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60화
“폐하. 정신이 드십니까?”
익숙한 여자의 음성.
이번에는 누구냐?
“폐하.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정신을 차린 나는 이곳 또한 꿈속인 줄 알았다.
“폐하!”
눈을 뜬 곳은 다름 아닌 황제의 침실.
바로 칸 제국의 황궁 안이었기 때문이다.
에린 킨드라는 곁에서 수심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눈을 비비적거리며 생각했다.
나는 분명 피아스트 산맥에서 폭주하다 정신을 잃었고.
정체불명의 가면장수를 만나 꿈속에서 헤맸다.
그리고 지금은 칸 제국의 침실이라니.
“물 좀.”
“예? 폐하. 다시 말씀해주시옵소서!”
“일단 물 좀 줘. 목말라 죽겠으니까.”
“아 예.”
시종은 부리나케 물을 떠서 대령했다.
꿀꺽.
도대체 이게 다 뭐지?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당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이봐. 에린.”
“말씀하십시오. 폐하.”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나.
내가 피아스트 산맥을 구하지 못했다면?
바실리스크를 내버려 두고 나만 극적으로 탈출하여 이곳에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그곳에 있던 난쟁이들은 바실리스크에 썰려 나갔을 것이고, 칸 제국도 안심할 수 없는 위기 상황일 것이다.
“기억이 안 나시는 겁니까. 폐하?”
“그래. 하나도 안 나. 머리가 아주 지끈지끈해. 몸도 끊어져 버릴 것 같고.”
에린은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폐하를 호위하던 마르코가 기절한 폐하를 수레에 태우고 복귀했사옵니다.”
“마르코가? 그가 살아있나?”
“부상이 심각한 상태였지만 다행히 살아있습니다.”
“어디 있지?”
“의원에서 회복 중입니다.”
천만다행이다. 마르코가 살아있다니.
나는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참 다행이군. 마르코는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쳤어.”
“폐하.”
“응?”
에린의 얼굴에는 여전히 수심이 가득했다.
“마르코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 얼른 보고하라. 피아스트 산맥이 어찌 되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니.”
“폐하.”
에린은 간결하게 얘기했다.
“피아스트 산맥에서 날뛰던 바실리스크는 폐하께서 직접 멸종시키셨습니다.”
**
마르코는 바실리스크의 공격에 멀리 튕겨 나가 나뒹굴었다. 땅에 추락하면서 발목은 아예 곤죽이 되어버렸고.
어깨의 살점은 참혹하게 뜯겨나가 피가 멈추질 않았고 정신마저 혼미했다.
이렇게 죽는 건가?
그는 반쯤 포기하고 땅바닥에 아무렇게 널브러져 있었다.
“후우.”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의 마음은 의외로 후련했다.
목표로 한 일을완수했다는 성취감일까.
아니면 순간적으로 분비된 아드레날린 덕분에 기분이 한껏 고양됐기 때문일까.
“하하.”
뭐가 됐든 그에겐 상관없었다.
그저 황제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다는 사실이 기쁠 뿐이었다.
쿠엑! 쿠에엑! 쿠에에엑!
바실리스크의 불쾌한 울음소리에 마르코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과연 폐하께선 무사하실까?
자신이 피로 표시한 바실리스크를 찾아내 파편을 손에 넣으셨을까?
온몸에 느껴지는 통증들이 아프다고 아우성을 질러대고 있었지만, 마르코는 전장의 상황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쿠에엑! 쿠엑!
마르코는 역한 소리가 나는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곳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마르코는 자신이 피로 표시한 바실리스크를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저...저건...”
쿠에에엑! 쿠에엑!
반 이상의 바실리스크가 이미 새빨간 피로 물들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드로젠은 여전히 전투 중이었다.
다행히 그는 다친 곳 하나 없이 전장을 지배 중이었다.
마르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카이드로젠을 바라보았다.
“저게 정말 폐하의 모습인가?”
바실리스크의 입을 두 손으로 잡고 양쪽으로 찢어버리는가 하면.
혓바닥을 뽑아내서 채찍처럼 놈들에게 휘둘렀다.
두개골을 부수고 미친 듯이 웃었으며.
생기가 빠져나간 바실리스크의 몸통을 사정없이 도륙 냈다.
차원이 다른 강함에 지능이 없는 바실리스크조차 본능적으로 도망가기 시작했고, 카이드로젠은 그 뒤를 쫓아 모조리 찢어 죽였다.
“...”
그보다 더 마르코를 당황하게 만든 사실은.
카이드로젠의 눈빛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황제의 눈에는 그저 새까만 눈동자만이 공허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쿠에엑! 쿠엑!
그가 바실리스크를 때려잡는 모습이 통쾌하긴 했지만, 마르코에겐 어딘가 불편한 감정이 동반됐다.
바실리스크를 상대로 전투를 펼친다기보다는 일방적인 폭행.
참혹한 학살의 현장이었다.
마르코는 오히려 바실리스크가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죽어라. 죽어라.”
카이드로젠은 놈들의 가죽을 몇 번이나 자르고 토막 내며 미쳐 날뛰었다.
전의를 잃은 상대로도 무참히 폭격하는 카이드로젠의 광기는 가히 악마 그 자체였다.
아무리 마수를 상대로 한다지만 카이드로젠은 필요 이상으로 과격했고 잔인했다.
“폐하...”
마르코는 위화감이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그가 알던 폐하의 모습이 아닌 것 같아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이건 애초에 자신이 끼어들만한 전투가 아니었다.
그저 학살.
한 인간이 마수를 상대로 한 무자비한 학살이었다.
쿠에에엑! 쿠에엑!
대화산 부근에는 바실리스크의 울음소리만이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그런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마르코는 어느샌가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코제프의 성소였다.
옆에 누워있는 사람은 카이드로젠 황제.
코제프는 마르코에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대로 당장 이곳을 떠나달라고 부탁했다.
괴물들을 처치해준 것은 고맙지만, 그들은 그보다 더 큰 위협을 카이드로젠에게 느꼈던 것이다.
마르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근새근 잠을 자는 황제가 잠에서 깼을 때, 그가 자신이 알던 황제일 것이라고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산양을 내어주십시오.”
마르코는 아직 회복하지 못한 몸을 이끌고 칸 제국을 향해 출발했다.
조금씩 가다 쉬고, 가다 쉬고를 반복하며 그가 칸 제국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카이드로젠이 정신을 잃은 지 일주일이 넘은 시점이었다.
에린은 버선발로 뛰쳐나와 카이드로젠의 상태를 살폈다.
마르코에게 자초지종 설명을 들은 에린은 무언가 짚이는 게 있다는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내가혼자서 놈들을 멸종시켰다고?”
“예. 폐하.”
“무슨 수로?”
“마르코의 보고에 의하면, 폐하께선 광기를 표출하며 일방적으로 그들을 학살했다고 전해왔습니다.”
이런 미친.
내가 정말그랬다고?
뭔가 드문드문 기억이 나는 것 같긴 한데 기억하려 하면 할수록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졌다.
“에린.”
“예. 폐하.”
“물어볼 게 있다. 그 전에.”
“말씀하십시오.”
“그대는 내 편인가?”
너무나도 직설적인 표현.
하지만 나에겐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카이드로젠의 약점.
혹은 치부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단 한 사람.
그와 동시에 내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한 사람만이 이 문제를 가지고 논의할 수 있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저는 언제나 폐하를 모실 것입니다.”
“피아스트 산맥에서 내가 왜 그런 것인지 자네는 알고 있나?”
잉대연에서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하던 나였지만, 그날 있었던 일은 내게 충격을 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내가 내 몸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라니.’
혹시나.
에린이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칸 제국에서 유일하게 내 편에 서서 나를 극진히 따르던 인물.
그녀라면 카이드로젠에 대한 기현상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짚이는 게 있습니다.”
“뭐지?”
“선대 황제님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듣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에린은 카이드로젠의 아버지, 아레스에 관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먼저 에즈만토스 왕국과 관계 개선을 위해 동맹을 추진하던 건은, 아레스님께서 단순히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진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나도 들은 바 있다. 아버지께선 에즈만토스의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캐내서 그들을 정복하시려던 것이 아닌가?”
“그런 이유도 있지만, 그것이 주된 이유는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는 소설의 내용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에린.
“그럼 뭣 때문이지?”
“아레스님은 과거 전쟁 중에 혼돈의 파편에 직격으로 노출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네. 그렇습니다. 미지의 힘을 담고 있는 정수들. 그 알 수 없는 힘에 노출되신 아레스님은 그 날 이후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혼돈의 파편이라고 모두 인간에게 악영향만 끼치는 것은 아니었다.
잉그람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사는 파편의 영향으로 마력을 발현할 수 있는 것처럼, 간혹 인간에게 또 다른 힘을 안겨주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카이드로젠의 아버지, 아레스는 아니었던 것 같다.
“재수 없게 이상한 파편에 노출되셨나 보군.”
에린은 시선을 잠시 떨궜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그럼 아버지께선….”
“선제의 증상은 바로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피아스트 산맥에서 폭주했던 것처럼 아레스도 같은 증상을 보였다는 사실.
이는 내가 소설 속 어디서도 읽어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아버지께서 그런 상태셨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선제께선 자신의 건강을 극비에 부쳤습니다. 심지어 장차 대업을 이어받으실 폐하께도 말이지요.”
“하아. 그런가.”
“원체 무력이 뛰어난 분이셔서 그런지 전쟁 중에 폭주하기 시작하시면 그야말로 한 마리의 야수와 같았습니다. 그 덕분에 전쟁왕이라는 칭호를 얻으시기도했고요.”
아레스.
그리스 신화의 12신 중 하나.
전쟁 신의 이름을 따온 취지에 걸맞게 그는 전쟁왕이라는 수식어로 이름을 떨쳤다.
잉그람 대륙을 호령한 아레스는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싸우고 또 싸웠다.
“다만, 전쟁왕이라는 이름을 당당히 떨치는 것 치고는 선제의 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죽어가셨습니다. 파편의 힘에 의해서…. 몸속에서 차근차근 말이지요.”
“칸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하실 때,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몸은 다 죽어가는 상태였다라.”
“마지막으로 뵌 선제의 모습은 몸속이 모두 썩어버린 것처럼 텅 빈 느낌이었습니다.”
하아.
에린의 이야기를 들으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카이드로젠.
사기적인 재능을 물려받은 재능충인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이상한 가족력을 이어받은 시한폭탄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아오!’
생존을 위한 플랜을 다시 짜야 될 판이다. 원래 계획은 카이드로젠의 깽판을 조기에 차단하고 칸 제국 근처에서 벌어지는 재앙들을 공략하여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었는데.
진짜 중요한 문제는 외부보다 내부에 있었다.
‘카이드로젠 또한 파편의 힘에 잠식당하고 있다.’
파편에 힘에 잠식당한 인간을 고칠 방법은 조기에 치료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직 시간은 어느 정도 남아있으니까.
그리고 칸 제국 외부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이만하면 한동안 마음을 놓아도 될 것이다.
‘마법사 회유, 우트그라드와 동맹, 피아스트 산맥의 괴물 새끼들 처단.’
칸 제국을 위한 급한 불은 얼추 껐다 치고….
이젠 오직 나만을 위해 움직일 시간이다.
“폰 재상은 복귀했나?”
“예. 폐하.”
“당장 이곳으로 부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