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38화
다행히 국무회의는 큰 소란 없이 무사히 끝났다. 칸 제국의 굵직한 안건들을 신하들과 함께 공유하고 논의했다.
약간(많은) 강제성이 느껴지는 회의였지만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다. 미래를 알고 있는 내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이 무조건 옳다.
'암, 그렇고말고.'
모두의 의견을 수용하고 관철하는 단계는 아직 이르다. 자칫 잘못하면 칸 제국이 멸망하게 생겼는데 말이다!
일단 황제의 권위를 앞세워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선이다.
'내 몸이 한 10개는있었으면 좋겠네.'
모든 일을 다 내가 처리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을 텐데..아쉽게도 내 몸은 하나다. 신하들과 일을 나눠 효율성을 추구해야 한다.
우트그라드로 가는 사절단은 거인족과 칸 제국의 관계를 굳건히 만들 것이다. 그럼 굳이 뿔피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들과 유연하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
'자, 이건 됐고..'
에즈만토스 왕국과의 휴전 협상은 폰 그라츠가 잘 해낼 것이다. 아무리 그가 전성기가 지난 노인이라지만 칸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전설적인 양반이다.
마법을 인정하는 않는 성향 덕에 에린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런 단점이 에즈만토스 왕국과의 협상에서는 장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페이튼 왕이 이끄는 에즈만토스 왕국은 국력의 기반 대부분이 마법사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절대 불리하게 협상을 하진 않겠지.'
과거 아레스 황제와 힘을 모아 에즈만토스 왕국과 치열하게 패권을 다퉈 왔던 폰 그라츠. 단지 휴전 협상일 뿐이지만 국가 간의 교류에 있어서 이런 자리에 그보다 적당한 적임자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그림 하나.'
폰 그라츠 같은 거물급 인사에 대한 약간의 기대감이다. 지금은 비록 술주정뱅이에 불과하지만 한평생을 칸 제국을 위해 몸을 바친 영웅이다. 그런 인물이 마음을 고쳐먹고 내 편이 되어준다면?
'엄청난 이득이지.'
소설의 후반부에는 칸 제국뿐만 아니라 잉그람 대륙에 있는 모든 나라가 멸망할 수 있는 위기에 빠진다.
모두가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편을 가르고 싸우면 득 될 것이 없다는 소리다. 할 수만 있다면 폰 그라츠를 내치지 않고 같이 안고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오케이, 일단 폰 그라츠는 이쯤하고 넘어가자.‘
“폐하, 손님이 왔습니다.”
"누구?"
“황궁자문관, 에린 킨드라입니다.”
"들라하라."
에린이 또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내 방으로 찾아왔다. 마침 나도 할 얘기가 있었는데 잘됐다.
“회의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뭐, 나쁘지 않았다."
“제가 참견할 일은 아니라 생각하오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에린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래, 무슨 일이냐?"
“폰 재상을 에즈만토스 왕국으로 보내는 것이 옳은지 우려스럽습니다. 지난번에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셨을 때... 아무리 그가 술에 취해있었다고는 하나 분명 폐하를 업신여겼습니다. 그런 자가 과연 칸 제국을 위한 큰일을 할 수 있을지요..”
여전히 폰 그라츠에 대해 경계하는 에린.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카이드로젠을 부추겨 자신을 죽이기 위해 움직인 자가 바로 폰 그라츠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다. 소설의 후반부는 '대 혼란 시대'라고 불리는 종말의 세계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 시대를 버티기 위해선 모두의 힘을 합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의를 위해선 그것이 최선이다. 그대가 걱정하는 것은 모두 이해하고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폐하의 큰 뜻을 헤아리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하하하! 내 뜻은 바다와 같다! 헤아리지 못하는게 당연하니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아..하하..예, 알겠습니다.”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에린.
"그건 그렇고, 내가 아까는 폰 재상이 같이 있어서 미처 못한 얘기인데.."
“말씀하십시오.”
"핍박받은 마법사들에 대한 위로금 지급과 장례식 건은 어찌 진행되고 있나?“
”원래 폐하께서 직접 위로금을 하사하실 계획이었지만 불가피한 상황이 생기는 바람에...“
”그렇지.“
“제가 직접 전달하는 쪽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승인만 내주신다면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마법사와 관련된 모든 권한은 자네에게 맡기겠다. 모쪼록 그들의 마음이 풀어질 수 있도록 섭섭지 않게 부탁하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오케이.
제국 안의 마법사들은 에린이 잘 케어해줄 것이다. 같은 마법사 출신이니그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해줄 수 있다. 알렉스와 머피 같은 인재들도 가능한 내가 컨트롤 가능한 범위에 있어야 한다.
'백지장도 만들면 났다'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장례식 일정은 내가 피아스트 산맥에서 돌아온 이후로 잡아주게나. 차일피일 미뤄지는 게 조금 미안하긴 하군."
“아닙니다, 폐하! 제가 그들을 잘 달래고 있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씩씩한 에린의 대답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생하게나."
자의든 타의든 뭐든 간에 나와 한배를 타게 된칸 제국의 동료들.
다들 내 명령만 따라준다면 칸 제국은 절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할 거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
펄럭거리는 붉은 깃발.
칸 제국을 상징하는 태양 심볼이 박힌 갑옷을 입고 사열대에 집합한 병사들. 넓은 공터에 3개의 부대가 각을 잡고 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우트그라드로 가는 헤카테의 사절단.
하나는 국경선으로 떠나는 폰 그라츠의 휴전 협상단.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하나는 내가 진두지휘하게 될 피아스트 광산지대 파병단이다.
'꽤 맘에 들게 준비했군.'
과연 황제의 권력이란 이런 것인가?
새삼스럽게 카이드로젠이 가진 황제라는 신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내린 명령에 이렇게 많은 부하들이 따르고 있다니. 국무회의가 끝난 지 단지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신하들은 빠르게 채비를 마쳤다.
'아주 맘에 들어.'
우트그라드로 가는 헤카테의 사절단은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규모의 수레를 준비했다. 칸 제국을 상징하는 붉은색의 도포로 뒤덮인 수레는 사열대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했다.
'뭘 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의 성의는 표시하기에는 충분한 양이다. 헤카테의 사절단 옆에는 폰 그라츠가 이끄는 휴전 협상단이 자리했다.
소설 속에서 그가 일을 했다는 묘사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일까. 오랜만에 국정을 위해 움직이는 폰 그라츠의 모습은 심히 낯설었다.
'참 진귀한 장면이로군.'
이번 협상 건은 폰 그라츠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마음속으로 그의 무운을 빌며 무사히 다녀오길 빌었다.
“폐하, 이제 사열식을 시작하실 시간이옵니다.”
사열식을 시작할 시간이 됐다는 시종의 귀띔. 고개를 끄덕이며 단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산만한 분위기의 사열대는 일순간에 쥐죽은 듯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사열대에 있는 모든 신하들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고정됐다.
'자, 이제 시작해볼까.'
여유 있게 그들을 내려다보며 만족스럽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기특한 놈들.
이제는 이런 시선들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어느새 진짜 황제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익숙해진 나다.
"준비하느라 고생했다. 그대들의 앞길은 칸 제국의 태양이 밝게 비출 것이다!"
의욕이 넘치는 얼굴을 한 헤카테.
피곤한지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는 폰 그라츠.
그리고 나를 경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에린 킨드라.
앞으로의 여정은 아직 멀고도 험하지만, 이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자신감이 꿈틀거렸다.
"길게 연설하면 모두가 싫어하는 거 다 안다."
“아닙니다, 폐하!”
“아닙니다, 폐하!”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폰 재상."
폰 그라츠는 고개를 숙였고 나는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무사히 복귀할 수 있도록. 이건 명령이다.“
**
덜컥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혼자 가신다니요?”
사열식이 끝나자마자 에린은 내 방으로 쳐들어와 잔소리를 늘어놨다.
"그건 내 맘이다."
“폐하께서는 칸 제국의 대들보십니다. 어찌하여 대들보만 덩그러니 타국으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우트그라드도 혼자 다녀왔는데 피아스트 광산지대가 뭐가 대수겠느냐?"
피아스트 광산지대로 떠나는 파병단.
에린은 헤카테의 사절단과 비슷한 규모로 파병단을 준비했다. 황제를 보좌하기 위해 편성된 수많은 병력들.
'마음은 고맙지만, 쓸모가 없어.'
어차피 나 혼자 잘하면 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바로 해산시켜버렸다. 안 그래도 칸 제국의 안팎으로 불안정한 시기인데 이런 데 병력을 투입하는 건 그야말로 낭비다.
차라리 던전이나 지키면서 마을 치안이나 바로 잡는게 우선이지.
“아무리 그래도요, 폐하!”
"괜찮다, 나 혼자서도 충분해."
“지난번에 폐하를 우트그라드로 혼자 보낸 일도 제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응? 네가 왜 후회를 하지?"
대놓고 답답한 마음을 표출하는 에린. 그녀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연락이 안 되니까 그렇지요. 폐하의 안위를 아무도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신하의 마음을 헤아려주십시오, 폐하!”
"연락?"
“네, 연락이요!”
"그걸 꼭 해야 하나?"
“당연히 해야지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에린이 내 여자친구도 아니고 무슨 연락에 이렇게 집착한단 말인가.
"미안하지만 자네는 내 스타일이 아니네."
“예?”
"나는 단발머리가 맘에 든단 말이네."
“그게 대체 무슨..”
에린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살짝 경멸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단발머리가 맘에 드신다고요?”
"농담이고, 연락이 좀 안 되면 어떤가?"
“안되면 어떠긴요? 폐하의 안위가 곧 칸 제국의 명운입니다. 폐하..어찌하여 저를 이렇게 괴롭게 하십니까?”
"난 나를 믿는다. 자네도 나를 믿어보게나."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폐하!”
에린은 한숨을 쉬며 갈갈이 뛰었다. 마치 '네가 황제만 아니었다면 시원하게 욕이라도 박았을 텐데' 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단지 한번 놀려보고 싶었을 뿐.
"그렇게 연락을 하고 싶나?"
“예, 폐하.”
"그럼딱 한 명만 데리고 가마. 여럿이면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이제야 표정이 밝아지는 에린. 이제 보니 타격감이 좋은게 약간 놀리는 맛이 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폐하!”
"이제 출발할 테니까 밖에 대기시켜 놓도록."
“예, 당장 준비시키겠습니다.”
"아 그리고."
“네?”
총총걸음으로 물러가던 에린이 고개를 들었다.
"고생 좀 부탁하마. 늘 그래왔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