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46화
난쟁이들이 사용하는 입구답지 않은 아주 커다란 입구였다. 임시로 만들어둔 대문짝은 목조비계에 둘러싸여 매우 조악스러웠다.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화벽과 지저분하게 얼룩을 남긴 빗물 자국들.
늘어지게 자라난 담쟁이덩굴들은 광산이 얼마나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괴물들이 마음만 먹으면 이쪽으로 죄다 튀어나오겠군요.“
"글치."
"자, 안으로 들어가 보시죠."
"잠깐만."
코제프는 내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광산을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은 단 두 명뿐이다. 누군지는 말 안 해도 알겠제?"
"연합의 두 수장. 당신과 나겔링이겠죠 뭐."
"잘 아네. 우리 두 명의 허가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긴데...니는 특별히 나겔링의 허가 없이 가는기다. 금마는 보나 마나 허가 안 해줄게 뻔해서리."
"예 예. 고맙습니다."
"알다시피 여긴 절라게 위험한 곳이다. 그니까 진짜 조심해야 한다. 알겠나?"
"예."
"아무것도 만지지 말고, 아무것도 누르지 마라."
"예 예."
"숨도 쉬지 말고."
"아 예. 예?"
"그만큼 조심하란 얘기다. 자슥아."
코제프는 철문을 열며 조심스레 광산으로 진입했다. 입구를 얼마 지나지 않아 느낀 광산 내부 풍경에 대한 첫인상은.
'좁다.'
말 그대로 정말 좁디좁은 굴이었다.
난쟁이인 피아스트 인들이 통행하는 굴답게 공간이 매우 협소했다.
자연스레 곱추가 된 허리는 시작부터 불편하다고 아우성을 질러댔다.
축축하고 핏내 비슷한 강철의 냄새가 굴 전체를 진동해 숨쉬기까지 어려웠다.
아장거리는 코제프의 뒤를 따라 구부정한 자세로 얼마나 기어갔을까.
잠시 후 마침내 널찍한 장소에 다다를 수 있었다.
"자! 요가(여기가) 바로 광산 제1지구! 우리 난쟁이들의 첫 번째 개척지다!“
가까스로허리를 펴고 코제프의 등 뒤에 펼쳐진 광산을감상했다.
"와우."
꽤나 웅장한 광경이었다.
상감 세공한 밝은 목제의 망치 장식이 복도를 따라 전시되어 세련된 디자인을 뽐냈다. 문고리는 눈을 부릅뜬 산양의 머리 모양이었는데 주둥이가 놋쇠 고리를 물고 있었다.
바닥에는 자갈길이 쭉 깔려있었고 그 길을 따라 바위들이 질서정연하게 파여있었다.
광산의 내부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의외로 깔끔한 인테리어를 가진 제1지구였다.
"우리가 직접 다 땅을 파내고 길을 닦으면서 개척한 곳이다!"
"역시 광부의 나라답습니다."
"크흐흐하핫! 그렇지! 그렇지!"
코제프의 자랑스러운 외침에 맞장구를 쳐주니 몹시 만족해하는 모습이었다.
"제2지구는 저기 보이는 굴로 들어가면 나온다!"
"바로 출발하시죠."
"안 쉬어도 되겠나?"
"놀러 온 것도 아닌데요. 후딱 보고 나가시죠."
"크흐학학학! 그래! 가자! 가자!"
터더덕!
코제프와 나는 순간 얼음이 되며 청각을 곤두세웠다.
"므고? 방금 무슨 소리 안 났나?"
"저도 들었습니다."
정체불명의 소리. 분명 굴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광산 안에 아무도 없는 건 확실하죠?"
"당연하지. 요새는 들어가라 캐도 안 들어가는데."
"그럼 이 소리는 대체.."
"에이 설마. 바실리스크들은 주로 제3지구에서부터 출현한다고.“
터더더덕!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들리는 발자국 소리. 코제프는 제2지구와 통해있는 굴을 향해 얼굴을 들이댔다.
"조용."
잠시 정적.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검지손가락을 입에 올렸다. 잠시 후 아까보다 더 크게 울리는 소리.
터더더더더덕!
"으아아아아아악!"
터더더더더더덕!
"으아아아아악!"
코제프는 냅다 비명을 지르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칼자루를 향해 자연스레 손을 얹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진짜 바실리스큰가?'
정말 바실리스크가 등장한 것이라면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1초 만에 상황판단을 끝낸 뒤 그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판단은 간단하다.
놈을 단칼에 베고 광산 밖으로 나간다.
"제 뒤로 오세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코제프를 내 등 뒤로 위치시켰다.
지금 상황에선 코제프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그가 만약 다치기라도 한다면 어떤 난쟁이들도 나를 도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후우우우!"
"제 뒤에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허억! 허억! 설마 이까지(여기까지) 활동반경을 뻗친기가?"
"그럴 수도 있죠."
제2지구로 가는 굴을 쳐다보며 몹시 당황한 기색의 코제프.
아무래도 부하들 없이 홀로 바실리스크와 맞서기에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듯했다.
"걱정 마세요. 전 칸 제국의 황제입니다."
"그기 무시라꼬(뭐라고) 걱정말라카노 자슥!"
퉁명스러운 말투와는 다르게 내 뒤에 얌전히 숨어있는 코제프. 굴속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정체불명의 소리의 근원지를 파악하려 노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산스럽게 들리던 발자국 소리는 어느새 종적을 감춘 듯 잠잠했다.
"가..간기가?"
잠깐 동안의 고요한 침묵을 깨고 코제프가 한마디 내뱉었다.
"제가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놈이 나오지 않는다면 내가 찾아간다. 나는 굴이 있는 위치로 살금살금 다가가서 자세를 낮췄다.
터더덕!
"으아아아악!"
굴속으로 몸을 기울인 순간 뒤쪽에서 코제프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엄청난 공포를 마주한 듯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
광산 속에서 그를 이렇게나 놀라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래도 바실리스크밖에 없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일임을 감지하고 검을 뽑아내며 시선을 뒤로 옮겼다.
채앵!
"코제프! 어서 제 뒤로!"
"니..니는?"
눈 앞에 펼쳐진 그림은 매우 뜻밖의 광경이었다.
바실리스크가 아닌 웬 난쟁이 한 명과 뒹굴고 있는 코제프.
"야 이 미친 자식아! 내가 절대 광산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잖아!"
"하이고! 놀래라! 반갑다! 내 오랜 친구!"
"인사는 집어치워! 이 머저리!"
"아! 아야!"
정체불명의 소리의주인공은 다름 아닌 어느 한 난쟁이의 발소리였다.
코제프와 유독 친해 보이는 이 난쟁이는 그를 향해 거침없이 쓴소리를 뱉어냈다.
"네 놈이 왜 여기 들어와 있는 건가!"
"그러는 니는 요기 와 있는데?"
"괴물들이 주거지역으로 나오면 어쩔건가! 네 놈이 책임질 수 있을 것 같나?"
"진정 좀 해, 이 양반아! 나도 바실리스크를 사냥해본 적이 있다고!"
"뒤에서 구경만 하는 걸 사냥이라고 말하진 않아, 이 멍청한 놈아!"
"에헤이! 내가 언제 구경만 했나!"
"맞잖아. 이 자식아!"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이 바실리스크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검을 칼집으로 집어넣었다.
나를 향해 처량한 눈빛으로 도와달라는 신호를 쏘아대는 코제프.
나는 짐짓 모르는 척 먼 산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아무 말이라도 해보시지!"
"자, 자 이 양반아! 보는 눈도 많으니 이쯤 하자고!"
"보는 눈이 뭐가 많나? 저기 멀대같은 인간 딱 한 명뿐인데."
"에헤이! 일단 소개라도 시켜줄 테니 이 멱살 좀 놔봐!"
코제프의 외침에 그들은 겨우 진정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는 헝클어진 머플러를 정리하며 나와 난쟁이의 사이에 척하고 섰다.
"와나 자슥. 성질머리하고는."
"시끄러워."
"자! 아무튼! 느그들 초면이제? 야는 칸 제국의 황제. 카이드로젠이라는 친구다."
"듣긴 들었다."
"그리고 여기는 바로.."
"나겔링 맞으시죠?"
"허이고! 우째 알았노?"
내가 나겔링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코제프는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반응했다.
"광산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인물은 딱 두 명. 당신과 나겔링뿐이죠."
"글킨 하지! 짜슥! 예리한데."
"당연한 건데 뭐가 예리한가? 덜떨어진 소리는 좀 지양해주게."
"말이 좀 심하다! 이 친구야!"
나겔링은 코제프의 말을 무시하고 나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원망과 적대감이 섞인 눈빛은 어두컴컴한 굴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일 만큼 강렬했다.
그는 마치 내가 코제프를 꼬드겨 광산 안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게 맞긴 맞지만.'
생각 이상으로 그의 태도는 완고해 보였다.
그의 적대적이면서 방어적인 태도는 마치 광산 입구에 있는두터운 철문을 연상케 했다.
'뭐, 새삼스럽게 놀랍지도 않다.'
나겔링은 어찌 보면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였다. 자신이 살고있는 보금자리에 괴물이 튀어나오는데 도망가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미련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소설 속에선 피아스트 산맥에 남아있던 코제프의 일당들이 제일 먼저 몰살당했지.'
떠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하는 그의 상황이 매우 안타까웠다. 그 심정을 이해했기 때문에 나겔링이 쏘아대는 제법 무례한 눈빛에도 그다지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반갑습니다. 안 그래도 찾아뵈려 했었습니다."
"나를?"
"예.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거든요."
"나는 당신하곤 할 말 없네. 특히나 자신의 부하들에게 무참히 검을 휘두르는 미친 폭군과는 말이야."
"오, 저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가 보군요? 그런 것도 알고 계시고."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제가 한 행동을 모두 부정하진 않겠습니다만..."
"다만?"
"지금의 저는 과거에 존재했던 잔혹한 폭군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군요."
가능한 카이드로젠이 낼 수 있는 가장 진실되고 진중함이 느껴지는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의 작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사레를 치며 꼴도 보기 싫다는 듯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말이라도 못하면."
"어이! 이 친구야 잠시만! 나도 임마가 옛날에 어땠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혹시 야가(얘가)우리마을 사람들을 위해 강도단을 격퇴했다는 사실 들었나?"
그는 코제프의 물음에 딱히 긍정이나 부정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내가 그기 가서 직접 우리 난쟁이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다! 다들 카이드로젠에 대해 머라카는 줄 아나? 절라게 착하고 남자답고 멋있었댄다!“
"코제프, 이 답답한 자식아.."
"니가 먼 생각을 하고 있는진 아는데! 그렇게까지 못된 자슥은 아인것같다!"
"어떻게 그걸 믿을 수 있겠나? 놈이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아오! 이 개라슥이 진짜! 일단 얘기라도 해바라! 그정도는 할 수 있다이가!"
광산 속을 가득 메우는 코제프의 메아리 소리. 그의 따끔한 호통에 나겔링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짐을 느꼈다.
"그래도 소리는 좀 낮춰주게. 굴속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까 고막이 터질 지경이야."
"아! 쏘리쏘리."
뜻밖의 영어를 구사하는 코제프 토르강.
그는 투박한 발음을 뽐내며 나겔링을 진정시켰다.
갑자기 등장한 이질적인 단어에 잠시 당황했지만 나는 작가의 설정이 말 그대로 지멋대로였음을 회상했다.
'잉대연'의 작가놈은 본인의 편의를 위해 등장인물들이 현대어를 쓰는 묘사가 간혹 있었다.
그럼 혹시 이것도?
"익스큐즈미."
"머라노? 이 자슥은. 갑자기 먼 말인데 그게?"
"칸 제국의 언어인가?"
아마 쏘리라는 단어만 아는 모양이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입이 꼬였습니다."
"임마도 가끔 보면 허당인것 같다니까! 크흐학학!"
"코제프! 좀 조용히!"
"아, 아 쏘리."
"일단 여기서 나가자고. 광산에는 단 1분도 있기 싫으니까 말이야."
"좋은 생각입니다. 나가서 얘기하시죠."
"네 놈이랑 얘기하려고 나가자는게 아니야."
"아! 자슥! 자꾸 날이 서있네!"
"조용히 좀 하라고!"
"니가 자꾸 날 자극한다아이가! 아! 아!"
나겔링은 코제프의 목덜미에 헤드락을 걸었다.
"윽!"
그런데 나겔링은 갑자기 본인이 어딘가 불편한듯 신음소리를 작게 내뱉었다.
"목이 쫄리는건 낸데 왜 니가 그런 소리를 내는데?"
"..."
코제프는 어이없다는 듯이 외쳤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잠시 후 나겔링은 코제프의 목에 헤드락을 건 채로 광산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따라나와, 이 자식아."
"아! 아라따! 아라따! 이거 좀 놓고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