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71화
녹이 잔뜩 슬어버린 철문.
거칠게 발로 걷어차며 경기장에 입성했다.
쿠쾅!
이미 대기하고 있는 선수들.
어림잡아 100명 정도 될까?
그들은 서로 거리를 두고 아래위로 훑으며 간을 봤다.
“뭐야, 저건 누구야?”
“처음 보는 녀석인데, 관심종자인가?”
웅성거리는 구경꾼들.
놈들은 이곳에 돈을 걸고 경기를 관람하러 온 깡패 녀석들이다.
한눈에 봐도 불량한 몰골.
당연한 얘기지만….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칸 제국의 황제가 이런 음침한 곳에 얼굴이 팔렸을 리가.
“안녕하십니까! 신사 숙녀 여러분!”
어수선함도 잠시….
경기장을 압도하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잉그람 대륙 최대 규모의 대학살 쇼! 이곳에는 피와 전율뿐!”
“우와아앗!”
“시간 끌지 않겠습니다! 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시작해! 이 멍청아!”
“얼마나 기다렸다고!”
“와! 열기가 아주 뛰어난데요! 단두대 토너먼트! 그 첫 번째 살육! 북소리와 함께 시작됩니다!”
“와아아아!”
“와아! 시작이다!”
천하 노예 대전.
경기를 시작하는 진행자의 외침에, 경기장은 미친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죽여라! 죽여!”
“빨리 죽여라! 이 노예 새끼들아!”
광분하는 관중석.
둥둥둥!
이윽고 굉음의 북소리가 사방에 울렸고….
이는 천하 노예 대전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이야아아압!”
“죽어라!”
“여기서 살아서 나가는 건 오직 나다!”
광분하는 건 관중뿐만이 아니었다.
선수들도 돌변하여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콰직!
도끼로 머리를 찍고….
퍽퍽퍽!
주먹으로 얼굴을 두들겨 패고….
푸욱!
등 뒤에서 칼로 목을 베는 모습.
“으아아악!”
“아! 벌써 첫 번째 탈락자가 등장합니다! 시작부터 화끈하군요!”
“와아아! 죽여라! 죽여!”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나는 멀찍이 거리를 유지하고 놈들은 지켜봤다.
‘일단 어떻게 돌아가는 느낌인지 알아보자.’
푸슉! 푸슉!
“으아아아악!”
“죽어! 죽어! 죽어!”
사방에 피 냄새가 진동한다.
지끈거리는 머리.
“아아,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작두의 파계승! 여기서 탈락합니다!”
“우와아아!”
“커헉! 으아 억….”
“검은 개의 악명은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저기 쏟아버린 내장은 어떻게 주워 담을 수가 없겠지요, 안 그런가요?”
진행자가 소개한 작두의 파계승.
그리고 검은 개의 악명.
귀여운 별칭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저런 놈이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고?
내가 보기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데….
생각보다 수준이 낮다.
이런 시답잖은 싸움에 검을 사용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웬만한 놈들은 주먹으로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100명 정도로 시작한 예선전은 어느새 절반으로 줄었다.
‘16명이 남으려면 아직 좀 더 남았군.’
소킨즈의 말로는 최후의 16인이 남으면 예선전을 종료하고 16강전을 펼친다고 했다.
오케이.
조금만 더 추이를지켜보자.
픽픽 쓰러지는 놈들은 보니, 살살 도망 다니기만 해도 어렵지 않게 상위권에 갈 수 있겠다.
“제발!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옆에서 들리는 멱따는 소리.
고개를 돌렸다.
“크아아악!”
가면을 쓴 거구의 사내.
그는 사람 하나를 종이 접듯이 반으로 접어버렸다.
나도 모르게 그와 마주친 눈.
놈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죽여라! 죽여!”
“저놈은 왜 안 싸우고 구경만 하는 거냐!”
“너도 싸워라! 이 겁쟁이 같은 놈아!”
관중들은 나를 향해 아유 했다.
가면을 쓴 덩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뭘 봐?”
“훗.”
순간 씰룩거리는 입술.
저놈 분명히….
내 말을 듣고는 웃었다.
“웃어?”
“용감한 건지, 겁대가리를 상실한 건지 모르겠군.”
미친놈.
재밌는 녀석이다.
감히 내게 ‘겁대가리’라는 단어를 써?
“겁대가리를 상실한 건 네놈 같은데….”
“응?”
“덩치가 크면 뭐라도 된 것 같나? 내가 볼 때 넌 그냥 한심한 둔탱이다.”
“둔탱이? 이게 무슨 뜻이지?”
“아, 둔탱이가 무슨 말인지 모르나?”
말이 필요 없다.
나비처럼날아서….
팍!
벌처럼 놈의 안면을 걷어찼다.
“이런 가벼운움직임 하나 읽어내지 못하는 걸 둔탱이라고 하는 거다. 알겠냐?”
풀썩
맥없이 쓰러지는 사내.
놈의 얼굴은 발길질 한 방에 쌍코피가 터졌다.
“우와아아!”
“뭐야? 저놈 꽤 세잖아?”
“그래! 고상한 귀족 나으리! 너도 열심히 싸우고 피를 흘려보라고! 잘하네!”
“우리를 흥분시키는 게 너희의 의무이자 삶의 목적이다! 이 노예 새끼들아! 아하하”
“디아로스! 너도 이제 좀 움직여봐라!”
“디아로스는 어디있지?”
“저기다! 저기!”
“와아! 디아로스가 움직인다!”
관중석이 들썩인다.
디아로스라고 불린 사나이.
놈은 이곳에서 꽤나 유명한 듯 거들먹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아아, 사실 가장 우승에 근접한 사나이는 따로 있죠! 지난 대회에서 부상만 아니었다면 우승이 거의 확실시 되던 선수였는데 말이죠!”
“실력을 보여라! 디아로스!”
“오! 뭐죠? 그가 갑자기 무명의 참가자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디아로스도 앞선 덩치와 비슷하게 우락부락하게 생겼다.
“이런 곳은 처음이지? 귀족 양반.”
자신감의 찬 목소리.
나는 피식 웃음을 참지 못했다.
“긴장하지 말라고. 금방 끝내줄 테니까.”
“네가? 나를?”
“생긴 걸 보니 어차피 본선으로 올라가더라도 금방 탈락하게 생겼군.”
“혹시 눈이 썩었나?”
“워워. 허세를 부리지 않아도 돼. 내가 편히 보내줄 테니 안심하라고.”
여긴 아주 미친놈들만 모아놓은 것 같다.
내가 누군 줄 알고 하나 같이 이렇게 건방을 떠는 걸까.
디아로스는 잠시 서성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죽어라!!!”
우렁찬 기합에 비해 놈의 공격은 단조롭고 무모하다.
느린 움직임에 급소가 훤하게 드러났다.
“악감정은 없다만…. 네가 먼저 시작한 거니 원망하지마라.”
가볍게 턱을 가격.
팍!
“크허헉!”
그리고 이어지는 콤보.
왼손으로 놈의 관자놀이를….
오른손으로 놈의 턱을 번갈아 가며 후려쳤다.
놈의 눈깔은 순간 흰자를 보이더니, 입에서 게거품이 보골보골 올라왔다.
기세 좋게 달려든 디아로스.
놈은 내게 달려 달려든 자세 그대로 기절해서 엎어졌다.
“아아! 디아로스의 체중 압박 공격인가요? 이건 처음 보는기술인데요!”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진행자.
자세히 봐라.
놈은 정신이 나가버렸다고….
“파운딩에 성공했으면 주먹을 날려야죠! 디아로스! 뭐하나요!”
기절한 당연히 디아로스는 묵묵부답.
두개골이 위치를 이탈해서 아마 오랜 시간 일어나지 못할 거다.
“뭔가 이상합니다! 디아로스의 움직임이 없어요!”
“뭐냐! 디아로스!”
“빨리 일어나라고!”
“너한테 걸린 돈이 얼마인줄은 알고 그러는거냐! 머저리 자식!”
장난은 여기까지.
나는 디아로스를 밀쳐내고 일어섰다.
“아! 이게 뭐죠?”
“뭐야? 뭔데!”
“일어선 사람은 다름 아닌…. 아 이름이 뭐죠? 아직 제게 명단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어?”
“하지만! 일어선 사람이 디아로스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
“설마!”
“디아로스가 땅에 엎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이, 이게 말이 되는 거야?! 디아로스가 겨우 예선전에서 바로 탈락이라니!”
“에라이! 내 돈 어찌할 거야! 디아로스! 이 머저리 자식아!”
“광탈이라니! 광탈이라니!”
디아로스에 돈을 건 모질이가 꽤나 많은 모양이다.
뜻밖의 결과의 울부짖는 소리가 시끄럽다.
“디아로스가 탈락합니다!!!”
“에이씨! 뭐 저딴 녀석한테 지고 난리야!”
“이번 대회는 이변이 무척이나 많이 일어나네요!”
“난모르겠고! 계속 싸워라! 죽여! 죽여!”
“난 디아로스한테 돈 안걸었다! 멍청이들!”
“나만 아니면 돼! 아하하!”
“백전불패의 사나이! 디아로스의 전설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여전히 개거품을 물고있는 디아로스.
아주 그냥 맛탱이가 갔다.
“아아, 어떤 속임수를 쓴 건진 모르겠지만 저 선수, 저 선… 이름이 뭐라고? 빨리 알아봐!”
“저 놈은 누구냐! 진행자!”
“어디서 굴러온 놈이야?”
“아…. 아직 명단이 없어서요! 조금만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이름 모를 귀족 선수! 운이 따라준 것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디아로스를 꺾어냅니다!”
저 진행자라는 놈도 혹시 눈이 썩은 건가?
완벽하게 디아로스를 작살냈는데, 나한테 무슨 운이 따라줘?
참 내.
뭐, 사실 뭐라고지껄이든지 상관은 없다.
어차피 내 목적은 정해져 있으니까.
일단 16강에 들고….
속전속결로 우승까지 차지한다.
그럼 얀센을 만날 수 있겠지.
“남은 인원은 25명입니다! 100명에서 벌써 이만큼 줄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죄다 시체투성이다.
작두의 파계승.
검은 개의 악명.
가면 쓴 거구의 사내.
백전불패의 사나이, 디아로스를 포함한….
이름 모를 수많은 남자들의 시체.
꽤나 많은 검투사가 있었는데….
이제는 개개인의 얼굴이 보일 만큼 숫자가 줄었다.
‘흠….’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면 실력자라는 이야기인가?
사실 크게 기대는 안 된다.
우승후보라던 디아로스라는 놈의 실력은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기 때문.
기왕 격투 대전에 참여했으니, 날 재밌게 만들어줄 참가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으응?”
뭔가 낯이 익은 참가자 한 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왠지 친숙한 느낌이다.
구릿빛으로 태닝된 피부.
근엄하게 기른 콧수염.
그리고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끄는 건 그가 들고 있는 방패다.
저렇게 생긴 방패는 흔하지 않다.
소설 속 묘사에 따르면 저걸 들고 다니는 사람이 바로….
내가 아는 그 사람이다.
“서…. 설마?”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누추한 곳에서!
대 방패 라이트를 만나게 될 줄이야!
“아아, 이번이 첫 출전이지만 대단한 실력을 보여주는 성전사! 이곳에서 그의 갑주와 방패를 뚫을자가 과연 있을까요?”
분명하다.
저 사람은 벤하트의 동료 중 한 명.
산악 방벽의 거상이라 불리는 하드 탱커 성전사.
속칭 대 방패 라이트다.
무슨 연고로 이런 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여기 있다는 것은 설마 벤하트도 여기 있을 수도 있다는 뜻?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에 하나 라이트와 싸워야 한다면….
혹시 벤하트가 참가해서 나와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혹시 또 아는 얼굴이 있을까 경기장을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아.’
다행히 벤하트는 없고….
라이트만 여기 참가한 듯하다.
나머지 동료들은 어딨지?
“엄청납니다, 엄청나요! 라이트선수! 아무런 공격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수 십 명이 나가떨어졌습니다!”
라이트 같은 조연이 납치되어 노예로 여기 참가했을 리는 없고…
역시 나처럼 노예로 위장하여 참여한 건가?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반갑다!’
드디어 내가 좋아하는 등장인물들이 나오다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단연코 벤하트였지만, 그를 보좌하는 라이트도 주인공 못지않게 좋아했다.
그의 이름답게 벤하트의 든든한 오른팔이었던 라이트.
매사 신중한 성격과 헌신적인 희생으로 꽤나 많은 인기를 누리던 조연이 바로 라이트였다.
오, 제발 신이시여.
라이트와는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예선전이야 싸움을 피할 수 있지만….
본선에서 만나게 된다면 전 정말로 난감해집니다!
카이드로젠이 공격에 특화된 인물이라고 하면, 라이트는 방어에 특화된 인물.
그리고 무엇보다….
라이트는 파편의 힘을 통해 마력을 수준급으로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상성 상 카이드로젠이 불리하다.
그래도 질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지만….
여러모로 불편한 대결이 될 것이 뻔하다.
쉐에엑!
그때였다.
쿠쾅!
날카로운 파열음이 고막을 때리며 누군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