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58화
새삼 카이드로젠이 가진 담대함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 짧은 순간에 코제프를 구하러 갈지, 아니면 그를 내버려 두고 대화산으로 이동할지 결정하는 것은 분명 쉬운 판단이 아니었다.
집 앞 슈퍼마켓에서 어떤 아이스크림을 사먹을지 같은 시시콜콜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를 도와준 거지?’
냉혹한 카이드로젠이 한낱 난쟁이에게 사사로운 정을 느낀 것은 아닐 테고.
그냥 자신의 힘을 과신해서 보여주기식으로?
본인은 칸 제국의 황제니까?
‘그건 말이 안 된다.’
이미 녹초가 된 몸으로 누가 보여주기식으로 위험지역으로 자진해서 들어가겠는가.
그것도 자신의 생명을 걸고.
“후우.”
문득 카이드로젠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잠깐뿐이었다.
‘뭐, 아무튼.’
나도 난쟁이를 구할 생각이었다.
위기의 빠진 나의 전우를 어찌 버리고 갈 수 있으랴.
난쟁이를 구하려는 나의 의지와 일맥상통한 그의 생각에 동조했고, 그 결과.
키에에에에엑!
바실리스크에게 겁나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으아악. 징그러운 자식들.’
키에에엑! 키에엑!
초지일관 불쾌한 울음소리를 내며 광분하는 괴물들. 놈들은 산양의 꽁무니를 금방이라도 덮칠 것처럼 거리를 좁혔다.
파밧
그중 한 마리가 우리에게 덮치기 위해 몸을 날렸다.
위기의 순간.
산양도 이 위험천만만 상황을 인지하고 초인적인 힘을 내고 있었을까.
이 녀석은 감각적인 무빙으로 가까스로 바실리스크의 공격을 흘려냈다.
‘어우야.’
첫 번째로 몸을 날린 바실리스크를 필두로 그 뒤를 따르는 다른 놈들도 줄줄이 몸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엑!
산양의 위치는 어느덧 공격 사정권 안에 들어와 있었고, 먹잇감에 거의 다다른 놈들은 반쯤 미쳐서 환장했다.
‘으아악! 시팔! 그냥 갈 걸 그랬나!’
여기저기 날아드는 놈들은 이를 딱딱거리며 사정없이 발톱을 드러냈다.
당장이라도 산양이 고꾸라져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속 어딘가에선 용기가 샘솟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류지상의 겁에 질린 감정과 카이드로젠의 광기 어린 즐거운 감정이 합쳐져 복잡미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나는 카이드로젠을 생각하며 애써 두려움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칸 제국의 재능충.
위대하신 카이드로젠 황제와함께 있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동안 우트그라드나 광산에서 있었던 위기에 비하면 지금은 상황은 새 발의 피도 안되는 수준이었다.
‘단순히 도망만 가면 되지 않은가.’
나는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여유롭게 입꼬리를 치켜세우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올 테면 와보든지.’
나는산양에 더욱 채찍질을 가하며 속력을 올렸다.
가혹한 환경의피아스트 산맥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단련된 산양은 꽤나 준수한 움직임으로 바실리스크를 따돌렸다.
‘그나저나 코제프는 무사한가?’
그가 있었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보이는 난쟁이 둘.
그들은 산양을 타고 위험지역에서 조심스레 벗어나고 있었다.
다행히 이 단순한 괴물들은 파편을 손에 쥔 내게 정신이 팔려 난쟁이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오케이. 나만 집중하면 된다.’
자질구레하게 신경 쓸 것도 없이 순전히 나 혼자. 코제프가 들으면 서운해할 법한 얘기지만, 사실 그가 없는 것이 내겐 편했다.
코제프는 전투능력이 떨어지다 보니 아무래도 그를 보호하기 위해 손이 많이 가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젠 모래주머니를 벗어던졌다.’
코제프와 나겔링이라는 모래주머니를 양발에 차고 있었는데, 벗어던지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바실리스크에 쫓기고 있는 긴박한 상황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꾸우욱. 꾸우욱.
‘으응?’
갑자기 현저하게 느려진 산양의 속도.
산양은 금방이라도 객사할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대화산에 진입해서 오르막길을 전속력으로 질주했으니, 사실 당장 길바닥에 뻗는다 해도 전혀 이상 할 것 없었다.
“수고했다.”
산양의 역할은 여기까지.
이쯤 되면 차라리 내가 달리는 것이 빠를 정도였다. 산양을 타고 가며 휴식을 취했더니 어느 정도 기력이 회복됐다.
“가자. 우사인볼트.”
나는 산양에서 훌쩍 뛰어내렸고 전속력으로 지면을 치닫기 시작했다.
타다닷
카이드로젠의 대화산 질주.
나는 문득 과거에 우트그라드로 갈 때의 미친 질주가 생각나서 웃음이 지어졌다.
주변의 거슬리는 장애물은 모두 파괴하며 최단거리로 이동했던 카이드로젠. 그땐 이보다 미친놈은 없을 거라고 질색을 했지만, 지금은 그의 미친 주행 방식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었다.
저기 보이는 굵직한 나무 한 그루.
카이드로젠은 비껴갈 생각이 없는 듯 나무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했다.
역시 파괴할 생각인가?
나는 가만히 카이드로젠이 만드는최단거리 주행을 지켜보았다.
“흣차.”
점프해서 나뭇가지 끝자락에 매달린 카이드로젠.
매달린 나뭇가지는 대롱대롱 흔들거렸다.
‘여기서 뭐 하려고?’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놈들의 추격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테고.
나무를 제거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뾰족한 방법이라도 있나?
‘여기 매달려서 대체 뭘 할 생각이지?’
그의 행동에 의문을 가지던 것도 잠시.
다행히 내 의문은 금방 해소됐다.
“허이차!”
카이드로젠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몸을 앞뒤로 흔들더니, 반동을 이용해 앞으로 튀어나갔다.
대포알처럼 날아가는 카이드로젠.
하늘을 나는 속도는 어마어마했다.
‘으아아악! 이 미친 새끼!’
놈은 슈퍼맨 자세를 취하며 하늘 위에서 한껏 포즈를 잡았다.
“후후. 계획대로군.”
뿌듯해하며 하늘 아래를 내려다보는 카이드로젠.
역시 이놈은 미친놈이 틀림없었다.
좋든 싫든 간에 일단 미친놈은 확실하다.
‘누가 이런 식으로 날아갈 생각을 하냐고.’
그것도 슈퍼맨 자세를 취하면서.
‘뭐, 어쨌든.’
덕분에 놈들과 거리를 한껏 벌리는 데 성공했다.
사뿐히 착지해서 도착한 대화산 정상.
봉우리 너머에 이글거리는 분화구가 화산재를 뻐끔뻐끔 뿜어내고 있었다.
‘저기다 파편을 집어던지면 모든 건 끝이다.’
나를 쫓고 있는 바실리스크와의 거리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고, 대화산의 분화구는 코앞에 있었다.
“으하하하하!”
숨길 수 없는 기쁨의 웃음소리.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명언.
승리의 달콤함.
공들인 탑의 웅장한 자태.
칸 제국의 재건.
그리고.
‘카이드로젠의 생명 연장.’
나는 여러 복합적인 생각과 감정을 느끼며 파편을 들어 올렸다.
이제 다 끝이다.
이 빌어먹을 괴물 새끼들아.
“파편과 함께 지옥으로 떨어..”
키에에에에엑!
“크어억!”
그 순간.
바실리스크는 머리통으로 내 몸을 그대로 박아버렸고, 나는 공중에서 몇 바퀴를 회전했다.
‘아뿔싸.’
손에 꼭 쥐고 있던 파편은 저 멀리 바실리스크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공중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는 동안.
대체 어디서 놈이 튀어나왔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건?’
내가 서 있던자리 옆에 생긴 커다란 굴.
놈들은 땅을 파서 지하로도 나를 추격한 것이다.
지상의 적들에 정신이 팔려 지하로도 나를 추격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나의 패착이었다.
“이런뱀 새끼가!!!”
공중에서 회전하는 찰나의 시간 동안.
나는 엄청난 고민에 빠졌다.
파편은 어디로 갔지?
세상 밖에 나와버린 놈들이 파편을 도로 되찾았다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미 무너져버린 광산으로 다시 돌아갈 리도 만무하지 않은가.
그럼 소설 속 이야기대로 피아스트 산맥은 물론이고 칸 제국을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긴가?
‘모두 예측불허한 일이야.’
이렇게 된 이상, 나는 어느 것 하나 장담할 수 없었다.
어느 것 하나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는.
내 지식이 통하지 않는 생짜 배기의 내용으로 소설이 흘러간다는 얘기였다.
세상 밖으로 나와버린 바실리스크.
혼돈의 파편을 통한 증식으로 무한대로 힘을 불리는 재앙 중의 재앙.
상황은 한눈에 봐도 매우 절망적이었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내 몸이 얼른 공중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위대하신 황제 폐하.
나는 카이드로젠 폐하의 업적을 직접 눈에 담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비록 폐하께선 내게 ‘난쟁이를 안전하게피난시켜라.’라는 중대한 업무를 맡기셨지만, 도저히 폐하의 모습이 궁금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저런 일이.’
수십 마리의 바실리스크가 폐하의 뒤를 쫓고 있었고, 폐하께선 용맹하게 그들을 뒤로하고 대화산의 정상을 향해 혈혈단신으로 질주하고 계셨다.
혼자서 그들을 모두 끌고 등반하시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이래서 나까지 안전한 곳에 있으라고 하신 거구나.’
폐하께서 그리신 작전의 규모는 직접 목격하고도 믿기 어려울 만큼 엄청났다.
두근거리는 가슴.
나는 ‘마르코’라는 이름을 폐하께 각인시키고 싶은 열망이 마음속에서 불타올랐다.
저렇게 큰일을 혼자 하시는데, 혹시 내가 도울 일은 없을까?
‘폐하를 따라가자.’
일단 따라가서 눈치를 살살 보기로 마음먹었다.
대화산 정상으로 오신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미리 산 중턱부터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 주효했다.
다행히 바실리스크가 자신을 딱히 노리는 것 같지도 않고.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대화산의 정상까지 올랐다.
“으하하하하!”
폐하께서 내시는 호탕한 웃음소리.
나는 그 웃음소리에 매료되어 나도 모르게 폐하를 따라 웃었다.
“으핫핫! 이렇게 웃는 건가?”
무언가를 손에 쥐고 분화구속에 던지려고 하시는 찰나.
나는 그것이 폐하께서 말씀하시던 혼돈의 파편이라고 생각했다.
“어? 어?”
순간 폐하의 몸은 공중으로 높이 떠올랐고, 손에 쥐고 계시던 물건은 바실리스크 한 마리가 입안에 물었다.
“이런 뱀 새끼가!!!”
극도로 노하신 폐하의 목소리.
직감적으로 이건 폐하의 예상범위 밖의 일이라고 판단했고.
이성보다는 감성이 이끄는 대로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폐하의 옥채와 폐하께서 목숨을 걸고 가져오신 혼돈의 파편.’
둘 중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하게도 혼돈의 파편이었다.
내가 만약 폐하께 다가간다면 폐하께선 분명 나를 ‘폐기 처분’하신다는 것에 내 모든 걸 걸 수도 있었다.
‘혼돈의 파편은.’
바로 저 새끼가 입에 물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호위 무사로 일할 수 있었던 나의 특별한 능력.
그것은 바로 어지러운 와중에도 목표한 상대물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동체 시력이었다.
‘파편을 가져간 건 분명 저놈이다.’
후발대와 섞이긴했지만, 놈은 내가 단단히 점찍어놓았다.
폐하께서 목숨을 걸고 가져오신 혼돈의 파편.
나는 그것을 탈환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야이 뱀 새끼야!”
무(武)를 숭배하는 칸 제국의 검법대로.
그간 갈고 닦아온 검을 바실리스크에 힘껏 찔러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