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52화
코제프를 덮친 정체불명의 검은 물체.
그것의 정체는 전혀 생각조차 못 한 예상 밖의 것이었다.
"아야야야. 좀 비켜보게."
코제프를 지지대 삼아 일어서는 난쟁이 한 명. 그는 바퀴가 달린 보드를 집어 들며 멋쩍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낯익은 얼굴에 얼어있던 긴장감이 사르르 흘러내렸다.
"아이! 이 새끼 이거! 일부러 이렇게 등장하나!"
꽥하고 소리를 지르는 코제프.
그는 친한 친구의 품에 와락 달려들며 옷을 잡아당겼다.
“왜 이제 왔어!”
"왜 이렇게 오버하나? 좀 떨어져 보게."
"이 빌어먹을 자식!"
"내가 빌어먹을 자식이라니! 어허!"
"이 보드는 어디서 난기고?"
"우리 채광조합은 이걸 계속 타고 다닌다네. 자네는 관심이 없어서 몰랐겠지만."
"난 제련하느라 바빴다이가! 아 그건 됐고! 우리가 네 놈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제!"
"늦은 줄 알고 최대한 빠르게 온 거니까 다행으로 여기게."
"왜 늦었어? 이 자슥아!"
서프라이즈로 등장한 인물은 바로 나겔링 소르만. 그는 코제프를 밀어내며 내게 눈인사를 했다.
"늦은 건 미안하다. 고민이 좀 많았어."
"이런 중요한 날에 이 자슥이 디질라고!"
"그런데 네 놈이 이렇게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놈인 줄은 몰랐군."
“므라고?”
“자네 별명이 있지 않은가?”
“뭔데!”
”지각왕 코제프."
"닥쳐!"
만나자마자 투닥거리는 난쟁이들.
나겔링의 합류에 자연스레 미소에 지어졌다. 채광이라는 분야에 있어선 프로 중의 프로. 누가 뭐래도 이 작전에서 대체 불가한 자원이다.
'다행히 시간을 10분 이상 벌 수 있겠어.'
나겔링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시간이 남아서 들른 것뿐이네."
그의 대답에 빙긋 미소를 지으며 웃음으로 환영했다.
"하이고. 쇼를 해라 쇼를."
"회포는 나가서 푸시죠. 작전은 빨리 시작할수록 좋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점마한테 함 설명해주라."
"그만큼 바실리스크가 덜 증식하게 될 테니까요. 지금도 놈들의 숫자는 불어나고 있습니다."
"근데 이 모질이 자슥이 지각을 해? 야이 정신 나간 놈아."
"아오! 미안하네! 이 양반아!"
나겔링은 연장을 챙기며 의욕적인 모습으로 나섰다.
"당장 시작하지. 혹시 우리가 나눈 계획에서 변동사항이 있나?"
"당신이 안 온 것만 빼곤 없었습니다."
"그럼 지금까진 계획대로란 말이군."
"맞습니다. 두 분이서 돌아가며 놈들을 유인해주세요. 목표는 15분입니다."
"15분? 아주 늑늑하네!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안 글나?"
"후우. 최대한 힘써보겠네."
나겔링의 표정이 어딘가 찝찝해 보였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분명 대의를 앞두고 긴장한 탓이리라.
나는 코제프와 나겔링의 손을 맞대고 건투를 빌었다.
"무사히 나가서 봅시다."
**
제3지구를 빠져나와 어느새 도착한 제4지구. 그리고 다음 정착지인 라그나쉬가 있는 곳으로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광활하다는 표현이 정확할 만큼 굴의 크기는어마어마했다.
처음과 달라진 환경에 당장 머릿속에 든 생각은.
'편하다.'
이제서야 구부정한 자세가 아닌 허리를 꼿꼿이 편 자세로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더구나 다행인 점은.
'중간에 방해꾼들이 없어서 좋네.'
제4지구를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바실리스크.
어쩌면 라그나쉬가 있는 곳까지 무혈입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돈의 파편을 지키고 있는 라그나쉬.
아무리 내가 힘의 우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놈은 바실리스크의 대장 격인 우두머리였다.
가능한 힘을 아낀 채로 놈과 맞닥뜨리는 것이 내겐 무엇보다 중요했다.
'아차.'
나는 불현듯 이 상황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애니메이션을 보면 그런 상황이 있지 않은가.
주인공이 '해치웠나?'라는 대사를 하면 백 퍼센트의 확률로 적은 살아있는 경우 말이다. 꼭 이런 생각을 하면 생각과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프스스슥! 프스스스슥!
“젠장.”
역시는 역시인가?
불쾌한 발자국 소리. 처음 듣는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리는 단번에 바실리스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사각을 없애기 위해 벽 쪽으로 등을 기댄 채 주위를 노려보았다.
'어딨지?“
프스스슥! 프스스스슥!
불쾌한 발자국 소리는 조금씩 거리를 좁히며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바실리스크의 형체는 찾을수 없었다.
'나와라.'
선명하게 들리던 발자국소리는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상황을 파악했다.
'그냥 지나갔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의시간이 이어졌다.
침묵을 깨고 발걸음을 다시 한 발자국 옮길 무렵.
푸후하악!
순간 뒤쪽에서 벽이 허물어지며 튀어나오는 날카로운 발톱.
"으앗."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여 간신히 공격을 회피했다. 카이드로젠의 괴물 같은 반사신경으로 자세를 낮춘 것이 주요했다.
스르르륵. 스르륵.
'등장했구나.'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바실리스크.
놈은 메스꺼운 악취를 뿜어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크기로 보아 성장이 끝난 완전체의 바실리스크였다. 소설 속 묘사 그대로 아주 불쾌하기 짝이 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입 밖으로 삐져나온 송곳니는 치명적인 독으로 양껏 버무려져 있었다.]
[초록빛의 비늘은 아무리 날카로운 검이라도 꿰뚫지 못했다.]
[마치 공룡과도 같은 완력에 인간들은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몇 가지 소설 속 표현들이 떠올랐다. 당장 생각나는 표현 외에도 다양한 묘사들이 있었지만. 놈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참 못생겼다.'
높은 열기와 탁한 공기가 가득한 환경 때문인지. 바실리스크의 생김새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밖에 나갈 일이 없다 보니 외모가 자연스레 퇴화해버린 건가.
'아무튼.'
시덥잖은 잡생각은 이쯤하고 놈과의 대결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소설 속 묘사를 떠올리자.'
놈에 대한 정보는 이미 머릿속에 속속들이 박혀있었다. 바실리스크의 공격 패턴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먹잇감을 향해 무식할 정도로 돌진하여 박아버리는 것. 나를 노려보던 놈은 예상대로 내게 일직선으로 몸을 내던졌다.
쿠콰콰과광
"흣차."
술에 취한 운전기사마냥 벽을 냅다 들이박은 바실리스크. 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어나서 내게 다시 달려들 준비를 마쳤다.
파박! 파박! 스르르륵!
살벌하게 달려드는 바실리스크.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뒷발을 고정한 채 놈이 오길 기다렸다.
스륵! 스륵! 키에에에에엑!
괴상망칙한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는 바실리스크. 가볍게 흘려버릴 수도 있었지만 나는 놈의박치기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무지막지하게 밀고 들어오는 괴력에 온몸에 충격이 퍼져나갔다. 나는 놈의 머리통을 발길질해버린 후 검으로 턱을 그어버렸다.
끼에에엑! 끼에에에엑!
다시 한번 돌진하는 놈을 향해 검으로 잇몸을 그었다. 두터운 비늘을 피해 날카롭게 파고 들어간 검격. 놈은 한결같이 기분나쁜 비명을 질러대며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키에에엑! 키에엑!
몸부림치나 싶더니 금세 일어나서 다시 달려드는 바실리스크. 놈은 고집스럽게 박치기 공격을 시도하며 일정한 패턴을 보였다.
놈이 박치기라는 단순한 공격만을 계속해서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놈의 지능 자체가 떨어지는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동료들을 부르기 위함이지.'
박치기를 통해 상대가 쓰러지면 좋은 거고.
공격이 빗나가면 광활한 광산 내부에 진동을 울려 동료들을 결집한다. 이것이 바실리스크 들이 가지는 일정한 공격 패턴이었다.
'그냥 그 괴상한 울음소리로 동료들을 부르면 될 텐데.'
그러지 않는 이유는 아무래도 지능이 떨어져서? 아니면 선천적으로 청력이 매우 좋지 않아서 그런 듯했다. 놈은 고집스럽게 박치기를 통해 동료들에게 신호를 주려 했다.
키에에엑!
다시 한번 놈의 잇몸에 검을 쑤셔 박았다.
강철같은 비늘이 덮여있지 않은 속살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었다. 고통스럽게 울음을 토해내는 바실리스크. 놈은 피를 토해내며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에는 섣불리 내게 달려들지 않고무언가를 준비하는 듯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슬슬 두 번째 패턴이 나올 차롄가.'
놈들은 상대가 강하다 싶으면 다음 페이즈로 넘어간다.
두 번째 공격 패턴.
그것은 체내의 있는 독구름을 뿜어내 상대를 중독시키는 기술이다. 바실리스크의 독에 중독된 인간들은 온몸의 신경세포가 말라비틀어져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아무리 카이드로젠이라도 생화학 공격에 있어선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변수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빠르게 끝내버리면 된다.'
촤아아아악!
독구름 공격에 대항할 수있는 최단시간 공략법. 그것은 독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전에 놈을 완전히 도륙을 내버리는 것이다. 나는 한달음에 놈의앞으로 다가가서 칼날을 쑤셔 넣었다.
끼에에에에엑!
두터운 비늘이 덮여있지 않은 비교적 부드러운 부위. 놈의 얼굴 근처에는 비늘이 얇거나 거의 없어서 나의 칼날을 막아낼 수 없었다. 춤을 추듯 무참히 썰어버리는 카이드로젠의 검격.
끼에에엑! 키에엑!
놈은 살갗을 뚫고 들어오는 칼날에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쩍하고 벌린 아가리에선 놈이 준비하던 독구름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슬슬 마무리해볼까.'
아무리 소량의 독이라도 조심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죽기 전 마지막 필살기를 준비하는 바실리스크. 놈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리기 위해선 최후의 일격이 필요했다.
"스읍!"
승부를 매듭짓기 위해선 긴 시간도 필요 없다. 숨을 크게 들이마셔 호흡을 멈춘 뒤 놈의 아가리 속으로 칼날을 꽂아 넣었다.
키이이익! 투두둑!
힘없이 쓰러지는 바실리스크.
역시나 놈의 공격 패턴이나 약점들은 모두 내 손바닥 안이었다.
'쉽다 쉬워.'
가볍게 바실리스크 한 마리를 처치하고 잔해물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완전 걸레짝이 돼버린 바람에 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져 버렸다. 너무 잔인했나 싶기도 하지만 마수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낄 시간 따윈 없었다.
'오케이. 전진하자.'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속전속결로 라그나쉬까지 제압한다. 지금까진 모든 계획이 순조로웠다.
스르르르르륵!
스르르르륵! 키에엑!
"응?“
키에에에엑! 스르륵! 스르륵!
언제 등장했는지도 모를 만큼 다수의 바실리스크가 내 주위를 둘러쌌다.
숫자는 어림잡아 세어봐도 10마리가 족히 넘는 숫자.
'이..이건 너무 많은데?'
널찍하게 느껴졌던 굴속은 어느새 바실리스크로 가득 차버렸다.
아무래도 방금전 도륙 난 바실리스크의 신호에 따라 동료들이 들이닥친 듯했다.
한 명의 인간을 잡아먹기 위해 으르렁거리며 주위를 서성이는 괴물들. 이 상황은 흡사 콜로세움에 내던져진 중세 검투사가 된 느낌이었다.
'침착하자. 놈들의 공격 패턴은 일정하니까.'
어찌 됐든 상황을타개하기 위해선 몸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나는 다시 칼날을 놈들에게 겨누며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을 대비했다. 아무리 카이드로젠이라도 광산 속에서 놈들에게 둘러싸이면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지금 보이는 10마리 남짓한 숫자가 다가 아니다. 놈들이 광산을 흔들며 진동을 울린다면 피아스트 산맥의 모든 바실리스크가 등장해도 이상 할 것이 없었다.
스르르륵! 키에엑! 키에엑!
첫 번째 공격 패턴은 박치기.
놈들은 성난 황소처럼 내게 돌진했다.
'이런 상황이 올 것을 대비해서 생각해둔 긴급 작전이 있지.'
놈들과 정면승부를 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혹시나 이런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미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그래서인지 미리 짜여진 알고리즘처럼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하압!"
타다다닷
작전은 바로 라그나쉬가 있는 장소까지 전력으로 도망가는 것.
나는 냅다 놈들의 사이사이를 요리조리 움직이며 광산 깊숙한 곳을 향해 질주했다.
키에에엑? 키에에엑!
내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동요하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는 바실리스크들.
기분 탓인진 모르겠지만 놈들은 나의 줄행랑이 너무 빨라서 당황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 덕에 나는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채 달려나갔다.
'뭔가 폼은 안나지만.'
광산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는 아무리 카이드로젠이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박치기 공격을 순진하게 흘려보냈다가는놈들의 숫자가 10마리에서 30마리. 30마리가 100마리로 늘어나는 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그래. 이게 맞지.'
그들에게서 달아나는 것은 단순히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전략적인 움직임이었다.
"코제프! 나겔링! 일 좀 해라!"
나는 외마디 외침과함께 등 뒤에서 물밀 듯이 밀려오는 바실리스크를 피해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