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59화
“야 이 뱀 새끼야!”
익숙한 목소리에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이 목소리는 분명.
‘마르코?’
난데없이들리는 마르코의 음성.
마르코는 피난 간 난쟁이를 챙기느라 이곳에 올 여유는 없을 텐데.
왜 그 녀석의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이야아아압!”
이상한 점은 그의 목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급기야 검을 뽑아 들고 바실리스크에 달려드는 모습. 녀석은 말릴 새도 없이 곧장 바실리스크에 몸을 던졌다.
키에에에엑!
“야! 마르코!”
한눈에 봐도 마르코는 바실리스크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힘, 속도, 기술.
무엇하나 바실리스크를 능가하지 못했다.
바실리스크는 어렵지 않게 마르코의 갑옷을 모두 찢어버렸다.
키에에에엑!
“으아아악!”
기세 좋게 달려들었지만, 마르코는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바실리스크는 유리한 자리를 잡고 마르코를 압박했다.
사납게 휘둘러대는 발톱과 과격한 박치기.
마르코는 두들겨 맞기만 하다가 결국.
“끄아아악!”
바실리스크에 어깻죽지를 깨물리고 말았다. 단단히 잡혀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마르코.
그의 어깨에선 바실리스크의 침과 섞인 검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끄으으윽.”
그 와중에 마르코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수비를 포기한 채 바실리스크의 눈알을 향해 검을 힘껏 찔러넣었다.
키에에에엑!
그는 필사적이었다.
자신이 가진 부족한 힘을 메꾸기 위해 목숨을 건 등가교환을 시도했다.
한 손으론 바실리스크의 눈알을 꿰뚫은 검을 쥐고 있었고.
반대쪽 어깨는 바실리스크의 이빨에 씹혀 피가 줄줄 흐르는 것을 애써 참아내고 있었다.
정말 단어 그대로인 육참골단(肉斬骨斷).
자신의 살을 내주고바실리스크의 뼈를취하려는 것이다.
“검을 놓고 거기서 빠져나와!”
누가 먼저 포기하느냐의 싸움.
눈알을 찔린 바실리스크가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었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마르코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그에게외쳤다.
눈알을 찌른 검을 마르코가 놓지 않는다면 바실리스크는 절대 아가리를 벌리지 않을 것이다.
“그거 놓고 나오라니까!”
“폐하.”
마르코는 끝까지 검을 놓지 않고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대체 뭐 하려는 생각이야?
그 한 마리에 집착한다고 승부를 낼 수 있는게 아니라고.
“저는 제 역할을 잘 알고 있습니다.”
초연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얘기하는 마르코. 나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이것이 제가 폐하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입니다.”
마르코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꾸미는 꿍꿍이가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뭐해!”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광경.
마르코는 새빨갛게 물든 손으로 바실리스크의 몸에 피를 덕지덕지 바르고 있었다.
“이 녀석이 바로 폐하가 찾으시는 놈입니다.”
“잠깐! 입 좀 다물어!”
“이래야 이 많은 놈 중에 이 녀석을 알아볼 수 있겠지요.”
키에에에에엑!
눈 깜짝 순간이었다.
바실리스크는 어깨 살점을 완전히 찢어발겼고.
마르코의 몸을 장난감처럼저 멀리 날려 보냈다.
“마르코!!!!”
저 멀리 날아가 버린 몸뚱아리.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마르코의 표정은 한없이 편안해 보였다.
‘젠장.’
충직한 부하인 마르코.
그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다, 해를 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류지상. 이 한심한 자식.
왜 자꾸 실수하는 거냐?
마르코가 왜 여기서 죽어야 하냐.
존재감 없는 엑스트라라고 무시하는 건가?
‘이러고도 네가 잉대연 전문가라고 할 수 있겠냐?’
나는 나를 몹시 자책하며 꾸짖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손발은 부들부들 떨렸다.
거의 다 됐는데.
마지막으로 파편을 분화구 속에다 처박았으면 모든 게 끝인데.
“야 이...”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를 기점으로.
나의 온 세상은 갑자기 새빨개져 버렸다.
“야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바실리스크들은 위협을 감지했는지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갖췄다. 수십 마리의 바실리스크가 사납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으르렁거리면 어쩔 건데.”
나는 전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용기 같은 것이 아니고.
정말 순수하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없어진 것처럼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노가 크면 오히려 덤덤해진다는 것은 이럴 때 하는 말일까.
나는 놈들을 모조리 도륙을 낼 기세로 다가갔다.
푸슉 푸슉
잇몸에 쑤셔 박아버리는 과격한 움직임.
나와 카이드로젠은 그 어떤 순간보다도,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분노하고 있었다.
키에에에엑!
푸슉 푸슉
“죽여버린다.”
푸슉 푸슉 푸슉
키에에엑!
나는 잔인하게 놈들을 도륙 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처음엔 베어지지 않던 놈의 비늘들이 종이쪽처럼 찢어지기 시작했다.
‘이 썩을 자식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인화의 비술을 사용했을 때보다 더 높은 차원의 힘을 뿜어내는 느낌이었다.
‘모조리 죽여버린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놈들을 유린하며 폭주했다.
한 일고여덟 마리 정도 묵사발을 냈을까.
“어? 어?”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
깊은 잠에 빠졌다.
언제 잠에 빠졌는지도 모를 만큼.
그저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느낌만이 내 몸속에 잔존했다.
주변은 온통 새까만 무(無)의 공간이었고, 조그만 골목길만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몸은 내 마음대로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않았고,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족쇄를 찬 것처럼 몹시 무겁고 힘들었다.
‘꿈인가?’
덕분에 내가 서 있는 이곳이 꿈속이라는 것은 인지했지만, 왜 잠에 빠졌는지는 의문이었다.
‘꿈인 걸 알아챘는데도 왜 잠에서 깨지 않는지도 모르겠고.’
걷다 보면 잠에서 깨겠지.
언제 잠에서 깼는지도 모를 만큼 자연스럽게.
나는 몽글거리는 골목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마르코...’
바실리스크의 공격에 멀리 내동댕이 처진 마르코가 과연 살아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의 생사를 확인할 여유는 있었지만, 나와 카이드로젠 모두 폭주하는 바람에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마르코 같은 평범한 등장인물이 바실리스크에 물어뜯겼으니 아무래도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지 않을까?
나는 왜 파편을 놓쳐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그때의 감정이 떠올라 마음속이 다시 부글부글 끓었다.
‘그나저나.’
그건 대체 무슨 힘이었지?
분노로 온 세상이 새빨개진 그 시점부터.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전장을 활보했다.
그 힘의 근원은 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정의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꿈쩍도 하지 않던 바실리스크의 단단한 비늘을 압도하기 시작한 힘.
단순히 아드레날린이 분비돼서 전투력이 올라가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고 보니.’
의외로내게 정보가 부족한 인물이 바로 카이드로젠이었다.
천재적인 검술과 황제라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거물이었지만,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소설의 중후반부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인물.’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부했다.
카이드로젠의 배경은 소설 속 묘사를 통해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고, 더구나 몸을 함께 공유하면서 그가 가진 기억을 내 기억처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놈 머릿속에 든게 없어서 정작 쓸만한 정보는 얼마 없었지만.’
어쨌든.
세상이 새빨개진 그 시점부터 나는 정체불명의 엄청난 힘을 뿜어냈고.
정신을 잃은 채 지금 알 수 없는 공간을 떠돌고 있었다.
“생각이 많으시군요.”
“!”
“폭군 황제 나으리.”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사내. 그는 가면을 쓰고 공중에서 둥둥 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놈의 등장이나 행색은 몹시 낯설고 이질적이었지만, 여긴꿈속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꿈 한번 생생하게 꾸는군.’
“이건 꿈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가면을 쓴 사내는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몸을 흔들거리며 말했다.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나?”
“요호호!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미친놈.
이상한 선문답을 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정상적인 녀석은 아닌 것 같았다.
거기다 가증스러운 웃음소리까지.
누가 요즘 ‘요호호’거리며 웃나?
“저를 따라 웃어보십시오. 이거 은근히 중독된답니다. 요호호!”
분명한 건 놈은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도 꿈속이니 뭐,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광산에서의 모험을 어떠셨는지요? 그 라그나쉬라는 녀석. 정말 오랜 시간 동안 힘을 모으던 특이한 개체였는데.”
“그 녀석은 한주먹거리도 안되더군.”
“요호호. 그랬나요? 하긴 라그나쉬도 거인의 힘과 맞닥뜨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겁니다.”
“칸 제국의 황제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그리고그 결계를 부수는 방법 말입니다. 그렇게 공략하실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습니다. 마력이 담긴 갑옷을 손에 감아서 주먹으로 내려친다니요. 요호호호! 아주 재치가 만점이었습니다.”
그런 것까지 알고 있나?
놈의화법에선 나를 집중하게 만드는 무언의 힘이 느껴졌다.
“코제프와 나겔링. 두 개체를 모두 챙기시는 모습도 확실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황제 폐하 나으리. 그렇게만 하신다면 분명 살아남으실 수 있을 겁니다.”
“뭐라고?”
“살아남으실 수 있을 거라고요.”
순간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이 이것이 꿈속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건 꿈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요호호!”
“넌 대체 누구지? 에린이 보낸 수행원인가?”
아니.
에린이 보낸 수행원일 리가 없었다.
제국의 신하가 나에게 감히 이런 태도를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에린? 아, 그 마법사 말씀이시군요. 당신이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운명을 바꿔놓은 그 개체. 그건 정말 잘하신 선택입니다. 그녀는 꽤나 유능하거든요.”
나는 확신했다.
이건 꿈 따위가 아니다.
놈은 나를 소설 속으로 빙의하게 만든 어떤 시스템의 일환이었다.
“정체를 밝혀라. 내게 접근한 의도가 뭐지?”
“어이쿠. 그렇게 무서운 얼굴은 하지 마십시오.”
“선문답은 집어치워라. 정녕 죽고 싶은 건가?”
“요호호. 예상대로 카이드로젠의 성향이 당신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군요.”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내가 바로 칸 제국의 황제. 카이드로젠이다. 넌 대체 누구지?”
“제가 너무 주제넘게굴었군요. 부디 용서해 주시기를. 저는 그저 미천한 가면 장수일뿐이랍니다. 다양한 장소와 다양한 시간을 오가는 행상인이랄까요.”
마지막 말을 끝으로 놈의 형상이 점차 흐릿해졌다.
나는 급하게 그를 향해 손을 뻗으며 붙잡으려 다가갔다.
“잠깐!”
“요호호! 그럼 전 이만.”
“이거 하나만 대답해다오!”
아무리 앞으로 다가가도 놈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가 뭐지!”
“요호호호. 이거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놈은 마지막 음성을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폐하께서는 아주 잘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