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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44화 (45/72)



〈 45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44화

브루크 해머 연합의 중앙도시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나오는 아담한 둥지.
나무로 만든 표지판에는 '채광 조합'이라는 단어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피아스트 인이 코너를 돌며 전력을 다해 헐레벌떡 뛰어갔다. 문을 발칵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수장이 보였다. 그는 숨돌릴 틈도 없이 곧바로 수장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허억..허억..수장님, 지금 병원에서 오는 길입니다.”
“뭐라더냐?”
“...타비크는...숨이 멈추었습니다.”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잠깐 동안의 침묵이었지만 이 짧은 시간조차 그들에게는 매우 길게 느껴졌다.
부하의 안타까운 죽음 소식. 주마등처럼 타비크와의 추억이  둘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타비크가 처음으로 채광에 성공하여 즐거워하는 모습의 첫 번째 기억.
어느덧 숙련된 선배가 되어서 후배들을 이끌며 착실하게 제 몫을 해내는 모습의 두 번째 기억.
그리고 처참한 몰골로 돌아온 그의 세 번째 기억이자 마지막 모습.
수장은 타비크의 죽음이 몹시 충격적이었지만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 집단을 이끄는 수장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부하들은 동요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는 갈라지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흐음, 결국 그렇게 되었나.”
“수장님, 이번 달만 해도 벌써 3명째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저희 동료가 없어지게 될까요?”
“이제 광산 출입을 하지 않으니 더이상의 출혈은 없다. 코제프가 뭐라고 하든 말든 신경 쓰지 마라.”
“사경을 헤매는 인원이 다수 있습니다. 그들마저 잘못된다면..”
“괜한 소리하지 말고 들어가 쉬어라.  무슨 방도를 마련해보겠다.”
“물러가겠습니다, 나겔링님.”

부하는 침통한 표정으로 둥지를 빠져나갔다. 나겔링이라고 불린 사내는 가만히 앉아서 고뇌에 빠졌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평화롭던 광산지대에서 왜 바실리스크라는 괴물들이 자라나고 있는 거지?
거기다  괴물들은 평상시에는 잠자코 있다가 채광을 하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서 공격했다. 알 수 없는 의문점이  가지 떠올랐지만, 그는 아무런 해답도 떠올릴 수 없었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이곳은 사람이  동네가 아니라는 거다.'

괴물들이 나오는 이유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마을 사람들의 안전이다.
얼마 전 바실리스크한테 공격받은 타비크의 상태를 떠올렸다. 그의 육체는 갈기갈기 찢기고 훼손되어 숨이 붙어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로 부상이 심했다. 타비크는 죽어가면서도 필사적으로 나겔링에게 속삭였다.

“수장님, 저기...스타멜포드를 한뭉..한뭉텅이 모아놨습니다. 저걸 가져가야합..쿨럭!”
“닥쳐라! 지금 네 놈이 죽어가는데 그깟 광물이 뭐가!”
“하지만..저게 있어야..쿨럭..”
“아무 말도 하지 마라, 타비크. 내가 알아서 하겠다.”

나겔링은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타비크의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는 출혈이 심해 쇼크가 올 정도로 극심한 부상을 입었다. 들것에 실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자신이 채광한 광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치 죽기 전에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만큼 타비크를 포함한 다른 난쟁이들도 스타멜포드라는 광물에 집착했다.

'광물이 우리 목숨보다도 중요한가?'

난쟁이들이 피아스트 산맥에 정착하기 이전에는 매우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리저리 떠돌이 생활을 전전하던 그들은 피아스트 산맥에 정착하면서 우연히 스타멜포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가볍고 튼튼한 데다가 가공성까지 우수한 이 광물은 시장에 내놓자마자 인기 폭발이었다. 운 좋게 알게 된 스타멜포드라는 광물은 난쟁이들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었다.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날들을 보내던 이들은 이 광물 덕분에 힘들던 삶이 극적으로 반전됐다. 그들에게 있어서 스타멜포드는 두말할 필요 없이 가치가 높았다. 이 광물은 오직 피아스트 광산지대에서만 채광할  있는 희귀한 광물이니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평화롭던 광산에서 언제부터인가 뛰쳐나오기 시작한 바실리스크. 처음엔 그것들을 바실리스크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진돗개 정도로 보이는 아담한 크기의 도마뱀이었기 때문이다.

“저게 먼지는 모르겠는데! 우릴 방해하믄 싹  없애뿌면 되는 거 아이가?”
“그래, 없애버리고 작업을 시작하자고.”

나겔링은 코제프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바실리스크들에게 검을겨누며 광산을 개척해나갔다. 실제로 아담한 크기의 바실리스크 들은 채광 조합에게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았다. 피아스트 광산지대 전역을 쏘다니며 쌓인 실전 압축 근육은 그럭저럭 괜찮은 전투력까지 보장해주었다.

“여긴 내가 싹 다 조져놨으니 안심해라잉!”
“하하하! 몸풀기로는 딱이구만!”
“오늘은 조금 더 깊이 가는게 어떻겠노? 요긴 다 파버려가지고 광물이 별로 읍다아이가!”
“그래, 오늘은 좀 더 전진하세!”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던 그들에게 두려울 것이라곤 없었다.
채광할 광물이 없다면 광산 깊숙이 전진하면 그만이고, 바실리스크가 뛰쳐나온다면 쳐 죽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파죽지세로 광산을 개척해가던 그들에게 소리 없이 비극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코제프를포함한 나겔링의 채광 조합은 광산 속에서 진짜 괴물을 맞닥뜨렸다.

“저..저게 므꼬? 그 도마뱀 같은 놈이 저리 커진기가?”
“우릴 공격하려나 본데요? 젠장, 모두 무기 들어라!”
“으..으아아아악!”
“끄어어억!”

광산지대 깊숙한 곳에서 우글거리는 괴물들은 채광을 하러 난쟁이들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그놈들은 진돗개 정도 되는 크기의 바실리스크와는 차원이 다른 파괴력과 살상력을 가졌다. 난쟁이들은 이제 스타멜포드를 채광하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했다. 채광하는 도중에 저 괴물들이 덮치면 곡괭이로 맞서 싸워 이겨내야만 스타멜포드를 얻을 수 있었다.

“코제프! 이건 너무 위험하다니까!”
“우리한테 다른 방법도 없다아이가! 싸워서 이기믄 장땡이다!”

나겔링은 동료를 잃으면서까지 광물을 채광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구조가 너무나도 기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아끼던부하, 타비크의 죽음으로 스타멜포드라는 광물이 지긋지긋해질 정도로 혐오감이 극에 달했다.
 같은 상황이 지속되자 피아스트 산맥에 대해 엄청난 환멸감이 느껴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광산에서 스타멜포드를 수거해온 것은 타비크가 채광한 몫이 마지막이었다.

'차라리 스타멜포드라는 광물이 없었다면 행복했을까?'

지금은 곰처럼 큼지막한 크기를 가진 바실리스크가 광산 속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제 그들을 사냥하며 채광을 하기에는 커진 몸집과 비례해서 위험성까지 배로 증가했다. 말 그대로 진짜 괴물들을 상대해야 하는 판국이었다. 하지만 나겔링을 제외한 다른 난쟁이들은 채광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잉그람 대륙에서 어디를 가나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던 난쟁이들. 이제서야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됐는데 그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다시 예전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던 거지 같던 때로 돌아가는 것을 뜻했다.

“현실적으로 더이상의 채광은 쉽지 않아. 괴물 놈들을 잡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야.”
“칸 제국에서 자꾸 닦달하는데 우짜노! 함만 참고 들어가 보자! 혹시 아나? 이번에는  튀어나올 수도 있다이가!”
“차라리 칸 제국에 얘기하는게 어떤가? 괴물들을 때려잡을 병사를 이곳에 지원해달라고.”
“안 그래도 말해봤는데 금마들 지금 전쟁 중이라 여유가 없는갑드라. 내를 오히려 미친놈처럼 보길래 확 마, 때리치고 나와뿟다!”
“코제프, 솔직히 이건 너무 위험한 일이야. 우리가 처음에 시작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이제 와서 그만둘 수도 없다이가! 우리가 그거 아님 뭘로 먹고사노! 기다리바라, 우리쪽에 싸움  하는 애들 모아다가 느그 조합에 지원보낼라니까. 그람 쫌 수월하지 않긋나?”

나겔링은 코제프의 마음을 이해했다.
피아스트 산맥에 살고 있는 이 불쌍한 난쟁이들을 이끄는 지도자니까 당연히 책임감이 막중할 것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나겔링은 더욱 괴로웠다. 그는 코제프의 말대로 몇 차례에 걸쳐 위험천만한 광산지대로 다시 진입했다.
그를 다시 광산으로 가게 만들어준 동기는 오직 단짝 친구인 코제프를 위해서, 그리고 난쟁이들의 생존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거듭된 바실리스크 들의 공격에 여러 부하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생존을 위해 위험천만한 광산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 모순 된 상황을 나겔링은 더이상 견디지 못했다.

“이제는 더이상 안돼! 어제도 다친 부하들만 15명이야!”
“함만 참고 넘어가 주면 안되긋나? 그래도 옛날에 칸 제국하고 거래할 때랑 비교하면 물량이 적다아이가. 갤러헤드에다 내다 파는게 얼마 되지도 않는데 이것마저 준비를 못 하면..”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 광물을 많이 캐든 적게 캐든 그 괴물 놈들은 한번도 빠짐없이 우릴 습격했다고!”



“그럼 우째야되는데? 광물 캐가자고 무기 안 만들면 우리 다 쫄쫄 굶어야 된다! 옛날처럼 그지같이 또 떠돌이 생활 하고싶나?”
“차라리  생활이  나아.”
“므라꼬?”
“차라리 그게 더 낫다고, 이 개자식아!”

얼마 전에 있었던 코제프와의 말다툼을 떠올렸다. 코제프는 여전히 광산으로 무리하게 진입을 요구했고 나겔링은 그만두고 싶어했다. 그동안 많이 양보했다고 생각하는 나겔링. 아끼던 부하인 타비크마저 죽음으로 세상을 떠난 지금, 나겔링에게 더이상의 타협은 없었다.

“광산은 이제부터 출입 금지다. 그리고 난 조만간 이곳을 떠날 거야. 그 이후에 광산을 들어가든 말든 그것은 너의 맘이다, 코제프.”

난쟁이들을 먹여 살린 광산.
지금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광산이 그들의 목을 조여왔다. 난쟁이들은 광산으로 인해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이제는 빛바랜 과거의 영광일 뿐이었다. 황폐했던 피아스트 산맥에 활기를 불어 넣어준  같은 광산은 이제 없었다. 난쟁이들을 좀먹는 괴물의 울음소리만이 선명해질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겔링의 마음은 확고해졌다.

'이곳을 떠난다.'

그는 더이상 부하들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당장 먹고 살 궁리가 급하기는 하지만 어디를 가나 하나쯤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괴랄한 피아스트 산맥에서도 살아남은 그들이 어디가 부족해서 못살까? 이것이 나겔링의 생각이었다.

“수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부하 하나가 총총걸음으로 찾아왔다.

“나겔링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광산에 관련된 거라면 물러가라. 코제프가 아무리 부탁해도 작업을 재게 할 생각은 없으니.”
“광산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지?”

나겔링은 그제서야 부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칸 제국의 황제가 이곳에 찾아왔습니다.”

칸 제국의 황제, 카이드로젠.
나겔링은 폭군이라 불리는 카이드로젠 황제에 대한 몇 가지 기억들을 떠올렸다.

'미친놈, 돌아이, 피도 눈물도 없는 싸이코패스 황제.‘

카이드로젠의 잔혹한 에피소드는 나겔링도 알고 있을 만큼 악명 높았다.

“그놈이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그것도 직접?”
“예, 특이한 것은 부하도 딱 한 명만 이끌고 왔습니다.”
“그 미친놈이 이곳엔 왜 온 거지? 우리랑 거래가 끊긴지도 벌써  년이나 지났는데 말이야.”
“그..나겔링님. 저희가 알고 있는 못된 카이드로젠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저희 산맥 어귀에 작은 마을 하나가 있는  아시지요?”

난쟁이 중에 채광이나 제련에 소질이 없는 자들은 대부분 산맥 아래에서 지내고 있었다.
괜히 광산 입구 근처에서 살다가 괴물들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알다마다.”
“요즘 그 마을을 털고 다니는 강도단 때문에 저희가 엄청 애를 먹고 있는 사실도 알고 계시죠? 여기 중앙도시와 거리가 워낙 멀리 떨어진 곳이라 치안이 허술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카이드로젠 황제가 혼자서 그들을 모조리 격퇴했다더군요.”
“혼자서? 그것도 일개 마을을 위해서 강도단을 격퇴해줬다고?”
“예, 저도 처음엔 믿지 못했습니다만..사실이라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 하나같이 그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습니다.”
“허어! 내가 아는 카이드로젠이 아닌가? 혹시 동명이인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나겔링님. 붉은색의 화려한 용포는 누가 봐도 그가 황제라고 짐작할 수 있겠더군요.”

나겔링은 납득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놈이 우리가 아는 카이드로젠이라 치자.”
“틀림없습니다.”
“아무튼, 그리고? 그가 여기 온 목적은 알고 있나?”
“예전처럼 다시 거래를 시작하자고 합니다. 지금 코제프 님의 둥지에서 두 분이 얘기하고 계십니다.”
“역시 그렇구만. 그놈이 여기에 온 목적이 그거였어.”

한창 칸 제국과 거래하던 시절이 바로 브루크 해머 연합의 전성기였다.
그 당시 엄청난 양의 군수품을 공급하기 위해 나겔링의 조합은 밤낮으로 광산에 들어가 채광을 했었다. 지금은 비록 줄어 들어버린 광물 때문에  제국과의 교류가 끊겨버렸지만, 그들이 다시 자신이 만든 물건을 원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만큼 난쟁이들이 스타멜포드로 만드는 군수품들은 엄청난 효율성을 자랑했으니까.

“코제프,  양반이 분명 나를 설득하러 오겠군. 고객이 친히 제 발로 오셨는데 당장이라도 광산에 들어가 제품을 선보이고 싶을 테니 말이야.”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아마 수장님을 어떻게 설득시킬지 고민 중 일 것으로 사료됩니다.”
“우리는 절대 광산으로 출입하지 않는다. 그것만 알아둬라.”
“예, 알겠습니다. 수장님.”

나겔링은 미간을 찌푸리며 코제프와 카이드로젠이 나누고 있을 대화를 짐작했다. 어떤 대화가 오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것만은 절대 허용해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의 조합이 광산에 들어가 채광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무슨 속셈인지 한번 두고 보자구, 카이드로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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