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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61화 (62/72)



〈 62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61화

급하게 소집한 휴전 협상단.
진작 그들에게 보고를 받았어야 했지만, 정신을 잃고 있었던 탓에 늦게나마 휴전에 관한 내용을 보고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폰 그라츠는 부하들을 이끌고 어기적거리며 나의 부름에 응했다. 그의 얼굴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뾰로통하게 입을 삐쭉 내밀고 있었다.

‘일흔에 가까운 나이로 알고 있는데 표정 한번 깜찍하군.’

어쨌든.
그는 칸 제국에서 경쟁력 있는 연륜을 가진 인물이다.
과거에 취해 사는 술주정뱅이냐.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의 전략가이냐는 그를 사용하는 오로지 나의 능력에 달려있었다.
나는 옆자리에서 폰을 따갑게 째려보는 에린을 무시하고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폰 재상. 여윈 몸을 이끌고 먼 길 다녀오느라 수고 많았네.”
“저보다 폐하께서 더 고생이 많으셨지요. 정신을 잃으셨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정말 괜찮으신지요?”
“물론. 아무 문제 없다.”
“폐하마저 잘못되시는 날엔, 다시는 칸 제국이 두 발로 일어서지 못할 것이옵니다. 제발 부탁이오니 몸을 보석처럼 여기십시오.”
“하하. 폰 재상에게 이렇게 따스한 한마디를 들을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예상외로 그는 호의적인 목소리로 나와 안부를 주고받았다.
에린이 폰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 것과는 달리 그는 내게 어떠한 적대심도 내비치지 않았다.
황제와 신하 간에 통상적으로 있을 법한 평범한 대화였지만, 상대가  재상이라는 거물이었기에 의외의 만족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말입니다.”
“뭐지?”

만족감은 만끽할 새도 없이.
폰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폐하께 휴전 협상 건을 보고드리기 전에 여쭙고 싶은  있습니다.”
“편하게 말해보아라. 황제와 재상의 의사소통은 언제나 중요하지.”
“폐하께서는 아레스의 죽음을 어찌 받아들이시는지요?”

그는 카이드로젠의 아버지에 대한 민감한 주제를 꺼냈다.
갑자기 날아드는 돌직구와 함께….
그는 휘황찬란한 변화구까지 곁들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그의 죽음을 잊으신 건 아니시겠지요?”
“아버지의 죽음을 잊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음. 제가 보기엔 폐하께서 자꾸 겉으로만 빙빙 도시는 것 같아서 여쭤보는 것입니다. 아레스의 죽음을 잊지 않았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는 폐하께서 누구보다  아실 텐데 말입니다.”
“폰 재상님! 그게 무슨 무엄한 발언입니까? 지금 폐하께서 선제의 죽음을 외면한 채 겉으로 빙빙 돌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어허! 황궁 자문관은 가만있게! 지금 황제와 재상의 중요한 의사소통 시간을 방해할 셈인가?”

폰은 에린을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어 보였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분한 마음을 애써 참아냈다.
나는 그의 발언을 들으며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린이 걱정하던  이해가 가는군.’

[폰 그라츠를 조심해야 하옵니다.]

과거 재상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던 에린의 첨언. 그녀는 재상의 이러한 모습을 경계했던 것이다.
확실히 그는 나의 행보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재상은 내가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드나 보군.”
“하하. 제가 어찌 폐하의 뜻에 토를 달겠습니까? 다만 이 늙은이의 노파심이 폐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말이지요.”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속내에 가시를 숨겨 놓은 것처럼 뾰족했다.
당장이라도 그를 쏘아붙일 것처럼 째려보고 있는 에린.
나는 그녀에게 눈짓으로 참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대에게 묻겠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건 재상에게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출함과 동시에 내가 정말 궁금하다는 의사가 섞여 있었다.
진심으로 재상이 말하는 질문의 의도가 궁금했다.
아레스의 죽음을 잊었냐고?
그럼 지금 전쟁이라도 하자는 얘긴가?

“선제의 죽음은 불의의 사고가 아니라….”
“아니라?”
“몇몇 변절자들이 주도한 반란이었습니다. 폐하. 그것을 절대 잊으시면 안 되지요.”

변절자들이 주도한 반란.
내가 아는 한 변절자는 자네스 총독 단 한 명이었다.
이는 소설 속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잘못 알고 있을 염려는 전혀 없었다.
자네스 총독과 에즈만토스 왕국의 페이튼 왕이 결탁하여 합작한 아레스 황제 암살.
 제국 내부에 있던 변절자 자네스는 이미 처단한 지 오래였다.
그것도 카이드로젠으로 빙의하자마자.

“칸 제국 안에는 더 이상의 변절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괜한 의심은 좀 거두었으면 좋겠군.”
“괜한 의심이라니요.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한 것뿐입니다. 폐하.”
“근거는 있나?”
“물증은 없지만 그럴듯한 심증은 있지요.”
“그런  보통 근거라고 부르지 않지.”
“하오나 폐하.”
“심증만 가지고 변절자를 가려내자는 말인가?”
“그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배제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나는 변절자가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없다고 선포하는 것이네.”
“폐하.”
“말 나온 김에 확실히 해두지.  재상.”

회의실의 분위기는 어느덧 황제와 재상의  떨리는 신경전으로 귀추가 주목됐다.
신하들을 둘러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몇몇 신하들은 식은땀을 삐질삐질흘리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초긴장상태에 빠져있었다.

“칸 제국 안에는더 이상의 변절자는 없네. 그러니까 근거 없는 의심은 거두었으면 하는데.”

이 정도 눈치를 줬으면 아무리 재상이라도 더이상 토를 달 명분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변절자는 자네스 총독  한 명뿐이었으니까.

“폐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저도 더이상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네.”
“제가 조심성이 너무 과했나 보군요.”
“나이가 들수록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진다고들 하더군. 젊고 영특한 내 판단을 믿어보게나.”
“예?”
“하하. 잘 못들었나?”

카이드로젠 특유의 오만한 말투에 그는 살짝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아마 재상은 지금 놀라고 있겠지.’

매사에 감정적으로 행동하던 풋내기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자신에게 꼽을 주었으니, 보기 좋게 한 방 먹었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뭐 됐고, 보고나 시작해보게.”

옆에 있는 에린은 이 상황이 통쾌한지 웃음을 참기 위해 얼굴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에즈만토스와 협의한 휴전 협상에 대한 안건을 보고드리겠습니다. 폐하.”

재상은 불편하다는 듯이 미간을 긁으며 살짝 목을 꺾었지만, 금세 자세를 고쳐잡고 보고를 시작했다.

“그래.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가는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조건이 좋지 않습니다.”
“말해보아라.”
“일단 전쟁을 선포한 게 저희 쪽이기 때문에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이는 잉그람 대륙의 모든 나라가 지키고 있는 규율이라 반드시 따라야 하는 상황입니다.”
“배상금이 얼마나 되지?”
“배상금을 명목으로 ‘일리빈’을 요구했습니다.”

일리빈은 칸 제국이 가지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 중의 하나다.
에즈만토스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음과 동시에 릴레나 총사령관이 직접 지키고 있는 지역이 바로 일리빈이다.
일리빈은 협곡에 가까운 험난한 지형으로 여태껏 든든한 천연 요새의 역할을 톡톡히 해오던 곳이다.
그곳을 달라고 하는 것은 칸 제국의 팔을 잘라낸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다.
일리빈을 내주면 칸 제국으로 쳐들어오는 길목이 수십 개로 늘어나게 되니까 말이다.
신하들도 일리빈이라는 지역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반응을 조심스레 경계하고 있었다.

“재상의 생각은 어떤가?”
“하나 더 보고드리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재상은 문서 더미를 품에서 주섬주섬 꺼내더니 탁상 위에 얹어놓았다.

“이것은 제가 휴전 협상을 하는 도중, 제 첩보원이 입수한 에즈만토스 측의 군사 정보입니다.”
“그런가.”

나는 재상이 가져온 문서 더미를 들춰보았다.

“에즈만토스 왕국은 갤러헤드 무역섬과 무기거래를 하고 있더군요.”

갤러헤드 무역섬.
해적들의 대표적인 본거지.
불법으로 무기를 개조하고 거래하며 온갖 뒷돈들이 오가는 무법지.
난쟁이들처럼 사정에 따라서 간혹 거래가 이루어지던 때도 있었지만, 이곳은 보통의 정상적인 나라라면 거래하지 않는 것이 정도였다.
걸핏하면 단가를 올리거나 거래를 아예 파기해버리는 등 전형적인 양아치 집단의 표본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과 엮이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웬만한 동기로는 거래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에즈만토스 왕국이 엮여있다?

“뭔가 꿍꿍이가 있나 보군.”
“맞습니다. 무기거래 대부분의 항목은 저희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일반적인 물건이었지만, 확인되지 않은 품명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뭐지?”

재상은 부하  명에게 손짓했고, 그는 문서 더미에 밑에 깔려있던 푸르스름한 색을  종이를 찾아서 꺼내 들었다.

[팔레토 케논 80문]
[100회 시험사격 완료]
[안정성 문제 발생. 신뢰성 확보 필요]
[현재 구성으로는 반동으로 인한 피로 누적을 견딜 수 없음. 개량 필요]

“팔레토 케논이라.”
“저희 쪽에 정보가 없는 정체불명의 무기입니다. 이것이 어떤 위험을 초래할지, 놈들이 이 무기를 시험사격하는 불순한 의도가 뭔지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재상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확연했다.
에즈만토스 왕국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겉으로는 휴전을 승낙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비밀 무기를 시험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이건….”
“일종의 공성기로 최근에 갤러헤드에서 발명된 최신 무기다. 워낙 거대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탓에 아직 신뢰성이 확보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압도적인 화력으로 공성은 물론 수성에도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물건이지.”
“아…. 그런가요?”
“그래. 저건 재상의 말대로 경계해야 하는 무기임이 확실하다.”
“아아…. 그렇군요.”
“왜 그러지? 내가 말실수라도 했나?”
“아닙니다. 폐하.”

당황하는 눈치의 재상.
단상에서 내려다보니 신하들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로 눈치를 보는 모습이었다.
반응이  이런지 궁금해 에린에게 눈짓을 주자, 잠자코 회의를 관망하던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하고 물었다.

“그게 아니오라 폐하. 그런 자세한 정보는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분명 재상의 보고에 의하면 저희 쪽에 정보가 없는 정체불명의 무기라 하였는데 말입니다.”

아하.
재상이 당황한 것은 이것 때문인가.
별거 아닌 정보였지만 이것만으로도 재상은 나에 대한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나는 그라츠 가문의 사람   명을 지목했다.

“매번 설명하기도 귀찮군.”
“예?”
“내가 누구냐?”
“칸 제국의 황제입니다.”
“잘 아는군. 그럼 이유가 됐으리라 보겠네.”
“송구스럽습니다. 폐하.”
“칸 제국의 황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지. 이 자리를 빌려 자네들도 가슴 속에 깊이 각인하였으면 하네. 아니면 내가 직접 새겨주리?”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는 재상과 당황하는 그라츠 가문의 대신들.
에린은 광대가 승천하여 소리 없이 웃었다.
간혹 카이드로젠 특유의 자의식과잉 화법은 나를 당황하게 한적도 많았지만, 지금처럼 속이 뻥 뚫릴 정도로 시원한 맛을 보여주기도 했다.

“폐하.”
“으응?”
“다행히 폐하께서도 이 무기에 대한 경각심은 저와 같으신 듯하군요.”
“그렇지.”
“방법은 하나입니다. 폐하.”
“뭐지?”

호흡을 가다듬은 재상은 자신의 본심을 힘주어 말했다.

“저희가 먼저 놈들을 쓸어버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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