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죽음을 보는 소년-10
“해적이, 되고 싶은 겁니까?”
누군가에게는 몸이 두려움으로 떨리고, 누군가에게는 몸이 전율로 떨리게 하는 단어. 바다의 공포라 하지만 정작 실상은 별거 없기도 하며, 힘없는 자에게는 신처럼 군림하지만 해군 앞에서는 설설 기는 이들. 바다의 심기에 따라 죽고 살고가 결정된다는 것에는 어부와 별반 차이가 없는 직업.
해적.
“음. 그런가?”
제법 천진난만하게 고개를 슥 기울이며 생각에 잠기는 소년.
해적?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무역선을 터는 게 해적이 하는 일이라곤 하지만. 해적이라는 구체적인 단어를 앞세워서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 없었다.
“해적도 나쁘진 않을 겁니다.”
회색빛 하늘을 슥 쳐다보는 소년에게 로드릭은 다소 다급함이 느껴지는 말투로 건의했다.
그 속내는 사악한 대마법사가 될 게 뻔한 이 소년이 대륙으로 가 대학살을 벌이는 것보단, 차라리 바다에 나가 배와 항구나 털어먹으며 사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거였다. 이 소년의 성향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차라리 그 방향이 나을 것이다. 도중에 풍랑이라도 만나 죽길 바라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고.
로드릭은 소년이 그 이유를 물어 속내를 모조리 뱉어내기 전에 얼른 그 이유도 덧붙였다.
“확실히 신대륙은 매력적인 곳이죠. 소문에 따르면 그곳의 야만인들은 금은보화가 가득한 창고를 가지고 몸에 금을 주렁주렁 걸고 다닌답니다. 이미 저 밑의 카스테냐는 그걸로 전비를 몽땅 충당한다더군요. 그걸 가져오는 배들을 약탈한다면 확실히 많은 걸 살 수 있겠죠.”
“그런가?”
로드릭은 빈민가 밖의 세상에 대해선 순진한 면이 조금이나마 남은 소년을 속여야 했다. 솔직히 말하라는 말이 나오지도 못하게 진실만을 말하는 것처럼 연기해야 했다. 마침 로드릭은 스승을 비롯한 선배 마법사들에게 농땡이 친 것을 들키지 않으려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던 짬이 있었다.
“그리고 바다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떠돌죠. 보물선이 난파당했다던가, 보물선을 약탈한 해적이 그걸 비밀스런 섬에 묻어놨다던가 하는 거요. 대부분은 헛소문이겠지만, 10분의 1만이라도 사실이라면, 바다는 그 자체로 커다란 보물창고나 다름없는 곳이지요.”
“흐흥. 재밌겠네.”
소년은 아이들이 관심가질 법한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척했다.
소년은 빈민가에 살면서 진실을 말하는 이보다 거짓을 말하는 이를 더 많이 보아 왔다. 빈민가는 빈궁하여 서로를 등쳐먹으려는 이들이 가득하다. 개중에는 거짓말을 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사기꾼들도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여러 인물들을 관찰해온 소년은 로드릭의 말이 진심으로 자신을 위한 말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별 말 하지 않았다. 바다에 관심이 많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넓고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 모르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광활한 물투성이인 곳. 어떨 땐 으르렁거리지만 어떨 땐 모든 걸 포용하듯 고요해 그 성질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곳.
짠내를 맡으며 바다를 지척에 두며 산 사람의 숙명이기라도 한 걸까. 좁은 곳을 강박적으로 선호하는 자신이 정반대로 사방이 트여 있는 곳에 관심을 갖다니. 소년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근데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지금은 어떻게 얘네들을 써먹을까가 더 중요하다고.”
소년은 로드릭의 뒤쪽에 가득한 살아있는 시체들을 가리키면서 공기 마법으로 고양이를 빙글빙글 돌렸다.
[햐아악!]
“확실히 그게 급하긴 하지요.”
로드릭이 맞장구쳤다.
그는 더 이상 돌아갈 길이 없었다. 죽었으나 죽지 않은, 말 그대로 언데드(Un-dead)가 되었다. 좋든 싫든 이 소년과 공동운명체가 된 것.
마법사 협회는 지금쯤 로드릭의 실종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어쩌면 더 일찍 눈치 챘을 지도 모른다.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는지 소년과 그가 빈민가를 은밀히 휩쓸고 다니고 있음에도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빈민가가 고요해졌단 걸 느끼고 더 신중해졌던가.
당장 린던을 떠나야 했지만 떠나자는 로드릭의 말에 소년은 오히려 여기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유를 물어도 소년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여기서 수색이 들어오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란 물음이 돌아왔을 뿐. 어린아이의 기준은 어른과 매우 달라 우선순위 또한 다르다는 것을 떠올리며 로드릭은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숨는 건 힘들었다.
로드릭이 가지고 왔던 마력검출장비가 소년의 천막 근처에서 결국 깨져버린 것에서 볼 수 있듯, 이 빈민가는 소년의 저주 남용으로 인해 소년의 권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소년의 마력으로 꽉 차 있었다.
소년의 마력은 이상하게도 사람은 전혀 느낄 수 없고 오로지 장치로만 감지할 수 있는 이상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저주 사건을 조사하다 마법사가 실종되었으니 협회는 필히 사악한 마법사의 소행을 염두에 둘 것이다. 그래서 숨은 마법사를 찾아내는 데에 필수적인 마력검출장비 역시 들고 올 것이라 무조건 들킬 것이다. 아니, 장비가 문제가 아니라 모조리 시체로 만들어버린 빈민들을 발견하는 게 먼저겠지.
도망갈 수도, 숨을 수도 없으니 남은 건 방어뿐.
로드릭의 발자취를 따라 빈민가로 들이닥칠 마법사 협회의 수색대를 막기 위해서는 ‘통계가 설립될 정도로 충분한 양의 표본실험’을 하느라 만들어진 시체들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
지이이이잉-
“......”
빈민가를 수색하러 온 수색대의 마법사들은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 마력검출장비가 이렇게 미친 듯한 반응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젊은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나이든 마법사들조차 이런 건 정말 처음 본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떨린 건...... 에크나르프에 있는 대마법사의 마법 시연 때 이렇게 격하게 떨린 걸 본 적 있었지.”
“그럼 여기에 대마법사가 있단 말입니까?”
딱!
젊은 견습 마법사의 뒤통수에서 잘 익은 호박 때리는 소리가 났다.
“멍청아, 마력검출장비는 사람을 감지하는 게 아니라 마력을 감지하는 거라고. 뭘 배운 거야?”
마법을 쓰고 난 흔적 혹은 마법에 포함된 마력을 감지하는 것이라, 설치된 마법적 함정이 많거나 전장에서 엄청나게 많은 마법을 써 사방에 마력이 굴러다닌다면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백년전쟁 때 파리 공방전 때도 이랬었을 거야. 그때는 이런 장치가 없었지만 기록만으로도 하늘을 덮을 정도의 마법이 날아다녔다 하니......”
“역사 공부는 그만하고. 마력이 이렇게나 진한 걸로 볼 때 여기가 놈의 본거지인건 분명한 거 같다. 정작 감각에 마력은 전혀 안 느껴지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갑자기 장치가 고장 날 리는 없으니 우리의 감각을 속이면서 장치에만 반응하는 신종 마법함정일지도 몰라. 이 정도의 마력반응이라면 빈민가를 함정으로 꽉꽉 채워 넣은 거나 다름없어.”
잘 만든 마법함정 하나가 보병대 하나를 곤죽으로 만들 수도 있다. 대규모 폭발마법이라도 심어 놨으면 저 안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다.
“우리 선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돌아가자.”
대규모의 마력함정이 설치되어 있단 얘기는 보고체계를 죽 타고 올라 마법사 협회의 최상층부와 왕실에까지 전달되었다.
곧, 제대로 된 조사단이 파견되어 마력의 근원지인 빈민가 조사에 다시 착수했다. 안에 마법함정이 있다고 의심되니 외곽에서 수치까지 나오는 전문 마력검출장비로 다시 정찰해 보았는데, 측정불가라는 단어가 당당히 뜰 정도로 그 농도가 너무 짙어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마력은 빨리 사라지니 마법함정이 분명하다. 이 수치가 정말 모두 마법함정이라면 어지간한 마법사는 들어가자마자 비명횡사할 거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조사단도 깊숙이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와야 했다.
마법사들은 소리 높여 외쳤다. 토벌해야 한다! 사악한 마법사가 린던 한복판에 자신만의 요새를 만들어두고 있단 얘기 아닌가!
협회의 입장에서는 협회에 등록되지 않은 불법 마법사가 린던 한복판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고, 왕실의 입장 역시 비슷했다.
이는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되었다. 안 그래도 귀족 의회와 왕실은 권력을 놓고 줄다리기하고 있는 신세다.
만일 왕실에 불만이 있는 귀족세력에게 이 정보가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즉각 마법사 협회와 왕실은 뭘 하고 있었느니, 무능하다니 하는 비난의 화살을 고슴도치가 되도록 맞아야 할 것이다. 정치적인 세력 약화는 당연히 따라오겠고.
따라서 이는 은밀하게 해결해야 했다.
“스코티시에 있는 대선배님을 모셔올까요?”
“그것까지는 아니야. 그랬다가는 귀족들의 눈에 걸려. 어떻게든 협회 내에서 처리해야 돼. 그래야 왕실에게도 우리의 존재감을 다시 각인하지.”
“눈에 띄지 않으려면 소수만 돌입시켜야 되겠는데요?”
여러 가지 내부 사정으로 인해, 결국 마법사 협회의 장로들과 실력 있는 왕실 마법사들이 소수 정예로 린던 빈민가의 사악한 마법사를 처리하러 가기로 잠정 합의되었다.
시선이 적은 밤에, 빈민가에 도사리는 범죄조직을 잡겠다는 명분으로, 린던 수비대가 빈민가를 포위한 상태에서, 마법사들이 들어가 마법 함정을 해제하며 놈을 척살한다! 하는 대략적인 작전이 수립되었다.
수비대를 배치하는 것은 도망칠 마법사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빈민가에서 마법사 간의 대결이 펼쳐지면 소란이 일어나며 정보가 새어나갈 것은 자명한 일. 때문에 빈민가에 주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하는 역할이었다.
귀족들에게 소문이 넘어가기 전에 빠르고 은밀하게 처리해야 하는 탓에 작전은 다소 서둘러 진행되었다. 그러는 바람에 빈민가에 늘 득실거리는 빈민들이 나다니는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정보는 스리슬쩍 간과해버리고 말았다. 마법사나 왕실의 입장에서는 빈민들이 무슨 짓을 하건 대세에 별 영향이 없으리라 생각한 탓이었다.
니아트리브 군의 상징인 붉은 외투를 입은 군대가 빈민가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
“흠흠. 맛좋은 냄새들......”
붉은 외투의 군대가 빈민가를 포위할 때, 그들이 잡고 싶어 하는 장본인은 빈민가에 없었다. 소년은 빈민가 북쪽 야산의 정상에서 빈민가의 가장자리를 따라 횃불로 만들어진 빛무리를 쓱 훑었다.
마법사 로드릭 이상의 짙은 마법사의 향기가 저 멀리에서부터 바람을 타고 코로 스며들었다. 이 거리에서까지 맡아지다니. 저들의 영혼도 훨씬 맛있겠지.
소년이 여길 떠나지 않겠다는 이유는 로드릭을 찾으러 올 마법사들의 영혼도 꿀꺽하겠단 욕심 때문이었다.
소년은 자신에게 맥없이 당한 로드릭 때문에 마법사란 존재를 만만하게 보았다. 소문만 무성했지 별거 아니네? 로드릭보다 좀 세 봤자 얼마나 세겠어?
전형적인 경험 부족한 아이의 오판이었다.
소년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새까만 눈동자 안에서, 소년이 사용하는 마법의 색과 비슷한 은은한 검푸른빛이 잔상을 남기며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런 소년의 눈에, 까마귀의 시야를 통해 막 진입한 이들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그들은 낯선 환경에 들어와 겁먹은 짐승처럼 종종걸음을 걸으며 팔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소년이 그들을 마법사라고 판단하는 건 단순히 멀리서 풍겨오는 마력의 향취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년의 눈에는 지금 보이는 마법사들에겐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형광색으로 번들거리며 보이고 있었다.
[헥헥]
소년은 발치에 엎드린 검둥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벌써부터 극상의 영혼을 맛보는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군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런 소년을 내려다보는 밤하늘의 별들이 이전과는 다르게 사납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