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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의 유령선장-20화 (21/128)

20화

태동하는 재앙-5

끼이익......

파도에 배가 흔들리며 나는 나무 삐걱이는 소리가 소년의 상념 마지막을 장식했다. 소년이 머리카락에 손을 얹어 살짝 어루만졌다. 노인이 손을 댄 곳에서 아직도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찍찍대는 쥐 소리가 나무 칸막이 너머로 들려왔다. 사각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걸 보니 쉽비스킷이라도 갉아먹는 모양이었다. 위층에서 소란을 떨던 선원들은 잠잠해져 있었다. 시간이 오래 흘러 모두 잠자리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눈을 감고 있던 소년이 눈을 떴다. 새카만 눈동자가 단호함을 품고 그 너머를 꿰뚫을 듯 배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주먹을 쥐고 힘을 집중했다. 그러자 손가락 사이에서 검은 먹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패배를 겪고 난 뒤 산 속에서 생겨났던 능력. 이건 단지 소년의 몸을 보호하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니었다. 3급 마법사의 영혼 일부를 먹고 성장한 소년은 자신의 힘을 좀 더 잘 알게 되었다. 린던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소년이 겪은 쓰디쓴 패배의 기억이 되새겨져 마음이 무거워졌다.

‘숨을지 강해질지 선택하라 했지.’

소년은 별을 볼 줄 안다는 수수께끼의 노인의 마지막 말을 되새겼다.

‘세상은 날 미워한다 했다.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도 없다 했고.’

그럼 소년이 선택할 길은 정해져 있었다.

소년은 살고 싶었다. 그러려면 강해져야 한다.

소년의 손에서 생겨난 먹구름이 서서히 퍼지며 그 색이 옅어져 안개처럼 변했다. 바닥을 꾸물꾸물 기어가 소년이 타고 내려온 계단을 한 칸씩 타고 올라가는 것이 결코 일반적인 안개는 아니었다. 곤히 잠자고 있는 선원들이 가득한 위층으로,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사악한 마법이 다가가고 있었다.

소년은 숨겨 두었던 단검을 꺼냈다. 이 역시 불길한 기운을 뚝뚝 흘리며 검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소년이 검은 눈동자를 더욱 진하게 만들며 천천히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소년의 결정을 칭찬하듯, 키득거리는 옅은 붉은빛 웃음이 안개를 타고 흘렀다.

***

다음 날 새벽에 가까운 이른 아침.

“애옹!”

장교의 취미 호에는 귀여움을 받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쥐를 잡아먹는 역할에 애교도 잘 떨어 이쁨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고양이의 이름은 존슨. 고양이를 데리고 온 선원의 이름이 존이라 붙은 이름이었다.

“햐아악!”

갑판 위에서 선원들과 같이 놀던 고양이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허리를 곧추세우고 하악질을 했다.

“또 쟤야?”

“진짜 저주라도 받았나. 존슨이 볼 때마다 경계를 하네.”

고양이 존슨의 경계 대상은 바로 어저께 들어온 팔과 눈이 하나씩 없는 불길한 꼬마였다.

“재수 없어. 빨리 쫓아내야 하는 거 아냐?”

“......냅둬. 뭘 그렇게 무서워하고 그래?”

“그런 말을 하는 넌? 정작 어제 술 마시면서 재수 없는 애새끼는 당장 물에 빠뜨려 버려야 한다고 소리친 사람이 누구더라?”

“어흠, 그렇게 거칠게까진 안 그랬던 거 같은데.”

“지랄. 그나저나 왜 이렇게 안색이 안 좋냐 피터? 어제 술 잘못 마셨어?”

“글쎄다. 몸이 왠지 가뿐한 거 같긴 한데. 그렇게 안색이 안 좋냐?”

“핏기가 좀 없다? 괜찮냐?”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선원들을 지나치며 소년은 선수로 향했다.

근성을 시험하는 갑판 청소는 이제 끝났으니 당장은 할 일이 없었다. 소년에게 배의 이것저것을 알려줄 교육 담당 항해사는 아직 꿈나라에 가 있었다.

소년은 난간에 팔을 기대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막 동이 트려는지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어렴풋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동쪽 하늘의 정 반대편, 소년의 마법 색과 비슷한 새벽하늘에서는 덜 진 별이 깜박이고 있었다.

별들은 여전히 소년을 향해 뚜렷한 감정을 내보내고 있었다. 빈민가에서 소년에게 주먹을 휘둘렀던 일부 깡패들의 얼굴에서 느껴지던 강렬한 적의.

별을 보는 노인은 별을 안 보는 게 좋다 했지만 소년은 피하지 않았다.

소년은 눈 아랫살을 위로 올리고 미간을 좁혔다. 일그러진 오른쪽 얼굴 때문에 그런지 부자연스럽게 얼굴이 당겨 소년은 얼굴을 꾹꾹 눌러 화난 표정을 지으려던 걸 포기했다. 다시 아무 생각 없는 표정으로 돌아온 소년은 별에게, 세상에게 속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날 싫어한다고? 싫어하라지. 너희들이 뭐라 하건, 나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해질 거야.’

너희가 내게 칼을 겨누어도 아무렇지도 않도록!

***

니아트리브의 왕실마법사단장, 엘리자 스펠위버가 천체관측소에 쳐들어온 것은 사흘 전이었다.

‘사령술사는 절대 죽지 않았을 거다!’

복수심 탓일까, 엘리자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며 관측소의 점성술사들을 닦달해 이번 사건의 원흉인 사령술사를 찾아내라 일렀다.

점성술사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새로 생겨난 별은 없습니다. 진 별은 하나 있지만......”

그 별이 엘리자의 남편이라는 걸 모르는 점성술사들은 없었다.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엘리자의 별 옆에 붙어 다니던 별이었으니까.

“그럼 이미 존재하고 있던 거겠지. 빨리 찾으라 이 말이다.”

엘리자의 목소리에서는 은은한 분노가 엿보였다. 니아트리브에서 제일가는 마법사의 명을 거역하지 못한 점성술사들은 하늘을 관측하여 원래부터 있다가 최근 빛나기 시작한 사악한 별이 있는지 조사했다.

하지만 허탕이었다.

“사령술사를 의미하는 별도, 사악한 자를 의미하는 별도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별들이 꽤나 사나워진 것 말고는......”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은 소년을 부정한다. 따라서 소년을 상징하는 별이 하늘에 생겨날 리가 없다.

“놈이 어딨는지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알아내!”

점성술사들은 사흘 내내 각종 방식을 동원해 트리스탄을 죽인 사령술사에 대한 위치를 파악해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법들이 별과 하늘의 기운을 담아 점치는 것이라, 세상에 기록되지 못한 소년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단 하나. 별의 힘을 빌려 점치는 게 아니라, 세상을 감싸는 운이라는 힘에 따른 결정으로 결과가 정해지는 카드 점술만 빼고.

사흘 째 되는 날, 출장을 나갔던 카드마법 전문가가 천체관측소에 돌아왔다. 곧바로 니아트리브의 제일가는 마법사에게 붙잡혀 그대로 카드를 섞는 신세가 되었다.

“이 결과는...... 물 위에 있다는 말입니다.”

“물 위?”

“예. 그 자는 이미, 바다로 나간 모양입니다.”

고른 카드는 셋. 도망을 의미하는 담을 넘는 도둑의 카드, 바다의 신을 의미하는 삼지창과 왕관 카드, 그리고 배가 그려진 카드였다. 배가 정박해 있긴 하지만 물 위에 있는 건 맞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엘리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린던에서 탈출하지 못하도록 바로 해금령과 계엄령을 내렸는데! 지나가는 모든 배와 마차를 일일이 검문하였는데도 빠져나갔다고? 권위를 이용해 억지로 기간을 늘려 이제 슬슬 정박한 모든 배와 마차를 수색할 예정인데 이미 바다로 나가?

용암이 담긴 구슬이 깨진 것처럼 분노가 당장이라도 가슴 밖으로 터져나올 것만 같은 느낌을 참으며 엘리자는 이를 악물었다.

‘트리스탄, 트리스탄......’

당신의 원수를 갚을 길은 없는 건가요.

“알았다. 수고했다.”

엘리자는 분노를 꾹 참는 게 대놓고 느껴지는 목소리로 노고를 치하했다.

카드 점술은 정확했지만, 해석하는 건 결국 사람이었다.

그래서 엘리자는 실망과 분노만 안고 성과 없이 관측소를 떠나야 했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힘 있는 발걸음이 향한 곳은 니아트리브의 최고 권력자가 있는 곳, 여왕의 궁전이었다.

“사직을 윤허하여 주십시오.”

“불가하다.”

니아트리브를 지배하는 여왕을 찾아간 엘리자는 대뜸 단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다. 여왕은 당연히 거절했다.

신대륙이 발견되고 무역로와 보물을 탐사하는 시대. 국가 간의 세력 싸움은 점점 격렬해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왕실과 친한 왕실마법사단에 권력 공백이 생긴다면 귀족 의회가 자신 쪽 인사를 끼워 넣으려 군침을 흘리며 달려들 것이고, 이는 외부와 맞닥뜨려야 하는 현 시기에 내부에 금이 가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니 불가한다. 네 부군의 부고는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나, 원흉은 이미 바다로 나갔다지 않느냐.”

“......”

“자네가 퇴직하여 바다로 나간다 해도 그 넓은 바다에서 어느 세월에 놈을 찾겠느냐.”

“......예. 조언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후우. 엘리자. 네 심정은 백분 이해한다. 짐 역시 대공을 과거 전쟁에서 잃었으니까. 나는 에크나르프에 대한 분노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에크나르프에 대한 무제한 사략 사업 허가를 내주고 에크나르프에 대한 무역 의존도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고 있지.”

엘리자가 고개를 들었다. 여왕 엘리자베스 역시 눈에서 불꽃처럼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밖으로 불길이 뚝뚝 흐르는 엘리자와는 달리 여왕은 유리구슬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처럼 전혀 그 분노가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너도 마찬가지로 그 분노를 제대로 된 방향으로 돌리거라. 그렇게 화가 나서 사방으로 날뛰면 오히려 놈이 도망갈 틈을 주는 것뿐이야.”

“후우, 알겠습니다.”

무엄하게도 여왕의 면전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는 엘리자였지만 여왕에게 엘리자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보며 자랐기에 스승이자 집안 어른과도 같은 존재여서 그런 무례쯤은 문제없었다.

“해금령도 거두고. 사흘째 항구가 막혀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자네 독단으로 저지른 일이라 귀족 의회에서도 꽤나 말이 많아.”

“끄응, 죄송합니다. 눈에 뵈는 게 없어서......”

여왕은 개인적으로도 왕실마법사단장과 친하고 왕실마법사단 역시 왕실과 친하다. 그 둘을 싸잡아 깎아내릴 기회를 귀족들이 놓칠 리가 없다.

“괜찮다. 내가 워낙 유능하여 그 정도는 옹호해줄 수 있으니. 다만, 네가 바다로 간다면 말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를 해군 제독으로 임명할 생각이네. 그러면 자네는 원흉을 찾아 바다로 합법적으로 나갈 수 있으면서 니아트리브의 해양 패권을 위해 일할 수 있고, 이번 일도 자네가 제독이 되기 직전에 미리 훈련을 했다는 핑계를 댈 수 있지.”

“.......”

고위 마법사를 바다로 보낸다라. 일반적으로는 매우 드문 일이다. 바다는 죽을 위험이 매우 높기 때문에 마법사 같은 귀중한 인재를 섣불리 내보내지는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인재가 물을 다루는 물마법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물마법사를 상대하는 상대방은 굉장히 고역을 치를 게 틀림없었다. 그것도 원소 계열 마법의 종주국인 니아트리브의 고위 마법사이기까지 하니, 엘리자를 앞세워 기습을 행한다면 상대방의 해군력을 결딴 내버릴 수도 있으리라.

엘리자는 여왕이 해양 패권을 잡는 데 얼마나 진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이면에는 엘리자를 위한 여왕의 배려가 녹아들어 있는 것도.

하지만 친절은 그저 포장이라는 것을, 여왕의 눈빛 뒤편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움으로 알 수 있었다. 정치에 관심은 없다지만 엘리자가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숱한 인간관계를 겪어봤으므로.

이밖에도 걸리는 문제가 몇 있긴 했지만 복수의 기회를 마다할 엘리자가 아니었다. 발광만 하지 않을 뿐, 엘리자의 눈은 이미 뒤집힌 상태였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후후. 니아트리브 제일의 물마법사를 바다에서 상대할 수 있는 이는 없다고 생각하네. 마법사를 배에 태우는 경우는 유사시 자주 있다지만 한정적인 기간일 뿐이고 그것도 고위급을 태우는 경우는 거의 없지. 그 점은 적국의 허를 찌를 수 있을 거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보게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감사함을 표하는 엘리자와 그런 마법사단장을 보며 음산한 눈빛을 빛내는 여왕이었다.

세상의 변덕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대마법사의 손길은 일단은 소년을 빗겨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평행선이 아닌 만큼, 언젠가는 접점을 이룰 것이다.

그 점이 한 개일지 아니면 여러 개일지는 누구도 몰랐다. 별들조차도.

왜냐면 소년은 세상에 반하는 존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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