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69화
파레호 고속정은 보기보다 괜찮은 성능을 자랑했다.
바람을 타자 쏜살같이 바다를 질주하는 배.
다행히 향해 중에 위험한 해적선은 만나지 않았고 순조롭게 갤러헤드 무역섬의 해안가로 도착했다.
“잘 다녀오시게나.”
“고생하셨습니다.”
“몸조심하게. 자네가 아무리 강해도 항상 조심해야 해. 여긴 그만큼 위험한 곳이니.”
“하하. 알겠습니다.”
“무사히 재회할 수 있길 빌겠네.”
파레호는 다시 칸 제국으로 복귀할 준비를 했고 나는 폴짝 해변으로 뛰어내렸다.
“제가 만약 약속한 날짜에 이곳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미련 없이 칸 제국으로 복귀하십시오.”
“으응?”
“뭔가 예상 밖의 일이 생겼다는 뜻이니 제가 알아서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괜히 파레호 공까지 위험에 휩쓸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에헤이! 이 양반! 괜히 부정 타는 말은 하지 마시게나. 우린 반드시 그날 함께 칸 제국으로 복귀할 것이야!”
“하하. 알겠습니다.”
“그려. 건투를 비네!”
그는 닻을 올려 미끄러지듯 다시 바다로 나아갔다.
나는 파레호 고속정이 지평선을 넘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까지 확인한 후 섬 안쪽으로 움직였다.
‘자…. 이제 이곳의 우두머리부터 찾아볼까?’
현재 갤러헤드 무역섬을 지배하는 해적은 ‘길로틴 해적단’을 이끄는 얀센 예거였다.
갤러헤드 역사상 최악의 해적.
그는 이곳을 본거지로 삼은 이후로 조금씩 세력을 확장해나가더니 결국엔 이곳에 상주하는 해적을 모두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자신에게 대항한 해적은 모조리 단두대로 올려 공개 처형해버림으로써 악명을 높였다.
섬을 아예 장악해버린 그는 갤러헤드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모두 빼앗아 독자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해적들의 주요 본거지였던 갤러헤드는 잉대연의 세계관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기술의 집합체로 나온 것이 바로 최근에 개발 중인 팔레토 케논.
그는 이 무기를 비밀리에 잉그람 대륙에 홍보했고, 결국 페이튼에게 막대한 자본을 투자받는 데 성공해서 현재 개발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훗날 파멸의 3대 무기 중 하나로 불리는 팔레토 케논이 적국에 넘어가면 칸 제국 입장에서 상당히 골치가 아파질 게 분명했다.
내 목표는 팔레토 케논 거래 가로채기.
속칭 하이재킹이다.
‘얀센을 만나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데….’
소설 속의 벤하트는 얀센에게 정식으로 초대를 받아서 일사천리로 그를 만날 수 있었지만, 나는 주인공처럼 얀센과 엮일만한 그 어떤 껀덕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껀덕지는 내가 직접 만들어야 하는 상황.’
나는 도심의 어느 술집을 발견하곤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건물은 난파한 선박의 폐목재로 지어졌는지 군데군데 선박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녹이 다 슬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가게 간판.
[바다뱀 창자 주점]
‘내가 파상풍 주사를 맞았던가?’
나는 시답잖은 고민을하며 술집으로 입장했다.
한가로이 술을 들이켜고 있는 사람들.
얼핏 보기에 갤러헤드는 여타 다른 도시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이미지로 착각하기 쉬웠다.
무법지인 갤러헤드에서 얀센이 최초로 질서를 세운 덕분에 이곳은 근래 보기 드문 평화로운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 봐야해적들의 기준에서 평화롭다는 뜻이지만.’
잉그람 대륙에서 벌어진 ‘국가 쟁탈전’의 시기처럼 하루가 멀다고 전쟁을 일으키는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이곳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자주 일어났다.
뿌리가 해적이었던 탓에 일반 주민들 또한 해적처럼 괴팍하고 위험했기 때문이다.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오롯이 통하고 있는 갤러헤드 무역섬.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아무리 카이드로젠이라고 하더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뭐 드릴까요?”
“혹시 현상금 사냥꾼. 소킨즈라고 아나?”
내가 찾고 있는 이의 이름은 바로 소킨즈.
바텐더는 나를 이상한 사람을 보듯이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사람을 찾으러 오셨나요?”
“사람도 찾을 겸, 술도 마실 겸해서 겸사겸사 왔지.”
“소킨즈라고요?”
“그래.”
“그런 핫바리의 이름까지 알고 있진 않습니다만….”
“그가 핫바리까진 아닐 텐데….”
“됐고요. 주문부터 하시죠, 손님.”
그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툭툭 내뱉었다.
“제일 비싼 거로 한 잔.”
“제일 비싼 거라면 500골드도 넘는데요?”
“껌값이군. 잔말 말고 가져오게.”
“오오! 알겠습니다. 소킨즈라는 사람의 이름은 제 동료에게도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혹시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는 제일 비싼 술을 달라는 내 말을 듣더니 우디르급 태세전환을 보이며 순식간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잠시 후 그가 내온 정체불명의 술을 한 잔 들이켜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소킨즈가 자주 찾는 술집이 어디지…. 여기가 아닌가?’
소설 속 소킨즈는 주당이라는 묘사만 있었을 뿐….
갤러헤드의 어디에서 술을 먹고 있을지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딱히 다른 방법도 없으니 차분하게 둘러보자.’
내가 얀센을 만나기 위해 소킨즈를 찾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출신은 바로 칸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사라서 나한테 좋은 기억이 있을 리는 없지만….’
어쨌든 나와 같은 동향 사람!
거기다 그는 이곳에서 얀센의 목을 따려는 수많은 현상금 사냥꾼 중에 한명이었다.
얀센이 아무리 평화롭게 질서를 다져놓았다고는 해도 시민들의 뿌리는 모두 해적.
그들 사이에 얀센의 목을 노리는 현상금 사냥꾼이 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히 기정사실로 된 내용이었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칸 제국 출신인 현상금 사냥꾼.’
소킨즈를 만날 수만 있다면 분명 지연을 이용해서 공감대를 형성한 다음, 나와 힘을 합쳐 얀센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음…. 일단 화장실 좀.’
나는 술이 만들어낸 이뇨 감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툭
“뭐야? 네 놈은?”
감히 카이드로젠에 어깨빵을 치고 적반하장으로 눈을 부라리는 사내 한 명.
그는 나를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위협적인 제스쳐를 취했다.
“사람을 쳤으면 사과를 해야 할 것아…? 으응?”
그는 나를 보더니 눈빛이 변했다.
“왜 그러지?”
“네…. 네 놈은?”
나를 아나?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을 치는 정체불명의 사내.
쾅
이어서 난데없이 들리는 폭발음과 함께 놈은 도망치듯 이 자리를 피했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갑자기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난 직감적으로 그를 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멀리 도망가지는 못한 그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부리나케 달려갔다.
“넌 누구지?”
“흐이이익!”
어렵지 않게 놈을 가로질러 척하고 앞에 나타났다.
그랬더니 놀라서 뒤로 자빠지는 녀석.
“이런 지독한 폭군 자식! 여기까지 날 추격한 거냐!”
놈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지만….
나는 곧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폭군인 것을 알고 있고….’
그 폭군이 자신을 추격해 왔다고 생각할만한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었다.
“네 놈이 바로 소킨즈로군.”
“본인이 직접 여기까지 행차하실 정도면 칸 제국에 남은 마법사들은 아주 쑥대밭이 됐겠구나!”
“미안하지만 그 반대다.”
“쑥대밭을 넘어 아예 생지옥을 만들었다는 소리냐!”
“응? 그런 뜻이 아닌데….”
“이 악마 같은 놈!”
아무래도 여기 갤러헤드 무역섬까지는 칸 제국의 최신 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는 듯했다.
“오히려 잘됐다! 네 놈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곳에서 실력을 기르고 있었는데 마침 때맞춰 등장해주셨군! 예전의 약해빠진 소킨즈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카이드로젠 이 썩을 놈아! 나는 네 놈을….”
팍
당수로 그의 목을 가격해 단숨에 기절시켰다.
힘없이 쓰러지는 소킨즈.
나는 그를 들쳐메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일단 조용한 데서 얘기 좀 하자.’
**
“으아아아아악!”
기절했던 소킨즈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그는 발작하듯이 일어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나와 눈이 딱하고 마주쳤다.
“이제 정신이 좀 드나?”
“이…. 이 망할 자식!”
자신의 몸이 포박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를 경계했다.
“이제 어쩔 셈이지?”
“으응? 난 자네에게 아무 짓도 안 할 생각이네.”
“그런 놈이 날 기절시켜서 여기로 데리고 와?”
“그건…. 자네가 너무 따박따박 말이 많아서 그런 거니까 양해 좀 해줬으면 좋겠군.”
“미친 자식. 예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소킨즈는 과거의 치욕이 떠오르는지 몹시 씩씩거렸다.
“결론부터 말해주지. 지금의 칸 제국은 예전과 비교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게 무슨 뜻이냐?”
“일단 자네가 알 법한 마법사의 이름을 한 번 불러볼까…. 에린 킨드라라고 알고 있나? 그녀는 나의 든든한 오른팔이다.”
“어린애도 안 속을 그럴 거짓말을 도대체 왜 하는 거지?”
“알렉스와 멀릭. 그들도 나를 보필하는 칸 제국의 소중한 인재들이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가늠해보려는 듯 눈알을 굴렸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게. 나는 더이상 마법사를 핍박하지 않고 있고…. 동시에 그대들에게 항상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네.”
에린을 포함한 알렉스와 멀릭.
그리고 칸 제국의 마법사 모두에게 했던 것처럼 나는 소킨즈에 진심 어린 어조로 용서를 구했다.
“그대도 이런 외딴섬에서 현상금 사냥꾼이니 뭐니 하는 건 그만두고 칸 제국으로 돌아오게. 황제의 이름을 걸고 극진히 대접해줄 터이니.”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음…. 이런 과격한 표현은 쓰고 싶지 않지만….”
“응?”
“내가 사죄하는 게 진심이 아니라면, 자네를 이렇게 오래 살려둘 이유도 없지 않은가?”
카이드로젠다운 오만한 표현이었지만, 사실 그게 정답이기도 했다.
소킨즈 딜런.
그는 카이드로젠의 악명과 함께 그가 가진 무력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은 기절에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굳이 누군가 일깨워주지 않더라도 인지할 수 있을 만큼 격의 차이는 확연했다.
“그럼…. 지금 내게 원하는 건 뭐지?”
아직 모든 경계심을 풀지 않은 소킨즈의 물음.
나는 그가 진정할 수 있게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얘기했다.
“얀센 예거. 내가 그놈을 좀 만나봐야 하는데….”
“갤러헤드 무역섬을 통째로 먹은 얀센을 만나겠다고? 이유는?”
“그는 에즈만토스 왕국과 무기를 거래하고 있다. 그중에 하나는 우리 칸 제국에 위협이 될 만큼 위험한 무기지.”
“그렇다면….”
“거래를 뺐든가, 아니면 그 무기를 못 쓰게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든가.”
최상의 시나리오는 팔레토 케논을 칸 제국으로 가져오는 것이지만, 최소한 에즈만토스 왕국에 넘어가지 않게끔만 해줘도 충분했다.
“나는 얀센의 목을 벨 거야.”
“그래? 자네가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 난 그 무기만 처리하면 돼.”
그는 골똘히 뭔가를 고민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생각의 정리가 끝났는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말 내게 지난날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거라면….”
소킨즈는 갑자기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쳐다봤다.
“날 좀 도와줄 수 있겠나?”
“으응? 원하는 게 뭐지?”
“나는…. 얀센의 숨통을 끊고 싶어. 하지만 나 혼자서는 힘이 부족하다.”
그 말인즉슨.
“당신이 나를 위해 얀센을 죽여줬으면 해.”
그는 오히려 나보다도 얀센에 대한 복수심이 더 커 보였다.
나는 의문이 생겼다.
아무리 얀센이 해적이라고는 한들, 그것만으로 마법사 가문 전체를 핍박한 카이드로젠보다 더 증오할 수 있을까?
“얀센 그놈은….”
잠시 후.
나는 소킨즈의 말에 듣고 어렵지 않게 그 해답을 알게 되었다.
“우리 가족 모두를 단두대로 올려보낸 살인범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