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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65화 (66/72)



〈 66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65화

일촉즉발.
나는 페이튼의 모가지에 칼을 들이밀어 조준했고, 그는 마력으로 언제든지  상황을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 신사답게 대화를 하기로 하지 않았나, 페이튼?”
“이….이 자식….”
“으응? 내가 뭘?”

나는 칼을 다시 칼집으로 가져갔고 페이튼과 거리를 유지했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옷매무새를 다시 바로잡았다.

“내가 아무리 아레스를 죽이지 않았다고 말해도 소용없군. 네놈이 나를 어떻게 오해하는지는 이젠 상관하지 않겠어.”
“발뺌 하나는  잘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협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일리빈을 내줄 건가? 내주지 않을 건가?”

협상 조건으로 일리빈을 받아들일 거냐고 묻는 페이튼.
나는 각국의 부하들이 다시 자리로 슬그머니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하나 되묻지.”

나는 능글맞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내가 일리빈을 내주지 않으면 넌 우리 제국과 다시 전쟁하고 싶은가?”

나의 강경한 어조에 놀란 것은 페이튼뿐만이 아니었다.
딕슨과 게겐조차  도발적인 발언에 놀란 듯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훔쳤다.

페이튼은 미간에 손을 놓더니 애꿎은 피부만 벅벅 긁어댔다.

“질문의 답을 질문으로 하다니 아직도 기본적인 예절이 부족하군. 황실에서 이런 것도  가르치나?”
“아버지께 직접 배운 예법이다.”
“아레스 얘긴 별로 하고 싶지 않아.”
“그래. 네 놈이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우리 아버지 얘기를 하는 것이 꺼려질 테지. 이해하마.”

페이튼은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잠시 정적.

“아레스가 가르친 예법이 고작 이런 것인가?”
“아이고야. 이젠 패드립이라도 날릴 생각인가 보지?”
“패드립? 그게 무슨 뜻이냐?”
“알 거 없다.”
“하아…. 카이드로젠.  너와 말장난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더구나 일리빈을 내주지 않으면 전쟁을 하고 싶냐고 묻다니….이런 막무가내 협상법이 어디 있나?”
“내 협상법이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군.”
“당연하지. 이건 상식밖의 행위야.”
“그럼 어쩔  없지. 오늘 네 놈의 모가지를 베어가는 수밖에.”

위협적인 언사에 다시금 협상장의 분위기는 살얼음판을 걷는듯한 아슬아슬함이 연출됐다.

“정말 나랑 해보자는 건가?”
“못할 것도 없지 않나. 넌 내 아버지를 죽인 철천지원수 같은 놈인데.”
“뭘 믿고 이렇게 까부는지 모르겠군.”

페이튼은 지천에 깔린 자신의 부하들에게 눈짓을 주며 거들먹거렸다.

“네 주위를 한번 둘러보라고. 여긴 에즈만토스의 영역이야. 아레스의 원수를 갚든지 말든지  더이상 관심 없어. 마법 하나 다룰  모르는 자네들이 여기서 과연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카이드로젠처럼 극한의 무력을 뽐낼 수 있는 검사가 아니라면, 검사와 마법사의 상성 관계는 일방적으로 마법사에게 유리했다.
더구나 페이튼의 말대로 이곳은 에즈만토스의 영역.
여기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불리한 것은 당연히 나를 비롯한  제국의 인사들이었다.

‘하지만 나한테도 믿을 구석 하나 정돈 가지고 있다고.’

나는 근거 없이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우트그라드에서 얻은 거인화의 비술.
여차하면  힘을 사용해서 놈들을 곤죽을 내버리던가, 아니면 본국으로 도망칠  있는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 있으면 어디 한번 해보든지….”

공격적인 나의 으름장에 페이튼은 질렸다는 듯 좌중을 훑어보았다.
에즈만토스 측 인사들은 죄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전전긍긍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 자식 오늘 진짜 이상하네. 머저리인 건 원래 알고 있었다만, 이렇게까지 무모할 줄은 몰랐어. 내가 알던 카이드로젠이 아닌 것 같아.”
“칭찬인가?”
“이게 칭찬으로 들리나?”
“네 놈이 알던 카이드로젠이 누군지가 궁금해서 그런다.”
“미친 자식.”
“하하! 황궁에서 그러길, 자네한테 욕을 먹으면 내가 일을 잘하고 있다는 뜻이라던데.”
“넌 차원을 넘어서는 미친놈이다.”
“좋아. 좋아. 더 떠들어보라구. 지금 아주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

페이튼은 붉으락푸르락 얼굴이 새빨개졌다.
손까지덜덜 떨어대며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난 네 놈이 부들거리는 이유를  알지.’

페이튼이 부들거리는 이유.
그것은 뻔했다.
유리한 협상 조건을 가지고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한껏 나를 깔보는것.
칸 제국의 황제!
카이드로젠을 농락하는 페이튼 왕!
이런 해피엔딩을 상상하고 여기에 왔나 본데….

‘미안하지만 너와  종자부터가 다르다.’

협상은 정보의 싸움.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의 수준은 페이튼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잉대연 전문가 류지상.
내가 카이드로젠의 몸속에 있는 이상….
이런 협상 싸움에서 질 리가 없다.

‘헬피엔딩이 뭔지 보여주마.’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단숨에 멱살을 잡아채  쪽으로 끌어당겼다.

“와…. 왕이시여!”
“폐하!”

나의돌발 행동에 양측의 군사들은 무기를  들고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잡고 대치상태에 빠졌다.

“뭐…. 뭣 하는 짓이냐?”
“오호라…. 역시 그랬군.”
“뭐냐 네놈!”

소설 속 묘사에 따르면 페이튼의 마력은 에린에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강하다.
둘의 차이점이라면 에린은 보조 버프 마법에 특화된 반면에 놈은화염을 다루는 공격마법에 특화된 마법사라는 정도.
그가 마음만 먹으면 나와 충분히 호각으로 싸울만한 실력자임은 틀림없었다.
따라서 이 정도 도발이라면 당장이라도 이곳을 마법으로 몽땅 소각시킬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마력을 가진 그였지만….
페이튼은 딱히 내게 공격성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난 알지.’

사실 놈은 이미 파편의 힘에 잠식되어 몸이 썩어가고 있었다.
아까는 놈이 흥분해서 충동적으로 마력을 방출했다 치고….
지금은 아까보다 더한 나의 도발에도 이글거리는 마력을 뿜어내지 않았다.

“너…. 마법 쓰기 두렵지?”

슬쩍 떠보는 말투.
페이튼은 가벼운 나의 질문에도 급격하게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은 자신의 치부를,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귀여운 자식.
난 모르는 게 없단다. 아가야.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페이튼. 한 번만 더 나를 도발하면 그때는 진짜 전쟁이다.”

어차피 페이튼은 전쟁하고 싶은 마음도, 이길 수 있는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내가 역으로 제압하는 것도 가능할법했지만, 추후 ‘대 혼란 시대’를 견뎌내기 위해선 불가피하게 놈의 존재가 필요했다.

“아버지의 복수도 할 겸 세상에서 가장 잔혹하게 짓밟아주겠다.”

나는 마지막 일격을 날리고 쿨하게 뒤돌아섰다.
딕슨과 게겐을 포함한 신하들은 내 꽁무니를 놓칠세라 빠르게 따라붙었다.

“잠깐 기다리시오! 왕께 이게 무슨 무례한 행동이란 말이오!”

눈치 없이 끼어드는 에즈만토스의 인사 한명.
나는 자연스럽게 허리춤 위로 손을 두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는 여유로운 모습임과 동시에 언제든 검을 뽑을 준비를 하는 유용한 자세였다.

“아. 페이튼. 그리고.”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무례한 협상은 난생처음이다.”

**

협상을 마치고  제국으로 돌아가는 길.
딕슨은 지금 이 상황이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놀라워서 눈물이 다  지경이었다.
자신을 무시한 에즈만토스의 말단 인사들 때문에 마음속에 응어리진 분노가 꽤 많이 쌓여있었는데….
바로 오늘!
카이드로젠 황제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다.

“딕슨 형님. 마지막에 폐하께서 하시는 말씀 들었어요?”
“어떤 말씀?”
“죽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기어라!”
“당연히 들었지.”
“아니 아무리 폐하라도 면전에다 대고 그런 말씀을 하실 줄 누가 알았겠어요?”

게겐은 카이드로젠을 성대모사 하며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그러게 말이다. 10년 묵은 체증이 쫙 내려가는 기분이더라. 아주 시원했어.”
“형님 입꼬리가 씰룩거리시는 게 기분이 엄청 좋아 보이시더라고요.”
“봤니?”
“당연하죠. 형님 표정 너무 웃겼습니다.”
“어우…. 아직도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이것으로 휴전은 성공한 거겠죠?”
“당연하지. 페이튼 그 녀석, 마지막에 표정 봤냐? 아주 얼이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더라.”
“저희 황제 폐하께서 원래 이런 분이셨던가요? 그동안 매일 술과 여자로 허덕이는 모습만 봐왔는데…. 이런 카리스마가 있을 줄이야.”

딕슨은 그간 잊고 있었던 애국심이 뿜뿜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과거 아레스가 집권하던 당시의 강성한 칸 제국.
그 당시에 딕슨은 나이가 어려 아레스의 모습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오늘 카이드로젠의 모습을 보고 아마 아레스도 이러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페이튼을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 가지고놀다니!’

칸 제국이 조금 주춤하는 사이.
패권을 이어받아 성장하고 있는 에즈만토스 왕국은 절대 무시하지 못할 강대국이었다.
전략적 요충지인 일리빈.
협상 조건으로 이곳 중에 하나의 골짜기라도 내어주었다간 안보에 크나큰 위험이 생길 수 있었다.
그런데 에즈만토스 왕국이라는 강대국의 왕이 내건 조건을!
아예 묵살하고 일리빈의 티끌도 내주지 않는 조건으로 일방적으로 휴전을 협상해버렸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이득!’

사실 이건 협상이라 부르기도 뭣한 협박 비스무리한 것이었다.
어느 누가 상대의 목에 칼들 들이밀고 멱살을 잡아채며 협상하겠는가?
딕슨은 살다 살다 이런 식으로 협상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
카이드로젠 황제가 우리 편이었기에 망정이지 상대가 만약 이런 식으로 나왔다면 얼마나 아찔했을까 오금이 저렸다.

‘이것이 칸 제국의 황제가 가진 담대함?’

딕슨은 곰곰이 생각했다.
아레스 황제가 죽고  뒤로 급격하게 흔들렸던 카이드로젠.
그는 아버지를 죽인 세력이라고 판단한 에린을 처형하려 했고, 죄 없는 마법사를 혹독하게 핍박했다.
자신은 어차피 유서 깊은 검사 가문인 그라츠 가문이었기 때문에 카이드로젠의 화를 피해갈 수 있었지만, 속으로는 그가 너무한다는 생각을 종종 해왔었다.

‘정말변하긴 변한 건가….’

시종일관 일관된 모습으로 잔혹한 폭군 황제로 군림하던 카이드로젠이 이제는 변한  같다는 소문을 딕슨은 믿지 않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 맛이 가면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딕슨의 믿음을 처음으로 깨부순 카이드로젠….
그의 마음속에는 신선한 충격이 가라앉을 줄 몰랐다.

‘어쩌면 재상님께서 틀리셨을 수도 있어.’

그가 듣기로 폰 재상은 카이드로젠 황제를 여전히 인정하지 못했다.
사사건건 아레스 황제와 비교하며 그의 언행을 깔보며 무시하던 재상.
재상은 겉으로는 아레스의 복수를 위해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면서 안으로는 전혀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는 걸핏하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권력을 위해 그라츠 가문을 책임지고 감싸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딕슨은 그것이 과연 옳은 행동인지는 의문이 들었다.

“형님.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응? 아무것도 아냐.”
“기분 좋은 날이잖아요. 우리 재상님께 가서 자랑해요.”

싱글벙글 밝은 표정의 게겐은 딕슨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재상님께 자랑이라…. 정말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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