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63화
마법사 장례식이 끝나고….
그라츠 가문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폰 재상은 뒷짐을 지고 매서운 눈빛을 띠고 있었고 그 외 게겐을 포함한 다른 인원들은 그의 눈치를 보며 앉아있었다.
“하아.”
에즈만토스 왕국과의 휴전 협상.
그리고 선대 황제 아레스를 해한 세력으로 추방했던 마법사 무리의 복귀까지.
재상은 이것저것 일을 벌리는 황제의 행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다가….
“또 협상하러 가라니!”
재상은 신경질적으로 물컵을 집어 던졌다.
황제가 지시한 휴전 협상 건은, 말이 협상이지 사실상 일방적으로 빌어야 하는 자리나 다름없었다.
전쟁을 지시한 사람은 카이드로젠 황제였는데, 정작 휴전하자고 비는 것은 자신에게 일을 떠넘긴 상황.
그는 황제에 대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번 휴전 협상에 지원할 사람 있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재상님께서 주도해서 가시는 게 어떨지요.”
“내가 또?”
재상이 눈을 부라리자 아무도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굳이 내가 안 가더라도 협상이 어려울 것도 없지 않냐. 일리빈을 내주는 것은 불가하니 다른 안을 제안하면 된다.”
“...”
“그래서 말인데…. 이번 협상은 게겐, 네가 가는 게 어떻겠냐?”
“제가요?”
“그래. 그리고 너만 가면 조금 불안하니까, 자 어디 보자.”
누굴 협상자로 정할지 둘러보는 재상.
자리에 있는 그라츠 가문 사람들은 대부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딴청을 피웠다.
“음.”
휴전 협상 건은 모두가 꺼리는 분위기였다.
황제의 말대로 일리빈 지역을 내주지 않는 것. 그리고 결국엔 전쟁이 필요할 것이라는 전제는 같았지만….
적국인 에즈만토스 왕국에서 사정해서 협상해야 하는 지금 상황 자체가 그들에겐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특히나 앞선 협상 자리에서 있었던 치욕스러운 일화.
칸 제국이 협상 자리에 재상과 수많은 고위 관료를 파견한 것과는 달리, 에즈만토스 왕국에선 말단 계급의 인원만이 자리에 나온 것이다.
폰 재상의 요구를 귓등으로 듣지도 않은 채 뻐꾸기처럼 안된다고만 말한 것은 덤.
그 자리에서 그라츠 가문의 일원들은 가만히 이를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버러지 같은 놈들에게 무슨 수모를 당할지 모르겠군요. 이번에도 또 말도 안 통하는 쫄따구만 보내는 거 아닐까요?
우리 화병 나서 죽으라고?”
1차 협상 자리에서 가장 흥분했던 딕슨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딕슨. 네 놈은 빠진다. 놈들이 네 표정을 보고 또 무슨 꼬투리를 잡을지 모르니 말이다.”
“아닙니다! 재상님. 협상은 패기가 중요하지요. 너무 기어들어 가면 저희를 오히려 우습게 보지 않겠습니까? 제가 게겐이랑 같이 가겠습니다.”
딕슨은 오히려 본인이 나갈 것을 자처했다.
그의 패기에 재상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오오. 그래? 사실 우리 칸 제국은 자네 같은 투사가 필요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누구보다는 말이지.”
“번지르르하게 하는 누구는 저희가 다 아는 그분이시겠죠?”
“아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냐?”
“당연하죠. 재상님. 그라츠 가문이 제국에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데 이렇게도 저희를 무시한단 말입니까.”
“그렇지. 그렇지.”
“폐하의 행보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재상은 딕슨과의 뒷담화가 즐거운 듯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나저나 폐하께선 왜 이렇게 갑자기 물러지셨을까. 누구 아는 사람 있냐?”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요즘 황궁 자문관이 요즘 눈에 자주 밟히더군요.”
“맞습니다. 폐하께선 그분을 대단히 총애하시더라고요.”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에린 킨드라를 지목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딕슨은 무언가 떠오른 듯 의문을 던졌다.
“설마 폐하께서 그분을?”
“에이. 설마요.”
“남녀 사이에 무슨 일이일어날지 모르잖아요.”
“그건 그렇긴 하지만…. 황후 자리는 이미 내정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요즘 기류가 이상한 게 불안하더군요.”
“맞아요. 폐하께서 우리 루나를 황후로 맞이하기로 공식적으로 선포하신 건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루나 그라츠.
그녀는 과거 아레스가 집권하던 당시 폰과 아레스가 구두로 약속한정략결혼의 당사자였다.
카이드로젠과 동년배인 그녀는 어릴 적부터 카이드로젠과 가깝게 지내왔다.
황제와 재상이 적극적으로 밀어준 덕분에 그 둘은 간혹 훈훈한 그림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카이드로젠은 냉정하게 일정 부분 이상의 마음은 주지 않았고.
이후 둘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요새 루나는 뭐 하고 있지?”
“글쎄요. 언젠가부터 황궁에 놀러 오지도 않네요.”
“이게 다 황궁 자문관인지 뭔지 하는 미꾸라지가 물을 흐려놔서 그런 거 아닙니까? 우리 루나가 얼마나 낯을 많이 가리는데요.”
“아이고. 우리 루나가 통 안 보이는 게 다 이유가 있었구먼?”
“맞습니다. 재상님. 이게 다 그 황궁 자문관 때문입니다.”
재상을 포함한 그라츠 가문은 혹시라도 에린 킨드라가 황후 자리를 넘볼까 싶어 극도로 경계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면 쓰나. 내 조만간 자리를 마련하지. 이번 기회에 확답을 받아둬야겠어.”
“좋은 생각이십니다. 재상님.”
“루나한테도 미리 일러둬라. 황제 폐하의 마음을 단단히 꼬셔야 하니까 말이지.”
“알겠습니다.”
**
마르코는 여전히 의원에서 입원 중이었다.
카이드로젠 황제가 금세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온 것과는 대비적으로 마르코의 몸은 회복세가 영 더뎠다.
‘역시 나와는 아예 종 자체가 다르시다는 건가.’
비록 에린이 걸어준 치유 마법의 힘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황제의 회복력은 엄청났다.
깨어난 지 수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황제의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마르코는 그 사실이 억울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황제에 대한 경외심이 깊어졌다.
바실리스크를 닭 모가지 비틀 듯 가지고 노는 차원이 다른 강함.
마르코는 그때를 회상하며 생각에 잠겼다.
‘좀 과격하시긴 했지만, 그래도 폐하는 폐하시다.’
피아스트 산맥 원정의 목표는 바실리스크 척결.
카이드로젠 황제는 이성을 잃은 상황에서도 목표를 잊지 않았다.
대화산으로 미끼를 던져 바실리스크를 잡는다는 계획은 아예 무산되었지만, 그보다 더한 방법으로 놈들을 제거했다.
‘이렇게 죽이고. 저렇게 죽이고.’
적진에서 홀로 무쌍을 찍은 용맹함.
마르코는 그 기억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수십 마리의 마수들 사이에서 학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건 오직 카이드로젠 황제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여기 사람들이 직접 봐야 좋았는데….’
아쉽게도 아직도 칸 제국 내부에는 카이드로젠 황제에 대한 민심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변했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했지만, 변한 모습이 과연 얼마나 갈지는 다들 의문을 품었다.
마르코의 동료인 호위무사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병문안을 와서 하나같이 황제에 대한 오점을 기대했다.
“어이. 마르코. 이거 사실 폐하께서 너를 이렇게 만드신 거 아니냐?”
“솔직하게 말해봐. 인마.”
“무슨 소리야. 자식들아.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나가 그냥.”
폐하의 영웅담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
황궁 자문관, 에린 킨드라뿐이었다.
‘그나저나 원래대로 돌아오셔서 천만다행이야.’
일주일이 넘게 깨어나지 못하시던 카이드로젠 폐하.
그는 혹시나 폐하가 어디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어쩌나 무척 고민했다.
만약에 일이 잘못됐다면 호위무사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을 무척이나 자책했을 것이었다.
‘사실 난 있으나 마나 한 들러리였겠지만….’
마르코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의 충성심과는 별개로 현실의 벽은 너무나도 높았고 그는 그것을 직시했다.
폐하께 도움이 되고 싶었다는 열망 하나만으로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엔 한참 모자랐다.
“어휴! 난 약해빠졌어.”
미라처럼 붕대로 온몸을 감고 있는 자신의 몸을 보며 한탄했다.
결과적으로는 폐하와 함께 임무를 달성하고 복귀한 그였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은 심란했다.
‘폐하께 칭찬이라도 받고 싶다….’
자신의 공을 높이 치하한 폐하께서 자신의 병문안을 오면 얼마나 좋을까?
황제가 한낱 호위무사의 병문안을 올 리는 없었지만, 마르코는 은연중에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기대했다.
“에이씨! 오겠냐? 그 사람이?”
“어. 왔다.”
낮고 무거운 음성.
마르코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아아악! 폐하!”
“뭐라고 혼자 중얼중얼거리고 있냐?”
“아…. 아닙니다! 폐하!”
“왜 이렇게 놀래?”
“어찌 이런 귀한 곳에 누추한 분이…!”
“뭐라고?”
“으아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는 혼비백산하여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보아하니 내가 병문안 안 온다고 삐졌구먼.”
“절대 아닙니다!”
“됐고. 몸은 괜찮냐?”
“끄떡없습니다. 폐하!”
카이드로젠은 마르코의 몰골을 아래위로 훑었다.
“그런 것 치곤 붕대를 너무 많이 썼군.”
“아….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자. 심심하면 나중에 이거나 먹어라.”
그는 주섬주섬 보따리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마르코에게 건넸다.
보따리에서 나온 물건은 다름 아닌 음료수!
마르코는 이 광경이 믿기지 않아 놀라자빠질 지경이었다.
황제가 일개 호위무사를 위해 음료수를 싸오다니!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오버하지 마라.”
“어찌 미천한 제게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까!”
“병문안 올 때 빈손으로 오는 사람 봤냐?”
마르코는 가보로 간직할 기세로 음료수를 끌어안았다.
“이건 절대로 마시지 않을 겁니다! 폐하!”
“이 자식 이거. 머리를 다쳤나.”
“감사합니다!”
카이드로젠은 마르코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자신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 부하.
그는 그런 충직한 부하를 무엇보다 원하고 있었다.
카이드로젠이 아끼는 손가락 중, 하나의 손가락은 아무래도 마르코의 차지가 될 듯싶었다.
“어이.”
“예!”
“내가 앞으로 너를 요긴하게 써볼까 하는데….”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잘하는 게 뭐냐?”
마르코는 황제의 뉘앙스를 보아 단순히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라는 의도를 읽었다.
이는 분명 자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보겠다는 의지.
“폐하께 비하면 미천하지만, 저는 시력이 쓸만하옵니다!”
“시력?”
“장거리에 있는 표적을 확인할 수 있음은 물론,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에 대한 동체 시력도 평균 이상이옵니다.”
“흐음.”
카이드로젠은 머릿속으로 혼돈의 파편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이곳. 잉대연의 세계관에서는 평균 이상의 능력은 모두 파편의 힘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슨.
자신도 모르게 그 힘에 잠식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혹시 그 시력을 쓰려 집중하면 몸이 안 좋거나 하진 않나?”
“예? 아뇨.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그럼 다행이군. 시킬만한 일이 있을 때 부를 테니 상시 대기할 수 있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마르코의 우렁찬 대답에 카이드로젠은 속으로 안도했다.
그는 가능하면 자신의 측근이 파편의 힘에 잠식되지 않기를 원했다.
“푹 쉬어라. 난 간다.”
“감사합니다. 폐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쿨하게 손을 흔들며 나가는 카이드로젠.
여기에 더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이 그의 걸음걸이는 거침이 없었다.
마르코는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황제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아. 그리고 혹시나.”
성큼성큼 나가던 그는 뒤를 돌아 마르코를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아프면 언제든지 얘기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