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태동하는 재앙-2
“언제부터 안 거야?”
-꽤 됐지. 네가 죽음을 볼 줄 아는 건 당연히 믿고, 짐승을 네 하수인으로 만드는 것도 진작 알고 있었지. 영혼을 먹는 것도 알고 네가 몇 주간 골목을 돌아다니면서 빈민들을 모조리 시체로 만드는 것도 다 봤고.
무슨 집착증에 빠진 것도 아니고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좋은 구경 했다며 낄낄거렸다. 노인은 이 힘이 뭔지 아는 걸까.
“할배, 내 힘이 뭔지 알아?”
-알긴 개뿔이. 나도 몰라. 거리에서 밥 빌어먹고 사는 늙은이에게 마법을 설명해 달라 하냐? 뭐 말 그대로 죽은 놈들 살리는 힘이겠지. 멀쩡하지 않게. 로드릭인가 하는 그 녀석이 나보단 더 잘 설명해줄 게다.
마법사까지? 정말 노인은 소년이 한 걸 죄다 알고 있었다.
분명 사방을 살피면서 지냈는데. 하긴, 소년은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소년이 목격자를 살피는 건 시각과 후각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공포에 찬 향기를 맡는 방식이다. 소년이 하는 일의 십중팔구는 일반인이 무서워할 행동들이니까.
그러나 이 거지 늙은이에게는 구릿한 체취 말고 감정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노인은 소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소년과 눈이 마주치고서 유일하게 인상을 찌푸리지 않는 이다.
“마법사 아저씨 말은 뭔 소린지 반도 못 알아듣겠더라고. 오히려 할배가 더 잘 설명하면 했지.”
-허이구, 하여튼 예전부터 그랬지만 넌 너무 욕심이 많아.
소년이 몸을 휘감은 아릿한 통증에도 애써 피식 웃었다. 뭐 더 재밌는 얘기 없냐고 보챈 적은 자주 있긴 했었지.
노인이 품에서 술병을 꺼냈다. 유리병이었다. 반질반질한 것이 거지가 절대 구할 수 없을 고급품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슬슬 성인이 다 되어가는구나.
“내 나이가 열일곱이야?”
소년은 아직도 검은 구름 같은 것에 감싸인 팔을 들어 손을 확인했다. 조그만 손가락과 창백한 피부. 열일곱은커녕 열 살도 겨우 넘어 보였다.
-그래. 어른이면 자고로 술은 마실 줄 알아야지. 옛다. 잔 받아라.
노인이 등에 있는 보퉁이를 풀고 술잔을 내밀었다. 역시나 비싼 유리잔이었다.
-네가 빈민가를 쓸어버릴 때 빌보 네에서 가져온 거야. 탈영병 잡고 현상범 잡으면서 악착같이 돈만 모으더니만, 녀석이 꿍쳐둔 게 꽤 되더라고.
거지 노인은 빈민가를 주름잡고 있던 조직 중 하나의 본거지를 털어먹은 모양이었다. 소년의 눈이 의문을 품었다. 시체를 만들면서 빈민가의 온갖 곳을 쏘다녔지만 노인의 모습은 빈민가에서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로드릭을 만난 이후 이야기를 들으러 노인을 만나러 가지도 않았기에 그저 어련히 잘 번화가에서 구걸하고 있겠거니 했는데.
시체들의 시야가 사방에서 번득이는데도 볼 수 없다니. 대체 무슨 수로......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받아. 자.
쪼르륵하는 맑은 소리를 내며 붉은 포도주가 소년의 잔에 가득 채워졌다.
-그래. 이 냄새는 어떠냐?
“흠흠. 이상해. 쓴 냄새야.”
-그게 인생의 냄새란다. 끼끼끼끼......
그렇게 웃으며 밤하늘을 쳐다보고 웃는 노인의 웃음소리는 왠지 모르게 몹시 처량해 보였다.
-자 쭉 들이켜.
소년은 술을 입에 머금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쓰고 떫다. 이런 걸 무슨 맛으로 먹는 거지?
-표정에 다 써 있구나. 술은 맛이 아니라 향과 분위기로 먹는 거란다. 온갖 더러운 걸 다 봐 가면서도 삶을 살아가듯, 술도 냄새로 맛을 잊고 견디면서 삼켜야 하는 법이야.
대체 무슨 말이야? 어른들의 사회를 모르는 소년은 눈동자에 의문만 띄울 뿐이었다.
“으윽.”
술을 삼키자 소년의 표정이 더 찌그러졌다. 홧홧한 이 느낌. 별로야. 혀끝을 맴도는 톡 쏘는 느낌이 신 냄새가 나는 생선 찌꺼기와 비슷했다.
-술도 마셨으니 너도 이제 어른이구나. 하지만, 몸만 어른이라고 다 어른은 아니지. 한 사람 몫을, 제대로 된 생각을 하면서 삶을 살아야! 진정한, 커어! 어른이라고 할 수 있어.
거지 노인이 소년의 잔을 뺏어가 한 잔을 콸콸 부어 벌컥벌컥 목으로 넘겼다.
-꼬마야. 넌 세상을 의심하면서 살 줄 알아야 한다.
노인의 입에서 술냄새가 풍겼다. 어째서인지 소년이 맡은 것보다는 좀 더 맡기 좋았다.
-남이 주는 호의는 절대로 순순히 믿지 말라는 건 너도 알고 있을 거야. 판자촌이 어디 신뢰와 약속의 땅이더냐.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사람 간의 신뢰를 얘기하는 게 아니야. 내가 말하는 의심은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이다. 좀 다르게 말하자면 의심을 통해 넓게 보란 얘기다. 흙을 보고 아 흙이다 하는 게 아니라 이 흙이 어디서 흘러왔는지, 이 흙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 흙이 혹시 다른 사람이 퍼온 건 아닐지, 아니면 누가 여기다가 뭘 파묻은 게 아닐까 의심하는 것.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란 거야?”
-맞다. 주변을 보고 상황을 파악하고 혹시, 만약에, 어쩌면 등등의 낱말을 넣어 가면서 상대의 의도를 폭넓게 유추해 읽을 줄을 알아야 해. 그래야 살기 더 편해질 거다.
“......”
-그 다음. 네가 할 수 있는 최적의 행동을 해라. 그게 네 온 힘을 다하는 것이건, 간을 보는 것이건. 모든 걸 드러내진 말고, 확신이 있을 때 움직이되, 그 확신을 신중하게 결정해라.
어려운 단어가 쏟아져 나왔지만 총명한 소년은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자하게 행동했다가 패퇴한 소년에게 가장 필요한 조언들이었다.
-이번처럼 막무가내로 달려들다가 깨지지 말고. 나 같으면 패배했을 때를 대비했을 거다.
으이그 하면서 핀잔을 주는 노인의 말에 소년은 시선을 피했다. 상대방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앞뒤 잴 것 없이 멧돼지처럼 달려든 건 소년의 실책이 맞았으니.
-또한, 네 자신도 섣불리 믿지 마라.
“......!”
-네가 사로잡은 마법사가 자폭했듯, 네 힘은 구멍이 많다. 네 힘이 모든 걸 해결할 거라 생각하지는 마.
“역시, 뭔가 알고 있는 거지?”
-별거 아니야. 단지, 별을 읽을 줄 아는 것뿐이지.
별?
소년은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인지 밤하늘의 별들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변하지 않은 건 위에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적대적인 느낌뿐.
-웬만하면 밤하늘, 특히 별은 안 보는 게 좋아. 별은 이제 네 적이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빛이 보내는 적의를 받자니 기분은 확실히 안 좋았으니까. 노인이 술 한 잔을 더 비웠다. 그리고 잠시 조용해졌다. 그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입을 살짝 벌릴 채 무언가를 말하는 준비를 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세상은 반복된다. 사람들은 과거에서 배울 줄 모르지. 같은 실수와 욕심을 반복하며 멸망의 끝으로 달려가고 있어.
“멸망이 뭐야?”
-별거 아니다. 모든 게 바뀐다는 거야.
노인이 우습다는 듯 픽 웃었다. 그 웃음은 소년을 향한 게 아니었다.
-하늘의 별이 뜨고 지듯이 찬란하던 세상도 언젠가는 수평선 밑으로, 땅 아래로 가라앉기 마련이지.
별 얘기가 나와서 그런지 소년이 저도 모르게 하늘을 보려 하자 노인의 큰 손바닥이 소년의 시야를 가렸다.
-하늘을 쳐다볼 생각은 말라 했다. 네 존재는 하늘 아래 있어서는 안 되는 거거든.
“내가, 왜 있어서는 안 돼?”
소년의 말에는 약간의 반항기가 담겼다.
모두가 소년을 싫어한다. 죽음을 예견해 밥을 빌어먹는 생활 이전, 평범해 보이는 빈민가의 꼬마일 때부터 모두가 소년을 꺼렸다. 자신이 다가가면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이를 드러내며 욕을 내뱉는 사람들. 소년은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취급을 받아왔다. 이유 없이 발로 차이고 돌에 얻어맞았다.
소년은 겉으로는 묵묵히 받아냈지만 내심은 당연히 그게 싫었다. 이유를 물어도 ‘그냥’이라는 답만 돌아왔기에 소년은 늘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는 걸 궁금해했다.
-미안한 얘기지만, 너는 부정 그 자체다.
***
쓰레기 더미라 착각해 소년의 머리 위에 올라앉은 갈매기가 퍼덕이며 끼룩거리는 소리에 소년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하늘 정가운데에 있던 해는 살짝 기울어 있었고 생선을 긁던 이들도 그물 더미만 남기고 사라져 있었다. 짐을 옮기느라 분주하던 부둣가는 하역이 다 끝났는지 한산해져 있었다.
웅크리고 있느라 저린 다리를 살짝 폈다. 이곳저곳에서 주워 모은 지저분한 천쪼가리들이 몸에 스쳤다. 소년이 움직이자 갈매기가 화들짝 놀라 푸드덕 날아올랐다.
“.......”
소년은 먹이가 지나갈 때를 기다리는 숨은 맹수처럼, 표적으로 삼았던 배를 응시했다.
***
하역이 끝나고, 발렌타인과 코멧은 쉬다가 아까 보았던 거지 소년이 근처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거 단단히 찍힌 거 같은데.”
“뭐 어때. 조만간 여기 뜰 건데. 그러면 아쉬워서라도 다른 배에 들러붙겠지. 뭐 던져주지도 않았는데 계속 있네.”
“무슨 얘기 해?”
갑판장 크롬웰이 둘에게 다가왔다.
“어 호국(護國)경 왔나.”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나는 그 백년 전 호국경 면상도 본 적 없다고. 그리고 난 왕 목자를 깜냥도 없어.”
“당연하지. 지금 니아트리브는 왕이 아니라 여왕만 있으니까.”
“코멧, 그런 재미없는 농담 하지 말랬지. 크롬웰, 저 꼬마 봐 꼬마.”
“누구?”
“저기 저 그물더미 옆에 구석탱이.”
“천쪼가리 더미 아니냐? 아아. 사람 있네.”
“쟤가 낮에 코멧을 따라왔거든? 선장님이 가라고 해서 가긴 했는데 줄곧 저깄더라고.”
“그래서? 저게 이리로 와서 구걸하는 것도 아니잖아.”
“기분이 나쁘잖아 기분이!”
“맞아. 분위기가 쎄한 것이 보면 볼수록 별로란 말이야.”
“별 같잖은 걸. 그렇게까지 더러우면 가서 엉덩이라도 차주던가. 그나저나 빈민가가 싹 타버려서 생존자도 하나 없다고 했는데 살아남은 애가 있긴 했네?”
거지들은 아무데서나 구걸을 하지 않는다. 구역마다 어부, 폭력배, 상인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함부로 구역을 침범했다간 몰매를 맞고 쫓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빈민가가 대화재로 소실된 이 상황에서 못 보던 거지가 나타났단 건 십중팔구는 빈민가에서 살아남은 거란 얘기였다. 빈민가에 살던 폭력조직들이 사라져버려 구역의 공백이 생긴 틈을 타 어딘가에서 들어온 거지일지도 모르지만.
“쯧, 진짜 손이라도 봐줄까. 야 빅커스!”
“뭔 일이시요잉?”
니아트리브 서남부 웨스트에일스 방언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선원이 발렌타인의 부름을 듣고 설렁설렁 걸어왔다.
“저기 저기 보이냐? 그물 밑, 아니 밑이랜다. 옆에.”
“으디 말, 아 즈거요? 아따 얼라가 꽁꽁도 숨어있구마.”
“쟤가 아까 전에 여기 기웃거리다가 선장님한테 차였거든. 그 뒤로 계속 저깄는 거 같더라.”
“슨장님께서 애를 찼다고예? 하이고매, 슨장님 그르케 안 봤는디.”
“아니, 진짜 걷어찼단 얘기가 아니라 타고 싶어 하는 걸 쫓아냈다고. 하여튼 안 가고 있으니까 네가 좀 혼 좀 내서 쫓아 보내.”
“조타수 행님예, 그렇게까지 할 일이 읎어예? 집도 읎고 배곯는 애한티 빵쪼가리라도 든져주진 못할망증......”
호감도가 감소했습니다! 라는 환청이 들릴 법한 표정으로 빅커스가 발렌타인을 바라보았다. 빅커스는 거지 출신이라 그런지 약간의 동정심을 가진 듯했다. 더구나 대상이 아이라서 더욱.
“맞아 발렌타인 왜 그러냐.”
“야! 너도 아까 전까진 내말 동의했잖아.”
코멧이 빈정거리자 발렌타인이 짐짓 화내면서 서로 투닥거렸다.
“에이 그럼 나라도 간다.”
“어이구 행님. 적당히 하소.”
성격 괄괄한 발렌타인이 적당히 마무리를 짓지 못할까 걱정된 셋이 그 뒤를 따르게 되는 바람에, 건장한 선원 넷이 한낱 거지 꼬마에게 우르르 몰려가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어이 꼬마.”
발렌타인은 이 거지를 보면 볼수록 기분이 나빴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눈을 마주친 순간부터 굉장히 기분이 더러워졌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서 그의 손속은 거칠었다. 거적때기를 콱 잡아 멱살을 잡고 휙 들었다. 조그만 체구가 허공에서 대롱거렸다.
“어어 잠깐만예, 행님! 그손! 그손 당장 놔라 안캅니까! 얼렁! 얼렁!”
발렌타인이 홱 잡아채느라 거지 꼬마의 머리를 덮고 있던 거적이 벗겨지며 곳곳이 그을린 회색 머리칼이 드러났다. 그러자 빅커스가 기겁하면서 발렌타인의 손을 탁탁 때리면서까지 그를 말렸다.
“뭐? 왜 그래 너?”
“아따, 머리를 보니 알겠네예. 저주받은 얼라라고, 빈민가서 유명하다 안캅니까! 얼른 손 떼셔야 한당께요!”
“저주? 아니 무슨, 아아 알았다 알았어.”
빅커스가 호들갑을 떨어 대면서 말리자 발렌타인은 손을 놔야 했다. 저주 운운하는 게 재수가 없을까봐 얼른 놓았다. 거지 꼬마가 땅바닥에 철푸덕 엉덩방아를 찧었다. 소년은 산발의 머리카락 밑으로 보이는 스산한 눈으로 발렌타인에게 말했다.
“3일.”
“뭐?”
“너. 목숨 3일 남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