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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55화 (56/72)



〈 56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55화

[샤루 날 디 페이날로. 그놈의 말 대로군.]

놈은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뿐만이 아니라 수 없는 소리까지 해댔다.
그놈의 말대로라고? 그놈이 누구지?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나?”

[페딕트 닥 아크베이라.]

“머라카노! 점마! 진짜!”
“쉿. 잠시만요.”

[데이사르 키리바. 여기를 떠나라. 두 다리 벌레와 둥근 수염.]

외계어 사이에 드문드문 들리는 인간의 언어.
'둥근 수염'은 코제프를 말하는  같고.
'두 다리 벌레'는 나를 뜻하는 말인가?

“괴물 녀석이 무례하구나.”

[나의 똬리가 풀리는 순간. 분노 또한 주워 담을 수 없을지니.]

감히 나에게 두 다리 벌레라고?
카이드로젠은 자신을 모욕한 괴물 때문에 분노로 꿈틀거렸다.
웃기는 녀석이군.
분노를 주워 담을  없는 건 오히려 카이드로젠이다.

“사람의 언어를 구사할 줄은 몰랐군. 라그나쉬. 그간 세월을 헛으로 먹은  아닌가 보네.”

[아크사 베이날 키르샤.]

“살려달란 말인가?”

[피르사르 베싱파.]

“애원해도 소용없다.”

나는 놈을 향해 거리를 좁혔다.
여전히 똬리를 튼 것처럼 요지부동의 자세로 움직이지 않는 라그나쉬.
녀석의 비늘이 덮이지 않은 부위, 번들거리는 눈알을 향해 검을 가져갔다.

“하압!”

프슥!

놈은 피하지 않고  검격을 그대로 받아냈다.
하지만 내 힘이 놈에게 전달되지 않는 찝찝한 느낌.
내가 찔러넣은 칼은 놈의 눈알을 관통하지 못하고 멈춰섰다.

‘이건 뭐지?’

눈앞에 아른거리는 반투명한 막.
정체불명의 방어막이 놈을 보호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비늘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것은 비늘 위에 덧대어져 2중으로 놈을 보호하고 있었다.

‘결계 같은 거라고 보면 되나?’

벤하트가 놈을 처치할  결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다.
젠장.

‘또 소설  이야기와 다르게 흘러가는군.’

문득 우트그라드 때의 일이 생각났다.
벤하트가 경험한 내용과는 다르게 흘러갔던  마르드의 시험.
혹시 이 라그나쉬라는 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난이도가 다르다는 얘긴가?
나는 혼돈의 파편에 대한 설정을 기억해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혼돈의 파편의 힘은 줄어든다.]

‘그러고 보니 내가 벤하트보다 더 일찍 이곳으로 오긴 했네.’

그 말인즉슨...
벤하트보다 시기적으로 더 일찍 찾아온 나는 혼돈의 파편의 힘이 줄어들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그 차이가 바로 결계의 유무.’

프슥! 프슥! 프슥!

아무리 놈에게 검을 휘둘러봐도 반투명한 결계에 막혀 닿지 않는다.
라그나쉬는 코웃음을 치듯 내 공격을 무던히 구경하고 있었다.

‘아이씨! 뭔데 이거?’

[멤사크 피재나리아. 포기해라.  나의 아들들이 올 것이다.]

아들들?
그건 아마도 잔챙이 바실리스크를 뜻하는 말이겠지.

스르르륵! 스르륵!

“뭔 뾰족한 수가 음나! 놈들이 오고 있다고!”

나겔링이 벌어준 시간은 여기까지다.
자 머리를 굴려라. 류지상.
지금이라도 거인화의 힘을 사용한다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도 있다.
별다른 수 없이 라그나쉬에게 힘을 빼고 있다가는 여기서 다 죽는다!

‘방법은 있다. 통할지는 미지수지만.’

잉대연 전문가 류지상.
나는 실제로 팽팽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두뇌를 풀가동했다.

‘결계는 당연히 마법의 한 종류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결계는 그에 상응하는 마력을 쏟아부어야 무력화할 수 있었다.
그 말은 카이드로젠같이 순수히 무력만을 가진 검사는 혼자만의 힘으로 결계를  수 없다는 이야기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난다면 무력만으로도 깨뜨릴 수 있긴 하지만.’

아무리 카이드로젠이라고 하더라도 상대는 분명 만만찮은 존재였다.
칸 제국의 재앙 중 하나인 바실리스크의 대장. 라그나쉬의 마력을 카이드로젠의 무력만으로 짓누르기에는 현실적으로 벅찬 것이 사실이었다.

‘다른 좋은 방법이 없을까?’

잉대연 세계관에서 순수 무력만을 지닌 검사가 마력이 깃든 결계를 깨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자신의 검에 누군가 마력을 걸어주던가.
아니면 결계를 치고 있는 상대 본체에 누군가가 타격을 주던가.

‘누가  검에 마력을 걸어줄 수도 없고.’

결계로 자신의  전체를 둘러치고 있는 라그나쉬 본체에다가 타격을 줄 방법도 없었다.
처음부터 내게 마력이 깃든 물건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놈에게 타격을 줄 방법이 전무했다.

‘마력이 깃든 물건?’

순간기가 막힌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훌러덩

“야 임마! 니 머하노!”
“이방법밖에 없습니다.”
“갑자기 옷을  벗는데!”

망토의 끈을 풀고 로브를 벗어던졌다.
황제를 상징하는 붉은색의 상의도 땅바닥에 집어 던졌다.
마지막으로 에린이 선물해준  런닝 쪼가리 갑옷도 훌러덩 벗었다.

“맨몸으로 우짤라고!”
“이제부터 이게 제 무기입니다.”

에린의 런닝 쪼가리 갑옷.
신축성이 좋은 덕에 이리저리 쭉쭉 잘 늘어났다.
역시. 이만하면 충분하다.

“믄 생각이고! 이 미친놈아!”

당황하여 고함을 지르는 코제프.
그의 음성은 뒤로하고...
나를 열렬히 따르는 어느 한 부하의 음성이 떠올렸다.

[폐하를 위해 제가 직접 경량화 마법을 걸어놨습니다.]

‘고맙군. 에린.’

분명 에린은 여기 갑옷에다가 마력을 걸어놓았다.
이것을 이용해서 놈에게 내려친다면?

쾅! 쾅! 쾅!

나는 런닝 쪼가리 갑옷을 손에다 칭칭 감고 결계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쾅! 쾅!

“저 저! 미친놈! 칼로도 안 되는데 그게 되겠나!”

쾅! 쾅! 빠지직!

“어! 되네!”

에린이 마력을 불어넣은런닝 쪼가리 갑옷.
이 갑옷의 위력은 지난번 겔미르와 대결을 통해서도 이미 입증한 바 있다.
정통으로 겔미르의 도끼를 맞고도 멀쩡하게 나를 보호해줬던 이 런닝 쪼가리 갑옷.

‘이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군.’

에린이 걸어놓은 마력이라그나쉬의 결계와 만나 거친 상호작용을 일으켰다.
조금씩 금이 가는 결계를 보면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큭큭큭.  뒤졌다.”

카이드로젠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쾅! 쾅! 쾅! 쾅! 빠지지직!

결계 속에서 놈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읽었다.
자신에게 이만큼 위협이 되는 존재는 지금껏 만나본 적이 없을 것이고, 결계를 이런 방식으로 깨부수는 존재 또한 만나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내가 바로 카이드로젠이다.”

빠지지지지직!

마침내 결계는 유리창 깨지듯이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이내 소멸했다.

“어이! 어이! 조심!”

코제프의 외침.
결계 속에서 요지부동의 자세를 고수하던 라그나쉬는 드디어 똬리를 풀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빌라르 아이바피! 빨리! 키르파디아!]

놈이 벌떡 일어서서 공격태세를 취하는 바람에 살짝 뒤로 물러나 거리를 유지했다.

스르르륵! 키에에에엑!

“젠장! 놈들이 왔어!”

코제프는 통로를 손가락질하며외쳤다.
그곳에는 숫자를 헤아릴  없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떼거지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젠장.’

피아스트 산맥의 가장 위험한 존재는사실 라그나쉬가 아닌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잔챙이들이다.
소설  벤하트보다 일찍 광산에 진입했는데도  정도의 숫자인데, 피아스트 산맥에 진입하는 일정이 조금이라도 늦어졌다면 얼마나 숫자가 불어났을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이쪽은 신경 쓰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할끼니까!”
“뭐 어쩌시게요!”
“넌 빨리 저놈을 죽여!”

코제프는 횃불에 불을 붙이고는 떼거지로 몰려오는 바실리스크를 향해 다가갔다.
오른손엔 횃불.
왼손엔 기름이 담긴 작은 물병.

“이런 미친! 그걸로  하시게요!”
“잊었나? 내는 대장장이다이가! 내 한평생 이 불꽃이랑 동고동락했다.”
“그래서요?”
“저 잔챙이 같은 괴물 새끼들한테 장인의 불 솜씨를 보여주지!”

코제프는 위태롭게 불을 들고 나섰다.

“내가 바로 난쟁이의 왕! 코제프 토르강이다!”

챙그랑!

코제프는 왼손에 쥐고 있던 기름병을 악력으로 으스러뜨리곤 그대로 땅바닥에 흩뿌려버렸다.

“들어올라믄 들어와바라!  개라슥들아!”

그대로 불을 지펴버리는 코제프.
불길은 기름과 만나 미친 듯이 솟아올랐다.
불길을 배경으로 악을 쓰는 그의 모습은 마치 불구덩이 속에서 소환된 악마라도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스르륵! 키에에에엑!

자신의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눈이 돌아버린 괴물들. 놈들은 잠시 멈칫하나 싶더니 이윽고 불길을 헤집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으잉!”

작은인간이 만들어낸 불구덩이 하나만으로 그들을 막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흐라아압!  징그러운  새끼들!”

나는 최대한 거인화의 비술을 아끼려고 노력했다.
라그나쉬의 힘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가늠이 안 되니까.
하지만 지금...
나를 위해 코제프가 목숨을 걸려고 하는 모습을 보자, 거인의 힘을 아끼려는 내 의지를 완전히 철회하기로 결심했다.

‘더 아끼다가는 오히려 코제프가 죽겠어.’

[아누 알 린,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라그나쉬는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듯이 뭐라고 궁시렁거렸다.

“그래. 결심했다.”

[목숨을 구걸하진 마라. 제국의 우두머리여.]

“이게 목숨을 구걸하는 걸로 보이나?”

건방 떠는 라그나쉬의 목소리가 몹시 거슬렸다.

“한낱 미물 따위가 칸 제국의 황제에게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구나.”

나는 지체없이 거인화의 비술을 사용했다.
순간적으로 카이드로젠이 표출한 거대한 격이 광산 속에 있는 모든 생물을 관통했다.

키에에엑? 키엑?

[아디크! 페이트라!]

이윽고 내 몸은 거인이 되었고 라그나쉬를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코제프 일단 이리로!”

넋을 놓고 바라보는 코제프에게 손바닥을 건넸다.
깡총하며 올라타는 코제프.

“자신만만한 이유가 이거였나?”
“잠깐 동안만 이 모습을 유지할  있습니다. 일단 나중에 얘기하시지요.”

[페딕트! 카르티나!]

라그나쉬는 아까부터  없는 말을 읊조렸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확실하게 느낄  있었다.

‘놈은 겁에 질렸다.’

나는 황제의 검을 뽑아 놈에게 달려갔다.
나름 전투태세를 갖추고 들이박을 준비를 하는 라그나쉬. 놈은 아직도 상황파악을하고 있었다.

‘결계마저 박살 난 지금, 거인족의 힘을 사용하는 내게 정면으로 맞붙겠다는 거냐?“

나는 놈에게 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그리고 몇 번인지 모를 만큼 다수의 참격.

[꾸에에에에엑!]

놈은 괴상망측한 울음소리를 내며 나가떨어졌다.

’비늘이 단단하긴 하네.‘

몇 번의 검을 휘둘러서 바디에 적중시켰지만 딱딱한 비늘 탓인지, 놈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공격조차도 피해량은 꾸준하게 누적되었다.
라그나쉬의 겉모습은,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으나 놈의 팔다리는 가만히  있기도 힘들어 보일 정도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데피트!  다리 벌레가 어찌 이런 힘을!]

미친놈.
역시 놈은 한낱 미물.
없어져야 할 수많은 마수 중에 한 마리일 뿐이었다.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나를두 다리 벌레라고 부르다니, 어리석기 그지없다.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카이드로젠은 칼집에 검을 집어놓고는 맨손으로 라그나쉬에게 다가갔다.
놈의 모가지를 휘어잡고는 거칠게 바닥으로 내다 꽂아버렸다.

쿠콰쾅!

라그나쉬는 별다른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카이드로젠의 힘에 압도당했다.

쿠쾅!

그리고 이어지는 발길질.

팍! 팍! 팍! 팍!

”싸가지 없는 새끼가! 어디서 감히!“

팍! 팍! 팍!

”날 벌레라고 놀려!“

팍! 팍!

라그나쉬는 잠시 후 숨이 멎었다. 놈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됐다.

”이 양반아! 그만하고! 뒤를 봐!“

코제프의 외침.
나는 뒤를 안 봐도 어떤 상황인지 눈에 그려졌다.
대장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진 바실리스크 무리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아마 다시 정신을 차리고총공세를 나설 것이다.

”코제프! 혼돈의 파편 못 봤어요?“
”아까 점마 자리에 있드라! 으잉? 니 모습이 언제?“

내 모습은 금세 인간으로 돌아왔다.

”너무 무리했나 보군요. 생각보다 일찍 변했습니다.“
”오케이! 암튼! 얼렁 저거 챙기자!“

라그나쉬에게 전력을 다해 힘을 쏟아냈더니 그만큼 거인화 지속시간이 단축된 듯했다.
나는 떨어져 있던 혼돈의 파편을 낚아채고 잔챙이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이제 우짜지!“

키에엑! 키에에에엑!

미친 듯이 포효하는 바실리스크 떼거지들. 놈들은 우리를 향해 거리를 좁혀왔다.

”먼 방법 읍나!“

혼돈의 파편을 손에 쥐었지만, 아직 광산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키에에에엑! 키에에엑!

”먼 방법 읍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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