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53화
코제프는 자신이 맡은 구역인 제3지대로 이동했다.
”저기 보이는구먼.“
그곳에 도착한 그는 보자기를 풀어내며 주섬주섬 장비를 챙겼다. 채광을 나겔링에게 전적으로 맡긴 이후로 꽤나 오랜만에 다시 잡아보는 도구들이었다.
“내 쉐끼덜. 얌전히 잘 있네잉.”
낫과 모종삽을 손에 쥔 코제프.
제련을 전문으로 하는 그에게 이런 도구들은 낯설 법도 했지만,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며 익숙하게 그랩을 쥐었다.
“호오.”
그는 슬슬 자리를 잡고 작전을 시작할 채비를 마쳤다. 광산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어딘가 설레는 기분마저 느껴졌다.
코제프는 스타멜포드를 처음으로 채광해서 으쓱한 표정을 짓던 때가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씨익 미소를 지었다.
‘내 아니었음 니들은 다 굶어 뒤졌다.’
그가 자리 잡은 피아스트 광산지대.
코제프는 이곳을 젖과 꿀이 흐르는 난쟁이들의 낙원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별다른 재주 없이 이리저리 채이던 난쟁이들의 역사는 여기서부터 반전되었다.
“자. 인자 실력발휘 좀 해보까.”
스타멜포드의 기운이 느껴지는 노다지.
그는 입맛을 다시며 조심스레 부위를 매만졌다.
“집중하자잉.”
스타멜포드는 아무 생각 없이 도구를 휘두른다고 뚝딱 나오는 광물이 아니었다.
세심하고 부드럽게.
어린아이를 달래주듯이 살살 보듬어줘야 비로소 실속있는 광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서걱 서걱
조심스레 광물을 긁어내는 코제프.
그와 동시에 그는 귀를 쫑긋 세우고 주위를 경계했다.
부드러운 채광 작업과는 대조적으로 괴물들은 과격하게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괴물들을 첫 번째로 유인해야 하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선, 잠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흐으. 떨리는구만.”
유인도 유인이지만 놈들의 기척이 느껴지면 약속장소까지 빠르게 도망가야 했다.
아무리 바실리스크에 대해 해박한 코제프라 할지라도 혼자힘으로 놈들에게 대항하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쓰읍. 하.”
코제프는 이런 위험한 상황속에서도, 자신을 따르는 난쟁이를 위해이 작전에 참여한 것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영웅 수장 코제프.
브루크 해머 연합의 수장이 직접 만들어내는 피아스트 산맥 구출 작전.
그는 이 작전을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고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후! 하!”
작전을 무사히 수행하기 위해선 코제프와 나겔링의 채광 티키타카가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코제프가 유인을 개시하면 그다음으로 나겔링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코제프와 나겔링이 번갈아 가며 놈들의 동선을 최대한 낭비시키는 것이 포인트였다.
“흐으.”
이론적으로는 놈들을 이리저리 무한정으로 끌고 다니는 게 가능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론적일 뿐이다.
어느 한쪽에서라도 사소한 실수가 발생한다면 그야말로 셀 수 없는 바실리스크에 둘러싸여 개죽음을 당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작전이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모두의 생사가 걸려있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레 썩소가 지어졌다.
“후아.”
코제프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작전을 떠올렸다.
먼저 제3구역에서 본인이 채광을시작한다. 그리고 놈들을 제2구역까지 유인해낸다.
혹여라도 제1구역, 광산 입구까지 유인해낼 수만 있다면 최고의 성과다.
놈들이 여기까지 낭비한 동선만큼 카이드로젠에게 시간을 많이 벌어줄 수 있을 테니까.
‘다음은 나겔링.’
제4구역에 대기하고 있는 나겔링이 광산의 민감한 부위만 골라서 놈들을 다시 깊숙한 곳으로 유인해낸다.
아무래도 아직 개척하지 못한 미지의 공간인 제4구역. 그곳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나겔링에게는 엄청난 리스크가 동반될 것이다.
‘괴물들이 오믄 광산 밖으로 도망갈 퇴로가 막히는 거니까.’
다음은 다시 코제프.
그가 다시 제3구역으로 진입한다.
그곳에서 채광을 시작해 나겔링을 쫓고 있는 놈들의 시선을 분산시켜야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아무리 광산의 지리에 능통한 나겔링이라고 하더라도 괴물들을 피해 달아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쉽지 않을 것이다.
‘잘 되야 될낀데...’
코제프의 역할은 여기까지.
들어왔던 광산의 입구를 통해 다시 밖으로 빠져나간다.
나겔링은 코제프가 시간을 번틈을 타서 광산 깊숙이 전진.
그리고 ‘혼돈의 파편’이 있는 장소에서 카이드로젠과 합류해서 광산을 빠져나온다.
여기까지가 바로 카이드로젠과 합의한 작전이었다.
‘근데 금마들이 뭔 수로 빠져나오노?’
카이드로젠은 무슨 수로 그 깊숙한 광산 속에서 빠져나오겠다는 건지 자세히 말을 해주지 않았다.
본인이 알아서 한다는 카이드로젠의 강한 입김 탓에 굳이 캐묻진 않았다.
어차피 놈이 직접 사지로 들어가는 거니까.
‘그런데 나겔링은 믄 생각이지?’
하지만 나겔링은 무슨 생각으로 카이드로젠의 작전에 동의했는지는 의문이었다.
그가 아는 나겔링은 이런 애매한 작전에 흔쾌히 동의할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카이드로젠 같은 인간에겐 더더욱 말이다.
그런데 그는 이상하게도 카이드로젠의 얘기에 별다른 토도 달지 않고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그기는 진짜 말 그대로 사지인데...’
제4구역은 물론이고.
카이드로젠이 주장하는 혼돈의 파편이 있는 장소.
거기다 라그나쉬라는 보스몹이 기다리고 있는 그곳은 난쟁이들이 한번도 들어가보지 않은, 광산 최고로 깊은 구역이었다.
최고로 깊은 구역이라는 말은 최고로 위험한 구역이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내 빼고 둘이서 먼 얘기를 나눴나?’
코제프는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다.
‘에이씨! 금마는 먼 놈의 비밀이 이리 많은지!’
어찌 됐건 코제프는 자신의 역할에 집중하기로 생각했다.
광산에 대해서는 본인보다 나겔링이 더 전문가니까, 그가 인정할 만한 무언가가 있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스르르륵!
“헛!”
선명하게 들리는 발자국 소리.
코제프는 도구를 허리춤에 챙기며 달아날 준비를 했다.
제2지구로 가는 방향은 바로 이쪽.
발자국 소리는 반대쪽에서 들렸다.
‘어디냐...’
코제프는 달아나기 위해 살살 눈치를 봤다.
스르르르르륵!
“으어어어억!”
**
코제프는 갑자기 뒤에서 들이닥친 손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머꼬! 니는!”
“조용히!”
그는 나겔링이었다.
“니가 왜 여깄노?”
“얘기는 밖에 나가서 하지.”
“아니! 니가 왜 여깄냐고! 이 양반아!”
코제프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겔링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작전대로라면 나겔링이 제4구역에서 바통을 이어 받아야 하는데...대체 왜 본인이 있는 제3구역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니...”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뭐가 당연해?”
“거길 가면 개죽음 당할 게 뻔한데 내가 거길 왜 가나!”
“므라고? 니 이새끼가!”
키에에에엑!
바실리스크가 다가오는 소리에 나겔링은 냅다 출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젠장! 얘기는 나중에 하지!”
스타멜포드가 존재하지 않는 제2구역까지만 가도 괴물 놈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나겔링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응?’
그는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낯선 위화감을 느꼈다.
뒤를 돌아본 나겔링은 우두커니 바실리스크를 마주하고 있는 코제프를 발견했다.
“이...이봐...”
바실리스크를 앞에 두고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코제프.
그는 손도끼를 손에 쥐고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자네 미쳤어?”
“가던 길 가라.”
“뭐 하는 거야? 빨리 이리와.”
“닥치고 가던 길 가라고.”
코제프는 서늘한 목소리로 나겔링에게 엄포를 놓았다.
“내겐 다 생각이 있다고. 친구.”
“납득 할만하게 말해라.”
“일단 나가서 하자니까!”
“할 말 없지?”
“...”
“넌 배신자 새끼일 뿐이야.”
바실리스크는 당장이라도 코제프에게 달려들 것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놈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너도 알잖아. 제발.”
지금은 한 마리밖에 없었지만, 이 한 마리가 얼마나 많은 동료를 불러모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놈들에게 포위당해버리는 것이 당연지사.
“제발. 코제프. 천천히 이쪽으로 와.”
나겔링은 애원하다시피 코제프에게 빌었다.
“...”
“그럼 저놈도 물러날 거야. 넌 지금 스타멜포드도 들고 있지 않으니까.”
“야. 새꺄.”
무미건조하게 내뱉는 코제프의 음성.
“마지막으로 묻는다.”
코제프는 나겔링을 등 진 채로 말했다.
“대체 니가 왜 여깄는데?”
“그건...”
“배신한 거 맞제?”
코제프가 던진 질문은 나겔링의 가슴에화살처럼 박혔다.
“카이드로젠을 배신한 거 맞제?”
“난...단한번도 놈을 믿는 적이 없어.”
“카이드로젠은 널 믿었는데. 나도 널 믿었고.”
“...”
스르르륵! 키에에엑!
바실리스크는 코뿔소처럼 돌진했다.
그들의 공격 패턴을 알고 있는 코제프와 나겔링은 가까스로 공격을 회피했다.
“그곳으로 가면 개죽음인 거 자네도 알지 않나!”
“그럼 어쩔 셈인데? 카이드로젠은 우짤낀데!”
“놈의 말대로 괴물들을 모두 처치하면 좋은 거고!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지! 나처럼 이곳을 떠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쿠콰콰쾅
“니 진심이가? 그 말?”
“그럼 진심이지.”
“이 버러지 같은새끼!
키에에에엑!
쿠쿵! 쿵!
바실리스크는 본격적으로 진동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여긴 곧 괴물들로 가득 찰 거야! 제발 나가서 얘기하지!“
”니한테 진심으로 실망했다.“
”냉정하게 생각해. 이런 무모한 작전은 처음부터 비현실적이었어!“
”말 걸지 마라! 이 버러지 자슥아!“
코제프는 갑자기 방향을 꺾었다.
그곳은 광산 깊숙이 내려가는 지름길이 있는 통로.
”이봐! 어디 가는 건가!“
”어디 가긴새꺄! 내가 네 놈 역할을 하러 들어가야지 뭐!“
”잠깐만! 안돼!“
나겔링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코제프는 수레와 함께 시커먼 굴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아니. 무슨 2분도 못 벌었어.’
바실리스크들은 잠시 없어지는가 싶더니 금세 다시 내 주변에 모여들었다.
분명 난쟁이들이 뭔가 일을 하긴 한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생각보다 너무 짧게 벌어준 시간 탓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고작 2분 만에 나더러 뭘 하라고.’
스르르륵! 키에에엑!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수의 바실리스크 떼거지.
여차하면 거인화의 비술을 사용해서 여기서 탈출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 말은 곧 피아스트 산맥 구출 작전이 실패한다는 뜻이기도 하지.’
10분 남짓한거인의 힘으론 여기 있는 모든 바실리스크를 때려잡기는커녕, 살기 위해 도망치기에도 빡빡한 시간이었다.
키에에에에엑!
놈들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젠장!’
해볼 수 있는 데까진 해보자는 심정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일단 거인의 힘은 최대한 아끼는 것이 목표. 카이드로젠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기세 좋게 고함을 질러댔다.
”와라! 이 괴물 자식들아!“
우당탕탕탕! 쿵쾅!
그 순간 요란하게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에 나는 물론이고 괴물들의 시선까지 그곳으로 움직였다.
‘저건 뭐지?”
흙무더기를 흠뻑 뒤집어쓴 수레에서 난쟁이의 형상이 꿈틀거렸다.
’으잉?‘
일어선 난쟁이는 바로 코제프.
그는 늠름하게 일어서서 나를 응시했다.
”구하러 와줬군요!“
”아니. 나도 갇혔어.“
뭐지? 장난치는 건가?
표정으로 봐선 장난치는 것 같진 않은데.
”여긴왜 왔어요?“
코제프는 총총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여긴 왜 왔냐구요?“
”문제가 생깄다.“
”무슨 문제요?“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있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다!“
”말 안 해줄 거예요?“
”구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