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19화 (20/128)

19화

태동하는 재앙-4

“이건 예상 외인데.”

선장이 이마에 주름살을 늘렸다. 해금령이 철회되지 않은 채 이틀이 더 지났다. 해군 장교로부터 들은 바로는 해금령은 기껏해야 하루이틀만 간다 했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 장교도 갑작스런 해금령 연장 명령이 내려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니아트리브의 1, 2급 전열함 셋이 여전히 린던 항을 나가는 바다를 그 거대한 체구로 막고 있었다. 전열함의 갑판 위, 통행금지를 의미하는 깃발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떡하죠 선장님? 이러면 더 빨리 돌아와야 되는데......”

보급품을 관리하는 선원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보고했다.

항구에 정박한 동안은 신선한 식사를 할 수 있지만 지금 이렇게 사방이 군인들의 서슬 퍼런 시선이 번뜩거리는 상황에서 함부로 돌아다니기는 꺼려졌다. 잘못해서 부패한 장교에게 꼬투리가 잡히기라도 한다면 큰돈을 뇌물로 소비해야 할 테니까. 더 나쁜 일은 납치에 가까운 강제징병을 당하는 것이다.

전역한 이도 강제 징병하는 악명 높은 징병관 무리를 맞닥뜨리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박 중인데도 배에 실린 물자를 소비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선장도 다소 불안하긴 했지만 아직까진 괜찮다며 말했다.

“내부 사정 때문에 조금 늦어지는 것뿐이겠지. 린던 항을 다 틀어막고 있으면 그 손해가 엄청나니까 오래 가진 않을 거다. 잘해봐야 이틀 더? 그 정도면 조금 아껴 먹거나 일 중에 약탈하면 돼. 정 불안하면 좀 더 보급하면 되고. 베커 그 양반이 일주일치 정도는 가불해 줄 수 있을 거야.”

선장은 린던 항에서 바닷사람들의 보급품을 판매하는 도매상인을 언급하며 선원을 달랬다.

“다 그 꼬맹이가 불운을 몰고 다녀서......”

조타수 발렌타인이 또 불평을 했다. 소년과의 첫인상이 안 좋아 억하심정이 제대로 생겼는지, 걸어가다가 나무가시에 찔려도 꼬마 탓, 갈매기가 똥을 싸도 꼬마 탓, 비스킷을 먹다가 실수로 바구미 애벌레를 씹어도 꼬마 탓이었다.

“발렌타인. 자네는 성질 좀 죽여. 어쨌거나 좀 더 기다려 보자고.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꼬마는?”

“꼬맹이는 뭐...... 알아서 잘 하곤 있습니다. 청소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농땡이는 안 부리더군요. 말을 잘 안하려고 하는 거 빼곤 아직까진 문제없어 보입니다.”

뺨을 수차례 때려도 말보다는 고개 끄덕이는 걸로 답하는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크롬웰은 그냥 포기했다. 맡은 일만 잘하면 됐지.

“그럼 됐다. 이만 나가자.”

보고를 위해 몰려 있던 항해사 등 주요 직급의 선원들이 선장을 따라 우르르 갑판 위로 올라왔다. 짠내 가득한 바닷바람이 그들을 맞이했다. 구름이 좀 낀 날씨라 우중충하긴 했지만 그거야 니아트리브 날씨는 늘 그렇고.

서걱서걱서걱

솔로 나무 비비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진원지는 갑판 한쪽에 쪼그려 앉은 채 인형처럼 반복해서 손을 놀리는 조그만 아이였다. 회색 머리카락이 분주한 움직임에 조금씩 흔들렸다.

“근성은 있네. 바로 옆에 땅이 있는데 도망치려 하지도 않고 말야.”

조그만 소년에게 가혹한 일거리를 맡긴 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기초적인 근성을 알아보려 한 것. 빈민가 출신이라 궂은일에 익숙해서 그런지 불평 없이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는 행동거지는 지난 이틀 반나절 동안 최소한의 신뢰를 주기는 충분했다.

모멸찬 시선과 욕지거리는 그대로였지만.

“이제 선상에서 필요한 수칙이랑 배 부위 명칭 같은 거 가르쳐 줘. 저런다고 깨끗이 닦이는 거도 아니니까 갑판 청소는 그만두게 하고. 우리는 애 괴롭히려고 태운 게 아니니까 보기 싫어도 적당히들 해. 어른이 돼서 그러고 싶나?”

선장이 간부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발렌타인이 괜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소년에게 날아든 욕설 중의 절반은 그의 것이었다.

갑판장 크롬웰이 다가가 뭐라고 하자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솔을 물통에 던져넣고는 뱃전 난간에 몸을 기댔다.

선장은 저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느낌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어린애 모습이라 약간의 연민이 갔다. 고향에 두고 온 어린 아들이 생각나서일지도 몰랐다.

“크롬웰, 먹을 거라도 좀 잘 줘.”

“어 그게, 애가 통 먹질 않던데요.”

“무슨 소리야 그게. 빈민가 애가 먹을 걸 안 먹는다고?”

“아예 안 먹는 건 아니고 적게 먹는다 이거죠.”

“선원 한 사람 분으로 준 거 아니야?”

“그거 고려해서 반 인분으로 줬는데도 남깁니다.”

“그래?”

꼴에 반찬투정이라도 하는 건가. 하긴 뱃사람이 먹는 건 가축도 안 먹는다며 육지 놈들이 비아냥거리기는 하지.

“냅둬. 배고프면 알아서 찾아먹겠지.”

이 말을 끝으로 모두의 관심은 소년에게서 멀어지고, 정박한 배에서 할 만한 여러 놀이거리를 찾아 모두가 흩어졌다.

***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소년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의 위치를 대충 가늠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판 아래로 품 넓은 옷에 끌려다니듯 터덜터덜 내려간 소년은 엉망인 배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카드놀이를 비롯한 도박을 하면서 떠드는 욕설과 고함, 뒤늦은 식사를 하는 건지 무언가를 익히는 냄새가 갑판 밑에 가득했다. 여기저기 떼다 말은 나무 칸막이들이 병든 노인처럼 어설프게 기울어져 있고 이곳저곳에 해먹이 사방천지에 축 늘어진 채 매달려 있었다. 그 사이에서 쥐와 선원의 술래잡기가 간간이 벌어졌다.

소년은 빈민가보다도 소란스러운 그 광경을 외면하며 배의 맨 밑층으로 내려갔다.

선원들이 다닥다닥 붙어 사는 곳에서 한 층 더 내려가 화약고를 지나고 배 밑바닥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면 식수통을 비롯한 적재물품들이 잔뜩 쌓여 있는 배 밑창이 나온다. 그곳의 한쪽 구석이 바로 소년이 배정받은 장소였다.

균형추 역할로 배 밑바닥에 쌓아둔 바위 사이로 배 안으로 샌 바닷물이 찰랑였다. 그 위에 대충 걸친 나무판자를 번갈아 밟으며 소년은 자신의 해먹이 걸린 곳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등불 하나 말고는 컴컴하고 고약한 냄새에 찍찍대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리는 배의 밑창은 익숙한 빈민가 한구석이 생각나는 곳이었다. 위치상으로 선미에 가까운 곳이기도 하고 칸막이 때문에 제법 공간이 좁아 소년이 가진 ‘넓은 곳에서 겪는 불안감’은 그나마 덜했다.

조그만 몸이 푹 들어갈 정도로 큰 해먹에 몸을 누이자 금세 근육이 풀리며 노곤해졌다. 지금껏 딱딱한 곳에서만 자던 소년에겐 꽤 새로운 감각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잠들지 않았다. 그는 할 일이 있었다.

후욱

공기가 밀려나는 느낌과 함께, 소년의 손 위에서 검푸른 불덩이가 생겨났다. 지글거리는 불길한 불덩이가 공기 아닌 것을 살라먹으며 음산하게 타올랐다. 가장자리는 여전히 어두운 푸른빛을 띠지만 중심부는 이전보다 더 진해져 깊은 바다 속을 연상케 하는 색이었다. 더 간다면 중심이 숯처럼 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혼......’

소년은 이러한 변화가 두 번째로 마법사의 영혼을 먹고 난 이후에 생겼다는 걸 안다. 소년이 빈민가 전체를 집어삼켜도 그 고위 마법사의 영혼만 못할 것이다. 맛도 당연히 최상이었고.

‘더 많은 영혼을 먹어야 해.’

그것이 소년이 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리라.

소년이 손 위의 불로 향하는 힘을 제한하자 언제 있었냐는 듯 커다란 불덩이는 픽하고 사라졌다. 배의 움직임을 따라 조금씩 흔들리는 등불의 은은한 불빛에 비쳐진 천장을 보며, 소년은 거지 노인의 말을 떠올렸다.

***

-마법사들은 시체를 다루는 마법을 사령술이라 부르지. 사령술은 예전에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말이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죽어서 흙이 되어 새로운 생명을 싹트게 하는 순환을 거친다. 그런데 네 사령술은 그걸 강제로 깨뜨려 사사로이 부리는 힘이야. 그러니 세상이 널 반길 리가 없지. 세상의 법칙을 일그러뜨리는 힘이니까.

-너는 남들이 꺼려하고, 핍박 받고, 외면 받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될 운명이다.

-그러니 너는 부정한 존재라 하는 거야.

그 말에선 분명한 동정이 느껴졌다. 빈민가 전체를 집어삼키고 무수한 희생자를 남긴 소년을, 노인은 안쓰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그래야 할 운명이기도 했는데 너는 거기서 한술 더 떴다. 이전의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빈민가를 모조리 집어삼켜 자연에 반하는 거대한 사건을 만든 거야.

-너는 그저 네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따라 최선의 노력을 한 것뿐이다. 그게 세상의 도덕이나 규율과는 동떨어졌을지라도 말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네 사정을 봐주진 않아.

-그때부터 세상은 너를 더 싫어하게 되었어. 넌 명백히 세상의 적이 된 거야. 그 길이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을지라도 세상은 널 봐주지 않았을 거다.

-이 거지같은 세상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으니까.

이 말에선 은은한 분노가 엿보였다. 이 노인은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걸까. 소년은 세상이 자신을 적으로 돌리니 마니 하는 건 아직은 잘 와닿지 않아 그저 눈만 깜박였다.

-이제부턴 지금까지 겪어왔던 단순한 핍박 수준이 아니게 될 거야. 네가 가는 곳마다 앞으로 수많은 분노와 원한이 생겨나며 널 향할 거다. 아예 세상 자체가 그걸 유도하겠지. 지금까지 네가 겪은 건 약과라 생각할 정도로. 네가 무언가를 하건 안 하건, 이유가 있건 없건. 되돌릴 수는 없어. 이렇게 된 이상, 계속 그 방향으로 가는 수밖에.

-살고 싶으면 강해져야 한다. 세상의 미움을 받아칠 정도로.

소년은 물었다.

“그럼, 할배는 왜 나한테 이런 걸 알려주는 거야?”

노인은 그저 낄낄 웃으며 술잔을 비울 뿐이었다. 그 웃음은 경박했지만 소년은 그 웃음 안에 무거운 쇳덩이가 들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 그것부터 말해봐라.

그 말을 하는 노인의 눈빛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마치 소년에게서 자신이 바라는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소년은 그 물음에 주저하지 않고 솔직히 답했다. 노인은 잠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소년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크하하 웃었다.

-정말, 정말로 예상하지 못할, 그런 거로구나. 누가 널 보고 그런 걸 원한다 짐작하겠어. 그래, 그런 걸 원할 수도 있지. 그래. 그래...... 너도 사람이구나. 너도 사람이야......

뒤로 갈수록 노인의 목소리는 작아져 듣기 어려웠다. 그의 얼굴에는 왠지 모르게 보람이 느껴졌다. 소년은 그 표정을 해석할 수 없었다. 혼자 살기도 팍팍한 빈민가에서 남에게 무언가를 베풀고 얻는 보람이란 감정을 바라는 건 시궁창에 떨어진 과일이 썩지 않길 바라는 것과 같은 수준이니.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네 삶은 바뀔 수 있다. 운명은, 바꿀 수 있는 거야. 그래야만 해. 지금처럼. 암, 그렇고말고......

노인은 소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소년의 회색 머리에 묻은 검댕이 노인의 손에 묻었지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

노인의 손에서부터 소년이 느껴본 적 없는 온기가 전달되었다. 주름 가득해 고목나무와도 같은 얼굴로 씩 웃으며 노인이 손을 뗐다. 소년은 떨어지는 노인의 손에 아쉽다는 시선을 보냈다.

노인은 왜 이런 걸 알려주냐는 소년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바다로 가거라.

-바다는 넓다. 그러니 그만큼 널 향하는 악의에 찬 손길은 길을 헤맬 거다.

-배를 타고 그 안에 숨어라. 별빛에게서 네 모습을 숨겨라.

-그 뒤에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평범한 선원으로 힘을 숨기고 살건, 네 힘으로 배를 장악하고 세상이 더 널 미워할 길을 선택하건. 네가 말했듯이...... 네가 원하는 일을 하건.

-내가 해줄 조언은 여기까지다. 그 이상은 간섭이 될 뿐이지. 나는 여기까지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구나.

“아직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어. 왜 날 도와주는 거야?”

노인은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 눈이 한껏 휘면서 노인의 푸르던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다.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년도 따라 일어서려 했지만 마법사의 자폭으로 인한 부상이 아직 낫지 않아서 그런지 이 검은 구름이 소년을 무겁게 속박했다. 부정적으로 발을 묶는다는 느낌이라기보단 지금 움직이면 큰일난다는 듯 극구 말리는 느낌이라 억지로 움직이지 못했다.

“어디 가?”

-어디론가. 살다 보면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노인은 하하 웃으며 등을 돌렸다.

미련이 가득 남았으면서도 홀가분한 느낌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한밤중의 산 속으로 사라졌다. 소년은 한참 동안이나 노인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