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70화
“일가족을 몰살시켰다고? 얀센이?”
“그래….”
소킨즈는 마법사를 핍박하는 카이드로젠을 피해 칸 제국 바깥으로 도망쳤다.
덕분에 가족들의 목숨을 짧게나마 부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엔 얀센의 손에 결국 가족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음….’
카이드로젠의 손에 죽지 않아서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차피 네 놈은 나한테 빚이 있지 않냐? 네 놈때문에 여기로 도망쳤다가 변을 당했는데….”
“그렇지.”
“그럼 좀 시원시원하게 내 부탁을 들어주면 안 되겠냐?”
“뭐, 그건 어렵지 않은데….”
“그런데?”
“왜 자꾸 반말이지?”
“네가 내 상관도 아닌데 인제와서 존대해야 하냐?”
소킨즈는 무슨 그런 어이없는 질문이 있냐는 듯 되물었다.
“그렇긴 하네.”
“내가 얀센을 죽이는 걸 도와준다면…. 자연스레 너도 얀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갤러헤드 무역섬을 지배하는 대 해적.
얀센 예거.
그를 죽이고 싶은 칸 제국 출신의 마법사.
소킨즈 딜런.
‘나는 그냥 슬쩍 거래만 망쳐놓고 싶었는데….’
얀센을 아예 제거하기에는 미리 세워둔 계획도 없었고 그로 인한 리스크도 너무 크다.
“부담스러운 건 알지만…. 제발!”
소킨즈는 아예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엎드렸다.
파리처럼 비비는 손이 애처로워 보일 정도로 그는 싹싹 빌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무리야…. 적당히 둘러대며 거절해야….’
“좋다.”
“으응?”
“좋다고.”
“정말인가?”
“너의 부탁을 승낙한다. 얀센을 죽이는 걸 도와주지.”
으응? 뭐야?
흔쾌히 소킨즈의 부탁을 들어주는 카이드로젠.
“오오! 정말 고마워!”
“이제는 나한테 존대하는 게 어떤가?”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태양이 폐하를 비추기를!”
소킨즈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소리 질렀다.
그런데….
‘카이드로젠이 왜 이런 위험한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 거지?’
평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승낙한 건가?
아니면 마법사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아직 남아있어서?
‘거참, 예상이 안 된단 말이야.’
뭐가 됐든 카이드로젠이 그를 돕고 싶다는데 별달리 토를 달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그는 나와 함께하는 운명 공동체이기도 하고….
‘얀센을 이번 기회에 제거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소킨즈. 그런데 넌 얀센을 만난 적이 있나?”
“실제론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수로 그에게 접근할 생각이지?”
그는 왠지 모르게 음흉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폐하.”
**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투기장.
사람이 바글바글하게 모인 이곳은 별다른 경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열기를 띠었다.
“근데 왜 나를 밧줄로 묶은 거지?”
소킨즈는 나를 단단히 포박하여 이곳으로 데려왔다.
이까짓 밧줄쯤이야 얼마든지 끊어버릴 수 있었지만, 나는 잠자코 소킨즈가 계획을 말해줄 때까지 기다렸다.
“이곳이 뭐 하는 곳인지 아십니까?”
“투기장 아니냐? 그것 말곤 모르겠는데.”
“보통 투기장이 아닙니다, 폐하. 여긴 얀센의 악취미로 인해 생긴 투기장입니다.”
“악취미?”
“예. 얀센은 강한 인간을 모아서 그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돈을 건 도박 싸움. 이것으로 그는 지금도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죠.”
“여기가 도박하는 곳이란 말이군.”
투기장 내부에는 험상궂게 생긴 해적들이 돈을 현찰로 들고 다녔다.
한눈에 보기에도 참…. 해적들에게 어울리는 취미 생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대회는 속칭 천하 노예 대전이라고 불립니다.”
“이름 한번 거창하군.”
“정말 말 그대로 천하의 노예들이 모두 출전하는 대회입니다. 지난번엔 페르마 왕국의 황태자도 이곳에 납치되어 노예로 출전하기도 했었죠. 아마 알게 모르게 다른 나라의 왕자나 사신들도 이곳에 잡혀 왔을 겁니다. 악명높은 용병들도 마찬가지고요.”
사막의 제국, 페르마 왕국이라면 저 멀리 떨어진 곳인데?
해적 놈들…. 납치력 한번 대단하군.
“아무튼, 그건 알겠고. 얀센을 무슨 방법으로 만날 생각인가?”
“조금만 더 들어보십시오.”
소킨즈는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얀센은 천하 노예 대전에서 승리한 우승자를 길로틴 해적단의 간부로 영입하겠다는 공고를 냈습니다. 그것 때문에 여기로 잡혀 온 노예들은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기를 쓰고 상대를 이기려고 하는 것이죠.”
“간부가 되면 노예에서 벗어날 순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명의 우승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참 이상하군.
대회가 열리는데 우승자가 나오지 않는 다라?
“경기를 치르다 보면, 참가자들 대부분 부상이 너무 심해서 더이상 출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음….”
“그는 다친 인원을 우승자로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양아치 자식.”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부상을 관리하기도 쉽지 않았지요. 이곳에 잡혀 온 이상 그들의 신분은 노예고…. 여긴 그 흔한 의사도 한 명 없는 곳이니까요.”
“해적들 사이에서 선진화된 의료체계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겠지.”
“그래서 말입니다. 폐하….”
소킨즈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 설마?”
“폐하께서는 강하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너 설마 나보고?”
“폐하라면 분명히 놈들을 어렵지 않게 제압하고 우승하실 수 있을겁니다! 그동안 참가자들의 수준은 제가 봐서 잘 알고 있으니까요!”
소킨즈는 다시 애원하듯이 말했다.
“그래도 좀….”
“얀센은 그 어디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제가그를 몇 년 동안이나 추적해봤지만,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나?”
“이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가 등장할만한 요소는 단 하나, 천하 노예 대전에서 우승한 자를 간부로 영입할 때뿐이니까요.”
“근데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난 황제인데…. 노예는 좀 아니지 않냐?”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폐하.”
소킨즈는 고개를 조아렸다.
하긴, 소설 속에서도 얀센은 자신의 목을 노리는 현상금 사냥꾼 때문에,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묘사가 있었다.
‘천하 노예 대전이라….’
어감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한마디로 하면 단순한 격투 대회였다.
체급이나 무기에 제한이 없는…. 그리고 살아남는 자가 가장 강한 자가 되는 단순한 시스템.
‘질 자신이 없긴 해.’
누가 감히 카이드로젠의 아성을 넘보겠는가?
류지상의 지식과 융합된 카이드로젠은 현재 세계관 최강자에 다가갈 수 있는 유력한 인물!
소킨즈의 얘기로는 간혹 주의할만한 인물이 등장한다고 했지만, 카이드로젠에 위협이 될만한 인물이라면 애당초 이곳에 잡혀 오지도 않을 확률이 높다.
더구나 얀센을 만날 방법이 지극히 제한적인 지금, 소킨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이유는 없어 보인다.
“출전하지. 그 천하 노예 대회.”
**
“빨리빨리 가! 이 자식아!”
“으억?”
참가신청서를 내기 위해 도착한 구석진 사무실 같은 공간.
소킨즈는 나를 정말로 노예 다루듯이 발로 밀었다.
“뭐해? 이 노예 자식아! 빨리 앞으로 가라고!”
“저기 좀 봐. 소킨즈 녀석. 괜찮은 노예 하나 골라왔나 본데?”
“어느 나라의 왕자인지 때깔 한번 곱군.”
소킨즈의얘기로는, 돈이 오가는 도박 격투 대회의 특성상 참가자의 신분이 노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이 내용을 내게 미리 귀띔을 해주긴 했다만….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정말 노예를 부리듯이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소킨즈.
나는 그를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뭘 꼬나봐? 이 건방진 새끼야!”
아무래도 그는 이 연기에 심취한듯했다.
혼이 담긴 소킨즈의 노예 취급 연기 덕분에 어렵지 않게 대회 담당자의 눈을 속였다.
“어이! 소킨즈! 아무리 노예라도 살살 대해주라고! 큭큭!”
“무슨 소리! 노예는 노예일 뿐이지!”
“그래. 알았어. 이름이 뭐라고?”
소킨즈는 내게 이름을 말하라는 듯 쳐다봤다.
‘이름을 뭐로 할지는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뭐로 한담….
“카이. 내 이름은 카이다.”
“노예 녀석이 이름 한번 특이하군.”
카이드로젠이란 이름을 쓰면 너무 민망하니까, 대충 카이라고 둘러댔다.
“자! 다음!”
순조롭게 대회 참가 신청이 끝났고….
걸리적거리는 포승줄은 절그럭거리며 터벅터벅 걸었다.
나는 소킨즈를 쏘아보며 이빨을 으드득 갈았다.
**
“소킨즈.”
“예, 폐하.”
“폐하? 난 자네가 나를 노예로 아는 줄 알았는데?”
“아…. 아닙니다. 그건 단지 연기였지요.”
“연기라….”
“예. 연기입니다. 폐하. 믿어주십시오.”
소킨즈의 메소드 연기….
이 자식은 나를 진짜 노예 취급했다.
‘뭐 어쨌든 잘 넘어갔으니 된 건가?’
“‘노예 전달’은 여기까지입니다. 폐하, 이 복도를 쭉 따라가시면 선수 대기실이라 부르고 그냥 공터인 공간이 나올 겁니다.”
“공터?”
“예, 일종의 대기실이지요, 시합이 곧 있을 예정이니 기다리는 시간이 길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 폐하의 포승줄을 풀어줄 사람이 있을 겁니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종잇조각처럼 약하고 허접스러운 쇠사슬을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며 이성을 제어했다.
‘애써 위장을 했으니 조금만 더 참아내자. 이 개 같은 수모를!’
“관중석에서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몸 성히 다녀오시기를.”
소킨즈는 총총걸음으로 물러갔다.
통로에 들어서자 나를 반기는 긴 암흑.
이 황량하고 싸늘한 통로의 벽에는 부서진 손톱과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통로 한번 꺼림칙하게 만들었군.’
얼마나 많은 노예가 지나간 자리인지….
찐득하게 굳어버린 피가 발바닥에서 쩍쩍거렸다.
‘자, 이제 시작해볼까.’
저 멀리서 엄청난 환호성과 함께 선수를 소개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렁찬 놈의 목소리.
관중들을 달구고 있는 소리다.
“백전무패의 사나이! 백전불사의 사나이! 가면을 쓴 악마, 경기장의 지배자! 길로틴 해적단의 관심을 한 몸에받는 무자비한 전사! 자, 소개합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우와아악!! 오와아앗!!”
“디아로스!!”
엄청난 환호성이었다.
천하 노예 대전이라더니, 분위기는 무슨 술집 지하에 딸린 투기장 같다.
”어이! 넌 뭐야!“
”으음?“
통로의 끝에 이르자 험상궂은 덩치가 나를 불러세웠다.
그의 어깨에는 길로틴 해적단의 상징 서슬 퍼런 단두대와 굴러떨어진 머리가 그려진 문신이 박혀있었다.
”이런 망할 노예 새끼, 그 통로에서 뭉그적거리면 살 수 있을거라 생각했나? 손이나 내밀어라, 그 사슬을 풀어….“
우적, 우지직!
나는 단숨에 포승줄 행세를 하던 쇠사슬을 빠개어 찢어버리고 성큼성큼 경기장으로 걸어나갔다.
더이상 시답잖은 노예 연기에 장단 맞출 생각은 없다.
머릿속에 맴도는 의식은 단 하나.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적을 물리친다.
“저…. 이 노예 새끼! 네…. 네 놈….”
“뭐라고?”
“그…. 이름이 무엇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카이. 내 이름은 카이다.”
“아, 알겠습니다.”
생긴 건 험악하게 생겼는데 말투는 다소 곱다.
놈은 종이에 무언가를 휘적거리더니, 나에게 경기장 입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입장하시면 됩니다.”
나는 손가락과 목의 근육을 시원하게 풀며 뚜벅뚜벅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꾸드득, 빠득.
발걸음이 가볍다.
왠지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카이드로젠의 가슴은 결투에 대한 설렘으로 고동쳤다.
‘얀센. 네 놈의 놀이터에 기꺼이 어울려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