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64화
평화로운 일상.
황궁에서 피 냄새가 안 나니 이 얼마나 산뜻한가!
마르코의 병문안을 다녀온 나는 새삼 평범한 생활이 주는 안정감을 깊이 음미했다.
‘그땐 상황이상황이었던지라.’
배신자인 자네스 총독을 베고.
옆에서 깐족거리던 탐관오리도 베고.
심지어 내 몸을 내가 직접 찔러대며 선혈이 낭자했던 칸 제국의 황궁.
지금 황궁 분위기는 그때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평화로운 나날들이 이어졌다.
‘나…. 꽤 잘하고 있는 걸지도?’
권력의 최고봉.
칸 제국의 황제가 이렇게 힘들게 쏘다니는 것을 백성들을 알까?
하물며 같은 황궁 안을 활보하는 저 신하들은 알고 있을까?
‘내 덕에 너희도 평화롭게 사는 줄 알아라.’
실제로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너무나도 오만한 발언.
하지만 나는 이미 카이드로젠으로 동기화가 끝난 모양인지, 그간의 공로에 대해 생색을 내고 싶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어디 누구 없나?’
누구 한 명 붙잡고 자랑 좀 할 요량으로 문을 열었다.
슬쩍 내다본 복도엔 시종 한 명이 부리나케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젠장.’
뭔가 예감이 좋지 않은 플래그다.
안 좋은 기운을 감지한 나는 이마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폐하! 큰일 났사옵니다!”
빙고.
역시 큰일이다.
나는 그를 마중 나와서물었다.
“뭔 큰일?”
“흐익! 폐하! 송구스럽습니다!”
“숨 좀 돌려라.”
“예!”
내가 방문 밖으로까지 나와서 맞이하자 시종은 당황한 듯 식은땀을 흘렸다.
헐떡거리는 그를 내버려 두고 자리에 앉아 따뜻한 쌍화차를 음미했다.
“폐하! 큰일이옵니다!”
“어. 그래. 무슨 일인데?”
“2차 휴전 협상을 하러 간 인원이 중간보고를 위해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근데?”
시종은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혹시나 내가 분노해서 이성을 잃으면 어쩌나 고민되는지 몹시 긴장한 눈치였다.
“그게…. 폐하께서 직접 협상 자리에 나오셔야겠다고 합니다.”
“아. 그래?”
“상대 진영 쪽에서도 그만한 인물이 나오다 보니까…. 저희 쪽에서별달리 대응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합니다.”
“나를 부른 게 내가 아는 그놈인가?”
“예….”
“재밌게 흘러가는군.”
“예?”
“넌 황궁 자문관에게 이 내용을 공유해라. 나는 지금 바로 협상 장소로 갈 테니.”
**
에즈만토스 왕국과의 2차 휴전 협상.
휴전선에 있는 임시로 만든 거처에 앉아있는 칸제국의 인사들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아.”
“이걸 어쩌지요?”
“나도 몰라.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
“아 정말 난감하네요….”
2차 휴전 협상을 위해 담당자로 지정된 게겐과 딕슨.
그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니 무슨 그놈이 갑자기 등장한답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애초에 이건 우리끼리 와서 될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아.”
“재상님께서 저희에게 거는 기대가 크신 것 같던데요.”
“그분도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모르셨을 것이니 너무 염려 말아라.”
“폐하께서 정말 이곳에 오실까요?”
“오시긴 할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오시는 이유가 휴전 협상을 위함일지, 아니면 우리들의 목을 베기 위함일지는두고 봐야 알겠지.”
“흐익.”
딕슨은 손으로 목을 베는듯한 시늉을 하며 말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의 게겐.
그는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황제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조금 있으면 다시 협상의 시간입니다. 그때까지 폐하께서 오시지 않는다면….”
“협상이 결렬되고 전쟁이 일어나게 되겠지.”
“그런데…. 저희 재상님께서는 전쟁하시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진짜 속내는 모르지.”
“그게 무슨 뜻이죠?”
“단지 폐하의 자리를 노리는 수단으로 전쟁이라는 카드를 쥐고 계신 게 아닌가 싶어.”
“그건….”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볼 수 있지.”
당장 전쟁을 원하는 재상.
그것을 미루고 싶은 황제.
딕슨은 폰 재상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것까지는 아니었다. 단지 같은 가문의 사람이라 팔이 안으로 굽어질 뿐.
“허나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다, 게겐. 어디 가서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그럼 이번 협상은 가능한 휴전을 해야 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 거죠?”
“그렇지. 그게 폐하의 뜻이시기도 하니까…. 휴전을 위해선 일단 일리빈을 일정 부분이라도 내어주는 수밖에 없겠어. 그게 놈들이 원하는 휴전 조건이니….”
“누구 맘대로 일리빈을 내주느냐?”
“으응? 누구지?”
갑자기 등장한 낯선 목소리에 딕슨과 게겐을 고개를 돌렸다.
“으아아악! 폐하!”
“태…. 태양이 폐하를 비추기를!”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카이드로젠황제.
황제의 깜짝 등장에 딕슨과 게겐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일리빈을 내준다니? 나는 그런 명령을 지시한 적이 없는것 같은데.”
“하…. 하오나 폐하….”
“하오나 뭐?”
“놈들의 요구가 워낙 강경해서 협상이 쉽지가 않은 상황이옵니다.”
“다음 협상은 언제지?”
“10분 뒤니까 지금 바로 나가셔야 하옵니다.”
“잘됐군.”
딕슨은 속으로 황제가 도착해서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대로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갔다면 휴전 협상은 결렬될 가능성이 컸다.
자신과 게겐의 언변만으로는 에즈만토스 왕국의 거물을 상대하기 벅찼기 때문이다.
딕슨은 여차하면 릴레나 총사령관에게 부탁할 생각도 했다. 협상을 위한 담당자로 지정되진 않았지만, 이런 긴급한 상황에 형식적인 관례를 사사건건 따질 여유는 없었다.
‘휴. 정말 잘 됐군.’
다행히 카이드로젠 황제가 때맞춰 등장해서 한시름을 놓은 것이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황제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일리빈을 내주지 않을 무슨 방도라도 있으십니까?”
“있지.”
그의 질문에 무심하게 답변하는 황제.
딕슨은 과연 카이드로젠 황제가 이 상황을 무슨 수로 헤쳐나갈지 몹시 궁금했다.
황제의 아버지를 암살한 집단이 에즈만토스 왕국이라지만,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는 상태.
요충지인 일리빈은 절대 내줄 수 없는 입장.
거기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제 입으로 휴전을 해달라고 요청해야 하는 불편한 상황.
‘더구나 그 당사자가 바로 카이드로젠 황제다.’
난폭한 폭군 황제로 이웃 나라에까지 소문이 자자한 카이드로젠.
비록 최근에는 그 성질이 조금 죽었다는 평이 많았지만, 언제 다시 도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사람은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니까….’
딕슨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카이드로젠 황제가 좋은 수를 내기엔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아 보였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도착지.
그는 생각을정리하지 못한 채.
약속한 장소인 협상 자리로 터벅터벅 입장했다.
**
“오랜만이네. 카이드로젠.”
다리를 꼬고 앉아서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사람.
나는 그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어. 오랜만이다. 페이튼. 잘 지냈나?”
에즈만토스 왕국의 페이튼 왕.
적국의 가장 꼭대기에 앉아있는 거물이 직접 나를 지목하여 이 자리로 부른 것이다.
이 타이밍에 그가 나를 부를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이곳으로 왔다.
‘고놈 참 뺀질뺀질하게 생겼군.’
페이튼은 윤기 나는 검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거드름을 피웠다.
느끼한 새끼.
류승범을 따라 하고 싶었나 본데….
넌 그냥 최양락이다.
“내가 부르니까 진짜로 오네?”
“네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니까 뭐, 나도 기꺼이 나가줘야겠다 싶었지.”
“이런 중요한 협상 자리에 왜 폰 같은 사람을 보낸 거야? 더 높은 사람이 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폰 재상 정도면 과분하지…. 뭘 그래?”
뿌득
페이튼은 볼펜을 부러뜨렸다.
귀여운 놈.
보아하니 카이드로젠을 살살 도발해서 분위기를 주도하고 싶었나 본데.
네놈이 모르는 게 한가지 있다.
‘카이드로젠이 파이터라면, 류지상은 아가리 파이터.’
나는 페이튼의 도발을 자연스럽게 받아치며 여유 있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카이드로젠.”
“응?”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것 같군.”
페이튼은 마력을 뿜어내며 살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왕국답게 그 또한 고위급 마법사였다.
높은 수준의 응축된 마력을 발산하며 내 뺨에 미세한 스파크를만들었다.
‘네가 살기를 드러내면 어쩔 건데?’
나는 지지 않고 카이드로젠의 격을 방출했다.
무력으로는 역시나 현존하는 등장인물 중 원탑인 수준이다.
난 카이드로젠의 무력으로 페이튼의 마력을 밀어냈다.
좁은 막사 안에서 뿜어내는 엄청난 힘의 파동에 부하들은 자세를 가만히 유지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대화를 좀 하지. 카이드로젠.”
“그래.”
“우린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페이튼은 힘을 거두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그를 따라 살기등등하게 뿜어내던 격을 거두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페이튼은 나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우리가 내건 조건은 알고 있겠지?”
“알지. 그러는 너는? 내가 내건 조건은 아직 모르나?”
“카이드로젠! 지금 장난치는 건가? 전쟁을 먼저 일으킨 사람이 바로 너면서! 어디 경우 없이 네놈이 조건을 내건단 말이냐!”
나는 입꼬리를 한껏 치켜세우며 그에게 말했다.
“내가 조건을 내걸면 안 되나?”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일리빈을 내주지 않는다면 협상은 결렬이야!”
“협상이 결렬이라는 말은….”
“전쟁이라는 소리지!”
페이튼은 기세등등하게 전쟁이라는 단어를 외쳤다.
“내 다시 한번 말해주지. 카이드로젠. 휴전하고 싶다면 일리빈을 내놔라! 그렇지 않는다면 협상은 결렬이다. 자! 너의 선택은 뭐지?”
나는 페이튼의 발언을 들으며 웃음이 피식피식 났다.
“뭐가 웃긴 거지?”
“아. 웃은 건 미안하다. 갑자기 웃긴 생각이 나서.”
나는 그의 허세가 눈에 훤히 보였다.
사실 에즈만토스왕국도 칸 제국과 전쟁을 하기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마법사 위주로 구성된 군대가 원정을 나가기엔 체력이 영 받쳐주지 못했다.
그것을 메꾸기 위해 거인족에 접촉했지만, 생체실험의 실패로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갔고….
지금은 몰래 갤러헤드 무역섬의 해적들과 접촉해서 ‘팔레토 케논’이라는 무기를 만드는 중이다.
‘네가 진짜 자신이 있었다면 전쟁왕인 아레스를 죽인 시점부터 칸 제국을 침공해왔겠지.’
하지만 페이튼은 그러지 않았다.
아레스를 죽인 것을 부정하고 최대한 시간을 끌며 힘을 키울 궁리를 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봤을 때, 페이튼이 지금 일리빈을 명목으로 협상 결렬이라는 말로 압박을 주는 것은 모두….
‘뻥카라는 말이다.’
깜찍한 놈.
나 류지상 앞에서 어딜 허세를 부리고 있어.
“그나저나 페이튼.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하나 물어봐도 되나?”
“뭐지?”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물었다.
“무엇이 두려워서 자꾸 아레스를 죽였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거지?”
“뭐라고? 아직도 나를 의심하는 건가! 나는 진심으로 아레스와 동맹을 하기 위해 다가갔어. 하지만 그를 죽인 건 다름 아닌 자네 쪽에 있는 배신자가 아니었나!”
“우리 쪽에 배신자가 있었다는 사실은어떻게 알았지?”
참고로 페이튼은 아직 내가 배신자였던 자네스 총독을 죽인 사실을 모른다.
“그…. 그야! 내가 죽이지 않았으니까! 범인은 내부에 있지 않을까 예상해본 거지.”
“그건 뭐 됐고. 하나 더 질문.”
“...”
“아레스를 죽인 사람이 너라는 것을 인정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생기는 건가?”
“나는 아레스를 죽이지 않았어! 그리고 큰일은 무슨 큰일? 허! 참. 감히 내게 큰일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다는 거지?”
“나.”
“너?”
“내가 네놈 모가지를 지금 당장 베어버린다든가 할 수 있는데….”
파아아앗
페이튼은 마력을 방출하여 내 주위의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몹시 흥분한 듯 씩씩거리는 페이튼.
“이 새끼가 지금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건가?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뭐 하는 거지?
“장난?”
나는 페이튼의 모가지에 칼을 들이밀며 말했다.
“네 눈엔 이게 지금 장난치는 거로 보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