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68화
갤러헤드 무역섬에 관한 안건까지 토의하고 나서야 마침내 회의가 끝났다.
다들 회의실을 나가 휴식을 취하려 했지만, 폰 재상만은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지 끝까지 자리에 남아있었다.
“폐하.”
“무슨 일이지?”
폰 재상은 웬 여자 한 명과 함께 내 곁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제 딸, 루나랑 인사하시지요. 요즘통 못 뵌 것 같습니다만….”
나는 황제의 기억을 되짚어 그녀에 관한 것을 떠올렸다.
[루나 그라츠. 아버지와 폰이 나더러 저 여자랑 결혼하라고 밀어준 적이 있음.]
[난 싫음. 저 여자 어딘가 재수 없음.]
[외모도 내 취향이 아님.]
재상 옆에 서 있는 여인의 외모가 크게 모난 것은 아니었으나….
카이드로젠은 저 루나라는 인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 또한 마찬가지.’
재상의 딸과 정략결혼이라니….
나도 썩 내키지 않는다.
“루나야. 폐하께 인사드려야지. 오랜만에 만나서 어색하냐?”
루나는 쭈뼛거리며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태양이 폐하를 비추기를.”
“그래. 반갑다.”
그녀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재상을 쳐다봤다.
내가 생각한 그 의도로 접근한 게 맞느냐는 시선이었다.
“폐하. 요즘같이 혼란스러운 시국에 옥체라도 상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재상이 날 걱정해주면 어딘가 불안하단 말이야.”
“하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하십니까? 저는 언제나 폐하를 보필할 뿐이옵니다!”
재상은 별로 웃기지도 않는 얘기에 호탕하게 웃어댔다.
“용건이 뭐지?”
“하하. 용건이랄 것까진 아닙니다만, 폐하께서도 이제 혼기가 차셨으니 황후를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후?”
“이전에 선대 황제와 약속한 것이 있기도 하고…. 저희 루나가 또 폐하와 가깝게 지낸 소꿉친구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재상은 잠시 뜸을 들였다.
“제 딸, 루나를 정식으로 황후로 맞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재상과 루나는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역시….
재상은 내가 예상한 그 의도가 맞았다.
‘음….’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영 수준이 떨어지는 재상의 행동에 실망감이 컸다.
‘과거의 영광에 취해 사는 술주정뱅이.’
사사건건 황제의 뜻에 토를 다는 불평쟁이.
휴전 협상에서 별달리 소득도 내지 못한 무능함.
‘게다가….’
에린을 필두로 한 알렉스나 멀릭 같은 마법사 무리 때문에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을 것 같으니, 자기 딸을 내세워 황제와 정략결혼을 추진시키려는 저 교활함.
‘거물급 인사라 같이 좀 지내보려 했는데 이건 뭐….’
써먹을 데가 없잖아?
그는 전형적인 권력에 취한 탐관오리나 다름없었다.
과거 ‘국가 쟁탈전’의 시기를 겪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울 만큼, 무능한 동시에 욕심이 많았다.
나는 재상에게 차갑게 반응하며 자리를 떴다.
“황후는 내가 알아서 찾을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부담스러우니 다음부터 이런 자리는 만들지 않았으면 하네.”
“폐…. 폐하!”
“왜 그러지?”
재상은 애원하는 눈빛으로 나를 잡았다.
“부담스러우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단지 폐하의 앞길에 후계자 양성이라는 사안이 황후를 선택하시는 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해서 진언을 드린 것뿐이옵니다. 부디 노여워하지 마시옵소서.”
나는 재상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후계자 양성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대는 맡은 임무만 열심히 잘해주게.”
“하…. 하오나….”
당황하여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재상을 그 자리에 두고, 나는 성큼성큼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
칸 제국의 해군 참모총장.
파레호와 함께 향하는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바다 향이 물씬 풍기는 해안가.
바로 포트할레 항만이었다.
이곳은 칸 제국에 존재하는 유일한 항구가 있는 곳이다.
"어이구야. 칸 제국에 항구가 있긴 있는구먼?"
"해군 참모총장님. 기분이 어떻습니까? 좋으십니까?"
"아이고 이 양반아.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해야 할 판인데 기분이 좋겠냐?"
"이 항구는 모두 당신의 지휘 아래 있습니다."
"뭔 배도 몇 척 없구만! 선심 쓰듯 얘기하지 마시게나."
파레호의 투정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해군이 없는 칸 제국은 소유하고 배조차 몇 개 없었다.
이곳은 무역을 위해 상인들이 잠시 거쳐 가는 항구일 뿐,
거의 버려진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헤카테가 귀띔해준 배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저기! 붉은색의 기가 꽂힌 저 배가 제 것입니다."
"으잉?“
드디어 발견한 황실 소유의 배 한 척.
파레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대체 뭔가?"
"음…."
"칸 제국의 황제가 이런 고물단지를 타고 다닌다고?"
휘황찬란한 깃발이 펄럭거리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배의 규모가 행색은 매우 조악했다.
"문제가 있긴 하군요."
"이건 전투용 배도 아니고 그냥 요 앞에 낚시나 하러 갈만한 배로군."
현대식으로 하면 크루즈 선박?
잉대연의 세계관에서 보자면 하등쓸모없는 배인 것은 확실했다.
관리를 안 한 지 몇십 년은 된 것처럼 여기저기 빨갛게 녹슨 고철들.
"이걸 타고 갤러헤드 무역섬으로 갈 생각이었나?"
"예."
"미쳤군. 이걸 타고 가다간 해적들에게 잡혀 물고기 밥이 되고 말 거야. 아니면 도중에 파도에 휩쓸려 가라앉거나 말이지."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요? 이거 말곤 딱히 탈 만한 배가 없는데…."
"내가 누구더냐?"
"파레호 공이요."
"에잉! 그거 말고!"
"해군 참모총장?"
"그렇지! 내가 해군 참모총장인 것에 감사하게나."
"어디서 많이 듣던 대사군요."
"허허. 기분 탓일세.“
다행히 파레호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꾀죄죄하기만 한 노인이 아니었어.'
에즈만토스 왕국에서 우트그라드까지 페이튼을 모시고 갈 정도의 선장이라면….
나름대로 비중이 있는 해군이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왕을 모시는데 어중간한 선장이 배를 몰지는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출항은 되도록 빨라야 합니다.”
“얼마나?”
“빠른 만큼 놈들의 계획을 망쳐놓기 좋거든요. 보름 안에 가능할까요?”
“일꾼들만 충분하면 문제없지.”
“가용 가능한 모든 인원을 투입하겠습니다.”
“허허. 역시 칸 제국의 황제다운 발언이구먼.”
파레호는 초안을 그려보는 듯 배를 응시한 채 말했다.
"나만 믿게.“
듬직하기 그지없는 대답.
그는 분명 칸 제국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인물이다.
**
드디어 밝아온 갤러헤드 무역섬 출항일.
에린은 내가 그 위험천만한 해적들의 소굴로 가는 것을 마지막까지 극구 반대했지만, 나의 뜻을 굽힐 순 없었다.
나는 그녀를 잘 달래 피아스트 산맥으로 보냈고….
잠시 후 파레호와 함께 포트할레 항만으로 도착했다.
'마르코는 회복 중이라 이번 여정에선 빠질 수밖에 없고.'
에즈만토스 왕국과 휴전에 성공한 김에, 릴레나 총사령관을 부를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는 나의 지시에 따라 칸 제국 내부에 있는 던전을 공략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기회가 되면 언젠가 합을 맞춰볼 날이 오겠지.'
파레호는 성큼성큼 해안가를 걸었다.
서프라이즈 선물을 공개하려는 사람처럼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결과는 만족하시나요?"
"만족하고말고. 자네도 보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네."
"전 이미 만족했습니다. 아주 맘에 들어요."
"아직 배의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그게 무슨 소린가. 보고 나서 얘기하게, 보고.“
저 멀리 보이는 배 한 척.
파레호는 그 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름하여 파레호 고속정이라네!”
본인의 취향이 유달리 많이 반영된 배의 이름.
파레호 고속정은 이전에 봤던 첫인상과는 심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양이 완전히 변했군요.”
“당연하지. 예전에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였어.”
파레호는 배로 폴짝 점프했다.
“혹시 에즈만토스 왕국이 우트그라드로 어떤 방식으로 들어갔는지 알고 있나?”
“배를 타고 간 거 말곤 모릅니다.”
“그 배가 바로 이렇게 생겼다네!”
마치 요트처럼 생긴 날렵한 모양의 배.
돛은 우리가 흔히 보는 두 장의 돛을 단 슬로프 형식이었다.
“아무리 우트그라드가 폐쇄적인 국가였다고는 해도 배를 타고 보란 듯이 들어가기란 어려웠네. 자칫 잘못해서 배 위에서 놈들에게 발각됐다가는 육지에 상륙하지도 못하고 고기밥이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지.”
“그렇지요.”
“놈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빠르게 육지에 상륙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목표였네.”
“파레호 고속정은 그게 가능하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배 이름에 고속이란 단어가 괜히 들어가 있는 게 아니야. 거기다 그냥 고속정도 아니고 바로 파레호 고속정이란 말이지.”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오래된 고속정이라는 뜻인가요?”
“예끼! 이놈아! 나이 많다고 놀리는 거냐?”
“아. 아닌가 보군요.”
그의 표정은 심술궂게 변했다.
“오래됐다는 게 아니라 빠르다는 거다. 그것도 엄청나게 말이다!”
‘저 배가그렇게 빠르다고?’
나는 파레호 고속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했지만, 크게 의문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어쨌거나 여기는 소설 속이지 않은가.
선박에 있어서 파레호만 한 인물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다고 믿는 것이 상책이었다.
더구나 그는 칸 제국의 해군 참모총장이 아닌가!
“저 국기는 빼는 게 좋겠군요.갤러헤드로 가는데 괜히 해적들에게 눈에 띌 필요는 없으니까요.”
맨 꼭대기에 달린 칸 제국의 국기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고럼! 출항할 땐 빼야지.”
파레호는 다람쥐처럼 기둥을 타고 오르더니 국기를 뽑아 들었다.
“자! 타게! 출발해야지! 이 노인네의 주특기를 보여줄 시간이군.”
**
쿠쾅
폰 재상은 탁자에 있는 물건을 이리저리 집어 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지는 창문과 물병들.
시종들은 그를 말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화가 폭발한 재상을 막기란 여간 쉬운일이 아니었다.
“재상님! 참으십시오!”
“그러다 다치십니다!”
분이 삭히지 못하는 재상.
그는 변해버린 카이드로젠 황제 때문에 속에서 불이 끓는 듯 타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왜 나를 밀어내는 것이냐.’
칸 제국의 전설적인 황제.
아레스 빌라트와 함께 이루었던 찬란한 역사.
목숨을 걸고 직접 그를 보좌하며 쟁취해낸 셀 수 없는 업적들.
폰 그라츠.
자신의 이름을 무시할 수 있는 인물은 죽은 아레스 황제 말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얼마 전까지는 분명 그랬었다.
‘카이드로젠 이 자식만 아니었어도….’
노병이 된 폰은 이제 옛날처럼 전쟁을 진두지휘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이제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본인은 그간 벌어놓은 재산과 권력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카이드로젠 황제는 자신의 생계를 위협해왔다.
‘나를 무시하는 발언도 정도가 있지!’
자신의 오랜 전우인 아레스를 죽인 마법사 세력을 다시 등용하겠다는 카이드로젠은 그 이후로도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이어왔다.
웬만하면 국정에 간섭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본인이 재상인 이상….
자신의 사상에 반하는 의지를 표출하는 황제를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런데 이 건방진 애송이가….’
자신의 깊은 뜻을 몰라주고 틈만 나면 국가적 영웅인 본인에게 도발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 카이드로젠.
더구나 이제는 마법사들이 대거 황실로 복귀하여 예전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카이드로젠은 자신의 딸인 루나 그라츠마저 사실상 황후 후보에서 내치는 발언까지 하지 않았는가?
“이런 제기랄!”
폰 그라츠는 위협을 느꼈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내려놓아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급해졌다.
“레흐! 레흐를 불러와라!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