 했고.
홉킨스 선장은 장교 복장 그대로인 푸른 외투의 매무새를 고치곤 말했다.
“에크나르프. 어딘지는 아나?”
“말만 들었어. 바다 건너 나라라던데.”
“맞다. 하얀 백합을 걸고 다니는 우리의 주적이지. 바다로 나가면 넌 견시병 역할을 할 거다. 하얀 백합을 걸고 있다 하면 무조건 소리부터 질러.”
백합이 뭐지? 소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 눈이 없으면 나머지 한쪽 눈이 더 좋아진다던데. 너도 견시 정도는 잘 할 수 있겠지.”
어디서 주워들은 헛소문을 진지하게 믿는 선장이 그렇게 얘기하면서 소년에게 이만 관심을 껐다.
“......”
소년이 오른쪽 얼굴을 매만졌다. 마법사의 자폭으로 인해 광대가 푹 꺼져 있고 피부는 화상으로 인해 갈색과 붉은색으로 얼룩덜룩했다. 오른쪽 눈은 태어날 때부터 없었던 것처럼 화상자국으로 덮여 버렸다.
‘굳이 한눈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지만. 뭐 일단은 어울려 줘야지.’
외눈이면 눈이 더 좋다는 건 일반인에게는 헛소문이지만, 적어도 지금의 소년에게는 해당되는 얘기였다.
소년은 몸을 돌려 저 멀리 빈민가였던 폐허를 보았다. 하얗게 타버린 기둥, 까맣게 탄 채 무너진 흙벽, 잡다한 금속들이 녹아 물 흐르는 형태로 굳어버린 덩어리...... 소년은 한 마리 매처럼 부두 너머 한참 멀리 떨어진 곳을 잘도 알아볼 수 있었다.
‘잘 있어라. 린던.’
소년은 지금까지 생을 보냈던 곳을 짧게 추억했다.
소년의 기억은 첫 기억에서부터 빈민가로 꽉 차 있었다. 조그만 천막 안에 갇혀, 그 안에서 안주하던 볼품없고 조그만 소년.
바다의 냄새, 빈민가의 냄새, 죽음의 향기, 모욕적인 언사, 모멸찬 시선......
쓰레기와 시체와 욕설과 신음소리가 가득한 환경에서만 지금껏 살아 왔는지라 빈민가보다 더 좋은 걸 체감한 적이 없어 빈민가에 대해 좋니 나쁘니 평가할 것도 없었다. 잘 사는 것들의 거리는 멀리서만 봐서 빈민가와 비교할 꺼리도 별로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더 깨끗하고 경비가 많단 것 정도?
그저 살던 곳.
불쾌함을 받아온 곳.
기분 좋은 향기를 자주 맡을 수 있던 곳.
영혼 역시 자주 맛볼 수 있던 곳.
그리고 쓰디쓴 패배를 겪은 곳.
소년에게 빈민가는 그 정도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다.
꽃밭이 모두 타버렸으니, 이제 벌은 또 다른 꽃밭을 찾아갈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이 배 한 척에만 무려 78명이 타고 있다. 신대륙 개척이니 뭐니 해서 바다엔 수많은 배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는데, 이보다 더 큰 배라면.......
꿀꺽
소년은 군침을 삼키고 배시시 웃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되어 짓는 표정이었다. 품 안에 감춘 단검이 새삼 묵직했다.
하지만 다른 이가 본다면 분명히 이렇게 말하며 몸서리칠 것이다.
매우 불길하고, 사악하다고.
***
같은 시각, 니아트리브의 해군 본부.
“그러니까, 마법사님께서 제독으로 취임하신단 말입니까?”
“그렇다.”
머리가 하얗게 센 중년 여마법사, 엘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큼직한 모자와 푸른 외투를 입은 해군 장교들은 권력자 앞이라 말은 못하지만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며 못마땅한 심정을 나누었다.
‘여자를 배에 들인다고?’
수송선에 태우는 손님이라면 모를까, 여자가 수병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게 될 것이란 사실은 모두의 기분을 언짢게 만들었다.
여자가 배에 타면 재수 없다는 미신은 여러 국가에서 통용되는 미신이었다.
남자보다 평균적인 근력이 떨어지는 여자가 타면 손발이 맞지 않아 안 그래도 거친 뱃일에 지장이 생긴다는 이유로 이런 미신이 여러 곳에서 동시발생 및 확산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었다.
그 주장이 사실이건 아니건 바다 사람들이 재수 없다고 여기는 그 미신은 거의 종교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래서 장교들이 반대를 하지 않는다 해도 수병들이 불편해 할 게 뻔했다.
“표정을 보니 많이 곤란한 모양인데, 왜 그런지 솔직히 대답해주게나. 징계 안 내릴 테니 걱정 말고.”
그 말에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장교들은 그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 눈치만 볼 뿐이었다. 하지만 분위기만으로도 엘리자를 못마땅하다고 여긴다는 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엘리자는 그런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아무렴 해군 제독으로 취임하는데 아무것도 조사하지 않고 왔겠나.
“아직 정식 취임은 아니지만 여왕 폐하께선 번복하실 일이 없을 테니 지금부터 내게 지휘권이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지금 있는 모든 수병을 항구나 갑판 위로 불러 모아라. 날 볼 수 있게.”
“......”
“항명인가? 대답이 없는걸.”
“알겠습니다.”
장교들의 목소리엔 불만이 가득했다. 군대는 상명하복이 기본이라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당사자를 제외하고 모두가 싫어하는 상황이라면 감정 역시 노골적으로 겉으로 내보일 수밖에 없어진다.
잠시 후, 정박해 있던 니아트리브 해군 제 4 함대의 모든 선원들이 밖으로 나왔다. 갑판 위, 돛대 위, 부두 위. 돛과 밧줄 사이에 수없이 많은 푸른 외투를 비롯한 자유로운 복장의 이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소식이 전달되었는지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들 역시 미신에 휘둘리는 뱃사람이었다.
수천 수만 명의 시선을 감내하며 엘리자 스펠위버가 그 한복판에 섰다.
그녀는 목소리에 마력을 실어 외쳤다.
“나는 앞으로 제 4 함대의 총지휘권을 맡을 니아트리브 마법사단장 엘리자베스 스펠위버라고 한다. 너희들이 가진 불만의 이유를 나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너희들이 입도 뻥긋 못하도록 해보겠다.”
“......?”
“너희들이 바다를 무서워하는 이유가 뭔가. 바로 물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단 거지 않나. 나는 그 걱정을 해소해 줄 수 있다.”
쿠르릉
엘리자가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자연의 마력이 급격히 엘리자에게로 모이면서 마력 불균형이 일어났다. 맑던 하늘이 갑자기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하면서 배들이 출렁였다.
“마, 마법사님! 무슨 짓입니까!”
“입 닥치고 잘 봐라!”
엘리자는 마력을 모아 배열하여, 거대한 현상을 모두의 눈에 똑똑히 박아주었다.
“어어어!”
“세상에나!”
“말도 안 돼!”
린던 동쪽의 바다가 솟아올랐다.
거대한 해일이었다. 하지만 당장 항만을 덮칠 듯 꿀렁이는 해일은 마치 석상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있었다. 또한 항만에 정박되어 있던 배들 역시 다소 기울기는 했지만 넘어지지도 흘러내리지도 않으며 그 해일의 경사면에 그대로 얹혀 있었다.
“자, 나는 물을 다룰 수 있다!”
‘너무 나갔나.’
이 마법은 명백히 엘리자의 능력 밖이었다. 조금 무리한 대가로 엘리자는 며칠은 누워 있어야 할 것이다.
바닷물을 밧줄처럼 길게 뽑아내어 휘두르거나 해일을 일으키는 등은 그녀에게 간단한 일이며, 바다 일대를 한 번 뒤집는 것도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현상유지를 하는 건 다른 얘기였다.
무거운 쇳덩이를 들었다가 바로 던지는 것과 계속 들고 있는 것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
무겁고 조종도 힘든 물을, 그것도 항시 요동치는 바닷물을 높은 절벽처럼 세운 채로 계속 유지를 하자니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었다. 물은 정말로 다루기 힘든 녀석이라 대마법사인 엘리자에게도 버거운 친구였다.
마법사에겐 정신력도 중요하다. 남편을 잃은 슬픔에 충격을 받아 분노와 슬픔으로 심신이 다소 흔들린 현재의 엘리자에겐 대규모 마법은 평소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엘리자는 마력 고갈로 인한 급격한 피로를 느꼈지만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면 좀 더 버텨야 했다. 부하들의 신뢰 없는 지휘관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니까. 그녀의 등은 벌써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두려움과 경외심이 뒤섞인 시선들이 엘리자에게로 모였다.
“이래도, 내가, 제독이 되는 게, 불만인가?”
엘리자베스 스펠위버. 그녀는 니아트리브 제일의 1급 물마법사였다.
불만은 눈 녹듯 사라지고 대마법사에 대한 존경심만이 항만에 가득 차올랐다.
***
3일 뒤.
장교의 취미 호는 순풍을 타고 순조롭게 에크나르프 근해에 도착했다.
“자, 얘들아. 도착했으니 슬슬 ‘일’ 준비해라!”
“예입, 선장님!”
선원들이 씩 웃으면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러 군데 개조된 흔적과 무장상선으로 등록된 주제에 과도한 무장을 싣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이 배는 사략선이었다. 에크나르프의 서쪽 바다는 기존의 무역 항로 외에도 신대륙 개척을 위한 배들이 많이 거치는 곳이라 일터로써는 제격이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돛 정리하고! 칸막이 내리고!”
“포탄 빨리 옮겨!”
아직 약탈할 배가 보이지 않음에도 선장은 전투 준비를 명령했다. 선원들은 불평하지 않았다. 미리 준비하는 것이 기습 시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익히 겪어봤기 때문이었다.
바람을 타고 상대 함선으로 돌격하기 위해 배의 돛을 조금만 건드리면 좍 풀리도록 손을 써놓고, 대포를 가리고 있던 기름 먹인 천을 다시 손보고 여기저기 설치된 밧줄 및 구조물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선원들이 생활하는 갑판 밑의 칸막이가 모두 철거되어 한쪽에 쌓이고, 해먹과 개인 소지품은 한쪽에 몰아졌다. 대포알과 화약을 낑낑거리며 갑판 위로 옮기면서, 부엌에서는 전투 후에 배를 채울 음식을 조리하는 작업이 행해졌다.
니아트리브 깃발이 내려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선원들은 자신이 저번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며 우쭐댔다.
일련의 과정들은 동시에, 그리고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이는 이 사략선의 선원들이 이 일을 오래 해왔음을 증명했다.
소년은 선수에 앉아 갑판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선원들을 차례차례 살폈다. 평소에 비해 더욱 힘세고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선원들이 눈에 띄었다.
“야, 너 평소에 포탄 두 개도 힘들지 않았어?”
“그러게. 요즘 운동을 해서 그런가?”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쌩쌩해? 안색은 안 좋으면서.”
“이상하게 몸이 가뿐하네. 힘들지도 않고.”
여러 선원들이 갑작스러운 체력 증가에 의문을 표했지만 ‘그냥 오늘따라 상태가 좋은가’하고 넘겼다. 배 위에서는 건강 상태가 순식간에 박살나는 경우가 많았으니 그 반대되는 경우인가 하고 그저 좋게만 생각한 것이다.
그걸 보는 소년의 눈이 비웃음을 담아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