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태동하는 재앙-1
린던의 남서쪽 부둣가에는 여느 항구가 그렇듯 많은 배들이 닻을 내린 채 언제 바다로 나갈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끼룩대는 갈매기 소리와 고즈넉한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한 카락(Carrack)이 부두에 조용히 정박하고 있었다. 무려 4개 돛대를 가져 선체가 길쭉했고 갑판 위에 20문에 달하는 대포가 죽 늘어서 있는 배였다.
그런데 평범한 카락이라기엔 돋보이는 구석이 몇 군데 있었다. 우선 선수 부분이 뿔처럼 튀어나오고 철판을 덧대 딱 봐도 충각용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고, 선수부와 선미부가 일반적인 카락보다 낮으며 나무판이 목책처럼 세워져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아무리 카락의 체급이 다양하다지만, 부가적인 장치를 빼고 본다면 카락이라기 보단 포갑판 없는 개조된 갤리온(Galleon)에 더 가까운 요상하게 생긴 배였다. 포갑판이 없으면 갤리온으로 불리지도 못하지만 말이다.
신대륙이 발견되고 나서 한층 더 치열해진 해상 패권 경쟁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배들이 마구잡이로 생산되고 있었다.
특히 신대륙의 황금을 실은 배를 약탈하기 위해 사략선 사업이 흥행했는데, 사략선을 후원하는 상단주 혹은 선장의 취미에 따라 다양한 규격으로 배가 건조되곤 했다. 그래서 이게 무슨 배라고 구분해야 될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수많은 변종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일선의 선원들은 돛의 구분이나 돛대 수, 대포 수로 종류를 따지기보단 대충 느껴지는 분위기로 배를 구분하곤 했다.
좀 작아 보인다 싶으면 카락 혹은 슬루프(Sloop)로 대충 퉁친다거나 프리깃(Frigate)과 코르벳(Corvette)을 같은 걸로 취급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대포만 달려 있으면 그냥 다 갤리온이나 전열함으로 부르기까지 하는 등 제멋대로였다.
국가가 정한 규격으로 건조되는 군용 함선들은 그 체급에 따라 함종이 명확하게 갈리기에 종류 구분에 있어서 좀 나은 편이었으나, 해군 역시 조금씩 바뀌는 해상전에 적응하기 위해 다양한 개조 시도가 이어지고 있어 두 종류의 함선을 뭉뚱그려놓은 특징의 함선이 튀어나와 대체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로 입씨름이 벌어지는 건 일상이었다.
특히 격렬한 전쟁 뒤에는 척수를 채워 넣기 위해 민간 선박을 징발하기에 큰 전투가 벌어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해군도 제멋대로인 배들을 가지는 건 흔한 일이었다.
이 변종 카락, ‘장교의 취미’ 역시 그런 시대상을 따라, 그 이름대로 휴직계를 낸 해군 장교의 취미를 따라 건조된 녀석이었다.
충각을 위해 선수에 철판을 덧대고 보딩을 위한 장치까지 달려있는 이 배는 웃기게도 평범한 무장상선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무장상선의 등록기준이 대포 10문 이하라는 걸 생각하면 20문을 가진 이 카락은 확실히 과한 무장이었다. 포갑판이 없는 것도 고리타분한 옛 기준 때문이었다. 무장상선은 법적으로 포갑판을 가질 수가 없어 그냥 갑판 위에 대포를 주르륵 늘어놓았다.
딱 봐도 전투용인데도 무장상선이라고 눈 가리고 아웅을 하고 있었지만 무장상선 기준은 만들어진지 50년이 넘어 지금은 시대착오적인 법이 된 탓에 아무도 지키는 이가 없고 그걸 잡는 이도 없었다. 포갑판이 없는 이유는 이 배가 만들어졌을 무렵이 무장상선 기준을 지키는 것에 엄격했을 때라 어쩔 수 없었고 다시 달자니 돈이 들어 냅두었다.
그런 다소 복잡한 역사를 지닌 장교의 취미 호의 선원인 발렌타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항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유는 부두 너머로 보이는 처참한 광경 때문이었다.
항구라면 당연히 존재하는 바다 비린내 말고도 코를 찌르는 자욱한 탄내가 바람에 섞여 흩날렸다. 옅은 연기가 이리저리 날려 사방이 안개가 낀 것처럼 다소 흐릿했다. 부두 너머 빈민가가 있었던 곳은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검고 하얀 잿더미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붉은 외투를 입은 린던 수비대가 삼엄한 기세로 부두를 비롯한 린던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또한 약간 떨어진 바다에는 100문에 가까운 대포로 그 어떤 해적도 두 손을 공손히 모아야 하는 함선들이 항구를 포위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니아트리브의 강력한 해군력을 상징하는 1, 2급 전열함들이었다.
니아트리브의 육해군이 모두 동원되며 항구가 시끄럽다보니, 장교의 취미 호 말고도 다른 배들, 심지어 소형 어선조차도 선장과 선원이 모두 탑승한 채 긴장하고 있었다.
빈민가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 차지한 저 잿빛 잔해는 어젯밤의 강력한 화재 사건의 결과물이었다.
빈민가의 범죄조직을 소탕한다고 린던 밤거리를 소란스럽게 하나 싶더니만 갑작스러운 대화재가 일어난 것이다. 린던 거리와 부두에서는 사악한 마법이니, 저주니 하면서 온갖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떠돌며 모두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빠져들게 했다.
굳이 그런 소문이 아니더라도 서슬 퍼런 기세로 붉은 외투들이 나돌아다니는데 긴장을 안 할 이들은 없었다. 장교의 취미 호는 일이 벌어지고 난 뒤인 오늘 새벽에 도착했기에 흉흉해진 분위기에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당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원......”
선장 홉킨스가 혀를 차며 쉽비스킷 조각의 애벌레를 탁탁 털고는 입에 쑤셔 넣었다. 발렌타인은 선장에게 쉽비스킷을 가져다 준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장이 단단한 비스킷을 입 안에서 불리느라 조용해졌기 때문이었다.
선장은 어제의 대화재를 알고 난 뒤부터 계속해서 ‘귀족과 왕실이 서로 싸우는 시작점이 될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어쩌면 큰 격변이 일어날 징조일지 모른다’하면서 이 사건으로 변화할 국내 정세를 계속해서 지껄였다.
그 수다를 받아줘야 하는 건 선장 옆에서 줄곧 붙어 다녀야 하는 조타수인 발렌타인이었다. 장전하는데 한참 걸린다는 선박용 대형 박격포의 장전시간 따위는 우습게 흘러갈 수준의 긴 수다는 듣기 고역이었다.
선장이 휴직계를 낸 장교이고 하급 귀족이라 배나 타는 무지렁이보다 시야가 넓은 건 이해하겠는데, 그걸 왜 알아듣지도 못할 사람 앞에서 떠들어대서 청자를 괴롭게 만드는 건지 원.
“그나저나 해금령은 언제 끝난답니까? 빨리 나가야 돈을 벌건 말건 하는데......”
바로 보급만 받고 다시 바다로 나가야 하는데 난데없는 사건 때문에 발목이 잡혀 있는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짐 들이는 날이었지? 검문이라도 받나 소식이 없는데.”
“저 아래 거리에서 자다 오는 녀석 몇 있으니까 오면 물어보죠 뭐. 듣자하니까 마차 하나하나 검문한다고는 하던데.”
“아 저기 오네.”
말하기 무섭게 장교의 취미 호의 선원 하나가 등을 긁적이며 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뒤를 낯선 이가 따라오고 있었다.
“아으 오늘따라 숙취가 장난 아니네.”
“코멧, 얜 누구야?”
“응? 어, 너 누구냐?”
“같이 오길래 아는 애인 줄 알았는데 그냥 졸졸 따라온 거였어? 어이, 여긴 애가 타는 데가 아냐 훠이훠이.”
거적때기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꼬마아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배로 오르는 널빤지 앞에 그저 멀뚱히 서서 머리를 반쯤 가린 거적 밑으로 선원들을 살필 뿐이었다.
“대충 무슨 일인지는 알거 같기도 하고.”
홉킨스 선장이 선수에서 새하얗게 변해버린 빈민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꼴을 보니 저 불탄 빈민촌에 살던 애인 거 같아. 있던 곳이 다 불탔으니 어디 갈 곳이 없었겠지.”
“갈 곳이 없기는요, 거지는 그냥 아무데서나 자면 되는 거 아닙니까.”
“코멧 이 멍청아, 길바닥도 나름 좋은 데 나쁜 데 따로 있고 그나마도 거지들이 텃세부린다고.”
발렌타인이 코멧에게 핀잔을 주었다. 선장이 피식 웃더니만 아이더러 들으라는 듯이 차갑게 말했다.
“뭐 그건 그렇고, 쫓아내야지. 여기가 애들 재워주는 데는 아니잖아.”
거지 소년에게 향하는 눈빛은 무관심 그 자체였다.
같은 부두 근처에서 같이 일하는 이도 아니고 지인도 아닌 이에게 동정할 이유는 없었다. 하물며 근근이 먹고 살며 제 몸 건사하기도 힘든 뱃사람임에야.
그 말에 거지 꼬마는 고개를 푹 숙이고 등을 돌렸다. 제법 처량해 보였지만 선장의 시선에서는 왠지 모르게 가식적인 느낌이 들었다.
“어휴, 근데 아까 눈 봤냐 코멧? 왠지 소름끼치던데.”
“그랬나? 나는 못 봐서.”
두 선원이 주절대는 걸 귓등으로 흘리며 선장은 다시 잿더미가 된 빈민가를 보며 상념에 잠겼다.
얼마 뒤. 선장은 거지 꼬마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배에 짐을 싣고 있는 분주한 분위기 너머에서 이쪽을 빤히 보고 있는 조그만 형체가 선장의 눈에 들어왔다.
생선을 손질하고 있는 곳 근처 구석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거적때기 뭉치 사이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선장과 그 배를 향하고 있었다.
‘기분 나쁜데.’
평소에는 그저 신경을 끄고 머리에서 지울 한낱 거지의 눈빛이 이상하게도 몹시 껄끄러웠다. 마치 저 거지 꼬마와 엮이면 좋지 못할 것 같은 그런 직감. 오랫동안 뱃일을 해온 선장의 예민한 감은 저 거지에게서 벗어나라고 외치고 있었다.
‘으음.’
선장은 소년을 보던 시선을 치웠다. 저 꼬마를 보면 볼수록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에크나르프 해군과의 포격전에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포탄을 봤을 때 느꼈던 그런 오싹함이 저 거지에게서 느껴졌다.
대체 저 거지 꼬마가 뭐길래.
기분이 나빠 뺨을 실룩거리면서 선장은 괜히 하역 물품 목록만 들여다보았다.
***
축대 아래의 구석에서 소년은 배를 보고 있었다. 소년이 그 배를 주시하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빈민가에서 가장 가까운 부두에서 가장 큰 배였으니까.
갓 잡아온 생선 비늘을 그물 더미 위에서 벗겨내는 벅벅대는 소리를 들으며 소년은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정신이 드냐?
잡아온 마법사의 자폭 이후, 고통과 절망에 까무룩 정신을 잃었던 소년이 깨어나며 들은 목소리였다.
세상의 모든 회한이 다 들어있는 가래 가득 낀 탁한 목소리. 소년은 밤이슬이 올라앉은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거지 노인.
빈민가와 잘 사는 것들의 거리 사이의 번화가에서 구걸을 하는 이였다.
소년과도 꽤 접점이 있었다. 빈민가에서 살며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 외의 지식들은 이 거지 노인이 가르쳐 주었다. 모두가 시선을 피하는 것과는 달리 이 정신이 살짝 맛이 간 노인만이 낄낄거리며 소년과 친근하게 지내곤 했다.
소년은 탁한 눈으로 노인을 멍하니 보다가 자신의 몸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의 몸이 포근한 검은 뭉게구름 같은 것으로 얇게 덮여 있었다.
-흐흐, 눈이 아예 죽었구나. 어쭈? 네가 가지고 있는 힘이 들켰다 이거냐? 눈에 살기부터 품는 걸 보니 너는 역시 태양 아래 살아가기는 글렀구나.
“미안 할배. 본 이상 죽어줘야겠어.”
-이 멍청한 녀석아. 그렇게 마법사들에게 당해놓고도 또 섣불리 상황을 재려 드느냐? 내가 네 힘을 얼마나 많이 봤겠냐? 응? 그래도 미안해할 줄은 아는구나.
“......”
자신의 힘을 숨기고 살아온 소년에게 있어서 비밀엄수는 최우선이지만, 노인의 말을 들으니 마법사들에게 당한 게 생각나 행동에 나서는 걸 주저했다. 노인을 죽여서 일이 잘못되면 어쩌지? 그 모습을 보며 거지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된통 당하더니만 이빨 빠진 개가 다 되었구나. 읏차.
노인은 허리를 푹 숙인 채 소년을 보고 있던 자세를 바꾸어 소년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언제부터 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