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62화
놈들을 쓸어버리자는 재상.
그 말인즉슨.
“예. 전쟁입니다.”
“전쟁?”
“놈들이 준비되기 전에 선제타격하여 모조리 쓸어버려야합니다.”
재상은 회심의 일격을 가하듯 ‘전쟁’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다들 쉬쉬하던 그 단어가 등장하자 회의실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가열되는 것이 느껴졌다.
“재상님! 전쟁이라니요!”
“전쟁은 그렇게 감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적국이 전쟁을 준비하는 것을 넋 놓고 지켜보자는 말씀이오?”
“좋은 수가 있다면 어디 말씀들 해보시오!”
그라츠 가문을 필두로 한 전쟁 찬성론 측에선 재상의 발언을 열렬히 옹호했고 에린을 필두로 한 중도층은 조금 더 신중하게 결정하자는 의견이었다.
“무슨 좋은 수가 있는지 힘을 모아서 고민해야지, 당장 수가 떠오르지 않으니 전쟁이라니요? 그게 논리적으로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황궁 자문관은 세상 물정을 영 모르는 것 같군요. 신관에서 기도만 하다 오셔서 그런가.”
“뭐라고요? 반박하고 싶으시면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해보세요. 빈정거리지 마시고요.”
“재상님께서 아무 근거도 없이 전쟁이라는 단어를 꺼내셨겠습니까? 다 뜻이 있으셔서 말씀하신 겁니다. 황궁 자문관님!”
“맞습니다. 재상님께선 ‘국가 쟁탈전’의 시기를 겪으신 전쟁 영웅이십니다!”
“그거랑 이거랑 대체 무슨 연관인지 모르겠습니다!”
칸 제국의 주요 관직은 주로 그라츠 가문의 인사들이 차지하고 있어 주로 에린이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나는 손을 들어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다들 잠깐.”
금세 쥐죽은 듯이 조용해지는 회의실.
재상을 바라보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대 말대로 에즈만토스 왕국이 뒤에서 몰래 작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동의하네.”
“예.”
“그대가보기엔 우리가 이길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보는가?”
“확률이요?”
“그래. 확률. 이길만한 가능성이 있어야 전쟁을 하든가 말든가 할 것 아닌가.”
재상은 머릿속으로 고민하는가 싶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군수품 부족.
마법사의 부재.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만 해도 이런 부정적인 키워드가 주를 이뤘다.
“대답하기 어려운가? 천천히 대답해도 되니까 부담가지지 말게.”
“...”
“다만 의자에 앉아있는 자네들을 비롯해서 모두가 알아둬야 할 것은….”
나는 시선을 재상으로부터 단상 아래에 있는 그라츠 가문의 대신에게로 천천히 옮겼다.
“지금 재상은 무척이나 감정적이라는 것이네. 오랜 전우였던 아레스를 잃어 복수심에 눈이 멀어있는 상태야.”
“아닙니다. 폐하!”
“아니라고? 그럼 다시 한번묻겠네. 전쟁이 유일한 해법인가? 그게 최선이야?”
“...”
“전쟁을 일으키면 우리가 이길 수 있긴 한가?”
“아니! 폐하! 아레스는 재상님의 전우일 뿐만이 아니라 폐하의 아버지시기도 합니다! 재상님께선 그런 부분을 두루 인지하여 신경을 쓰고 계시는데 어찌하여 그런 냉정한 말씀을 하십니까?”
그라츠 가문의 사람 중 한 명이 적극적으로 항변했다.
“자네 이름은 뭐지?”
“게겐 그라츠입니다.”
“아주 좋은 지적이네. 게겐.”
나는 게겐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레스의 죽음에 대해서 감정적이어야 할 사람은 재상이 아니라 오히려나다. 아레스는 내 아버지신데 안 그런가?”
“...”
“그리고 전쟁은 애들 장난 같은 게 아니다. 그건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황송하옵니다.”
“그런데 나보다 더 자네들이 흥분하면 되겠냐 이 말이야. 대체 무슨 근거로 전쟁을 일으키자는 거지?”
“...”
“특히나 특정한 가문에서 유독 그런 경향이 많이 보이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아예 그라츠 가문을 대놓고 바라보며 지적했다.
게겐은 황제가 이렇게까지 압박을 가해올 줄은 몰랐는지 연신 땀을 훔쳤다.
“그리고 재상.”
“예. 폐하.”
“그대가 진정으로 이 칸 제국을 위한다면 조금만 더 냉철한 판단을 부탁하네.”
“칸 제국을 위한다면….”
“전쟁만이 정답은 아니지 않은가?”
현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내실을 다지며 착실히 힘을 모으는 것이다.
그간 카이드로젠을 비롯하여 폰 재상.
그리고 주요 관직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인사를 포함해서.
냉정하게 말하면 그들은 모두 칸 제국을 갉아 먹던 암세포와도 같은 존재다.
지금의 칸제국은 더이상 아레스가 호령하던 전성기의 칸 제국이 아니다.
내가 카이드로젠으로 빙의한 시점부터 사방을 쏘다니며 열심히 노력했고, 유의미한 결과를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에즈만토스 왕국이 준비하는 ‘팔레토 케논’은 분명 위험한 무기긴 하지만 실전에 투입하기까지는 아직 일렀다.
그 말은, 지금 당장 급하게 전쟁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는 의미였다.
팔레토 케논에 대해 무지한 재상으로선 마음을 조급하게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이해가 가긴 간다만.
“아 참. 그러고 보니 재상의 질문에 아직 답을 안 했군.”
“예?”
“나보고 아버지의 죽음을 어찌 생각하냐고 물었지?”
“...예.”
“그대가 헷갈리는 것 같으니 확실하게 말해주지.”
재상을 포함한 회의실의 모든 신하의 귀추가 내게 집중됐다.
“에즈만토스 왕국은 장차 우리의 발밑에 기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결코 어물쩍 넘어가지 않을 것이야. 내 이 자리를 빌어 맹세하지.”
“...”
“자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한 대답이 되었나?”
“황송하옵니다. 폐하.”
“전쟁은 시기상조네. 내 뜻을 오해 없이 잘 이해해줬으면 좋겠군.”
재상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전쟁배상금으로 요구한 일리빈 말인데.”
“예.”
“내 말을 이해했다면 협상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지 그대가 잘 인지했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내 생각이 맞나?”
“이해했습니다. 폐하.”
나는 그의 대답을 끝으로 회의를 마쳤다.
“일리빈은 절대로 그들에게 내주지 않겠습니다.”
**
회의가 끝나고 에린은 쪼르르 내 뒤를 따라왔다.
“이제 좀 쉬려고 하는데 또 무슨 일이냐?”
“잠깐이면 됩니다. 폐하.”
“황궁 자문관이라는 보직이 할 일이 그렇게 없는가? 매번 참여유로워 보이는군.”
“저번처럼 결제가 필요한 문서를 다 가지고 와볼까요?”
에린은 팔을 걷어붙이고 으름장을 놓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문서는 상상만으로도 진저리가 났다.
“음. 내가 말실수를 했군.”
“조심하십시오.”
자리에 앉아 차를 홀짝였다.
“이제 용건을 말해보게나.”
“역시 제가 폐하를 따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삼스럽게 왜 갑자기?”
에린은 생글생글 웃으며 아까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폐하께서 재상을 압도하신 것을 보고 모두 놀란 눈치더군요.”
“그래?”
“저도 좀 놀랐습니다. 칸 제국의 실세인 재상을 상대로 한 치도 밀리지 않으셔서요.”
“자네가 재상을 싫어하는 건 알겠다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우리 편이네.”
“저는 아직 와닿지 않네요.”
“알았다.”
사실 회의실에서 있었던 재상과의 신경전은 전혀 계획에 없었던일이었다.
내 의지가 그랬는지 아니면 카이드로젠의 의지가 그랬는지 헷갈릴 정도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상황을 대처했다.
한껏 도발하는 재상에게 기 싸움을 밀렸다면 황제의 권위가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폐하.”
“응?”
“폐하께서 정신을 잃고 돌아오셨을 때 치유 마법을 걸다가 알았는데 말입니다.”
“응. 뭘?”
“제가 드린 특제 갑옷을 안 입고 계시더라고요? 그거 어디 두셨나요? 혹시 마음에 안 드셔서 버리셨나요?”
“아 그거?”
주먹에 둘둘 감고 결계를 내려치다 보니 부서졌는데?
라고 말하면 그녀가 왠지 실망할 것 같아서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그 갑옷은 제 역할을 다함과 동시에 수명까지 다해버렸다. 장렬히 전사했어.”
“예? 정말요?”
“그래. 자네에게 무척 고마워. 생명의 은인이야.”
“아하하. 요긴하게 쓰였다니 다행이네요. 제가 조만간 새 걸로 준비해보겠습니다.”
“시간 나면 자네가 직접 피아스트 산맥으로 한번 가보는 게 어떤가? 그곳의 난쟁이들솜씨가 아주 대단하던데 말이지. 난쟁이의 제련과 에린의 마력이 합쳐진다면 어떤 진귀한 물건이 탄생할지 벌써 기대가 되는군.”
“아. 그럴까요?”
마지막에 그들과 말없이 헤어져서 마무리가 약간 찝찝하기도 하니, 군수품 거래에 대한 확답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런데 마르코의 얘기로는 저희와 거래할지는 아직 미지수라고 하던데 이번에 가는 김에 제대로 확인해봐야겠습니다.”
“항상 부탁만 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폐하.”
에린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건 그렇고 폐하.”
“또 왜.”
“언제 또 훌쩍 떠나실지 모르니 지금 오신 김에 당장 중요한 행사부터 진행하시지요.”
“행사?”
그녀는 품에 가지고 있던 수첩을 촤라락 펼쳤다.
“불필요한 행사를 최대한 제외하면 남는 것은 단 한 개입니다.”
“무슨 행사냐.”
“마법사 장례식이요. 그거 내일모레로 일정 잡아놨습니다.”
아 맞다.
마법사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러주기로 해놓고 아직도 못 해주고 있었다.
“젠장. 일정이 너무 늦어져서 걱정이군.”
“염려 마십시오. 폐하. 제가 일일이 방문 면담하여 잘 달래놓았습니다.”
“그게 사실인가?”
“당연하죠.”
에린은자랑스럽게 웃어 보였다.
역시! 그녀는 아주 믿음직했다!
“오케이. 수고했다. 그리고 내가 재상에게 미리 일러두겠다. 장례식 후에 그들이 이곳으로 복직할 수 있도록 임명장을 수여하겠다고.”
“잘 생각하셨습니다. 폐하. 그렇게만 된다면 폐하를 따르는 세력을 굳게 결집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얼마 후 에린이 준비한 마법사 장례식이 시작됐다.
추방된 마법사 무리의 우두머리를 자처하고 있는 알렉스와 내게 엄청난 반감을 보였던 멀릭.
그리고 여러 집단의 마법사들까지.
그들은 다행히 에린이 진행하는 행사의 순서대로 얌전히 참여하고 있었다.
폰 재상이 구석에서 이를 탐탁지 않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굳이 나서서 반대하진 않았다.
행사는 에린이 마법사를 호명할 때마다 한 명씩 내 앞으로 와서 서는 것으로 진행됐다.
“미안하고 와줘서 고맙네. 가족 일은 내가 뭐라고 사죄해야 할지 모르겠군.”
“...”
나는 일일이 그들에게 사과하며 악수를 건넸다.
간혹 악수를 무시하는 마법사도 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그들이 이곳에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하아.’
수십 명의 마법사를 마주하며 그들을 관찰하다 보니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카이드로젠에 대한 복수심보다는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들에 대한 슬픔이 가득했다는 것이다.
그 감정을 알아채자 내 마음속은 가시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멀릭 프레드. 앞으로 나와주세요.”
다음 차례는 카이드로젠 때문에 아내를 잃은 비운의 마법사.
멀릭이 내 앞에 섰다.
“미안하네. 멀릭. 와줘서 정말 고맙군.”
“당신을 완전히 용서한 건 아니니까 조심하쇼. 언제 마음이 변해서 목을 졸라 죽여버릴지 모르니 말이오.”
“명심하겠네.”
멀릭은 따가운 눈빛을 쏘아댔지만 나는 그 눈빛이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사죄할 기회를 준 그에게 감사했다.
“다음은 알렉스 머피입니다.”
이번엔 마법사 집단의 우두머리.
알렉스의 차례였다.
“와줘서 고맙네. 알렉스.”
그는 아들을 죽인 원수를 마주한 것치곤 매우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희는 당신에게 쉽지 않은 기회를 드렸습니다. 부디 이 기회를 허투루 사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약속하지. 형용할 수 없는 그대들의 넓은 아량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지켜보겠습니다.”
알렉스를 마지막으로 행사는 끝을 향해 달려갔다.
가슴속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느낌.
나는 단상에 올라 그들을 향해 선포했다.
“오늘 이 시간부로….”
폰 재상은 이마를 감싸 쥐고 있었고 에린은 초롱초롱한 눈빛을 쏘아댔다.
“여기 있는 모든 마법사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직책을 가지고 황실로복직했음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바이네.”
여전히 표정이 어두운 멀릭.
한결 편안한 듯한 느낌의 알렉스.
그리고 각기 다양한 사연을 가진 다른 마법사들까지.
나는 진심을 담아 칸 제국으로 돌아온 그들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지금 내가 가진 뜨거운 감정은 카이드로젠 또한 마찬가지였다.
“태양이 그대를 비추기를!”
이제부터 뜨는 태양은 오로지 그대들의 앞길을 비추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