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37화
국무회의.
카이드로젠이 집권한 이래로 처음으로 열리는 국무회의다. 회의를 잡은 사람은 바로 나. 오랜만에 국무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시종들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카이드로젠 황제께서 국무회의를 소집하시다니.. 정말 의외로구만.”
“그쵸? 근데 시종장님, 그건 그렇고 저희가 준비해야 하는게 뭐가있죠? 갑자기 준비하려니 어떻게 하는 것인지 기억이 잘 안 나요.”
“이런 멍청한 놈. 가서 자리마다 마실 물이나 준비해놓거라!”
술과 여자에 빠져 국정 운영에는 관심이 없던 카이드로젠. 그가소집한 회의는 일개 시종들도 의외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킬 만큼 오랜만의 일이었다.
'외세의 침략은 막아냈으니(?) 안으로도 살펴봐야지.'
칸 제국을 멸망시켰던 소설 속 우트그라드는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막강한 거인 군단이 내 손아귀에 있다. 이렇게 좋은 소식을 나만 알고 있으면 입이 근질거리기 마련이다. 국무회의라는 명목하에 사람들을 불러놓고 나의 영웅담에 대해서 가볍게 읊어줄 생각이다.
'상상만 해도 벌써 입꼬리가 올라가는군.'
자랑할 생각에 벌써부터 콩닥거리는 마음. 침대에 누워서 국무회의가 시작할 시간을 기다렸다. 주인공은 항상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다.
“태양이 폐하를 비추기를! 폐하,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태양이 폐하를 비추기를! 폐하의 존안을 뵙습니다!”
"오, 어쩐일이냐?"
에린이 시종을 이끌고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등장했다. 뒤에 있는 시종은 어제 봤던 공문서 몇 장을 가지고 내 앞으로 내밀었다.
"아직 국무회의가 시작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는데."
“주요 안건을 요약해서 가져왔습니다. 미리 훑어보시고 들어가시는 것이 좋으실 겁니다.”
"역시 부지런해."
“감사합니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는 에린. 그녀가 가져온 A4 크기의 종이를 펼쳐보았다. 어제 에린이 말했던 칸 제국 곡물 수확량에 대한 건이 보이고.. 솔라스트림 동부광장 치안 개선 사업에 대한 건도 보이고..포트할레 항만의 노후 된 장비 수리 건도 보인다. 여기까진 크게 중요하지 않은 잔잔바리 건.
다음 장으로 시선을 옮기자 드디어 관심이 생길 만한 아이템이 눈에 들어왔다.
"피아스트 광산지대의 브루크 연합이 올해도 보급품을 보내지 못한다고 했다라.."
“예, 맞습니다.”
"보급품을 보내지 않은 지 얼마나 됐지?"
“햇수로 치면 벌써 3년째입니다.”
"우리 전쟁 물자는 상황이 어떤가? 충분히 쟁여 놓았나?"
“에즈만토스 왕국과의 전쟁으로 거의 다 소진된 상태입니다. 검, 방패, 갑옷 등 전방위적으로 수량이 부족합니다.”
아버지를 잃은 카이드로젠이 감정적으로일으킨 에즈만토스 왕국과의 전쟁.
우트그라드로 떠나기 전에 휴전을 선언해서 천만다행이다. 만약 휴전을 하지 않고 계속 전쟁을 이어갔다면 분명 참패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터로 나가는데 칼 한 자루 없이 나가면 어떻게 이기겠는가? 나라 사정을 살피지 않고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킨 행위도 칸 제국이 멸망한 이유 중에 하나다.
"안 그래도 이 문제 때문에 고민이긴 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지. 내가 모르는 건 아무것도 없다."
에린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국무회의에서 이것을 중점으로 논의하면 되겠군. 나가보거라. 이따 보자."
“알겠습니다, 폐하!”
**
국무회의가 시작됐다. 칸 제국을 이끄는 거물급의 인사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현 재상,폰 그라츠를 포함해서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그라츠 가문의 일원들. 그리고 황궁자문관, 에린 킨드라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몇몇 대신들이 자리에 함께했다.
"태양이 그대를 비추기를! 오랜만이다, 제군들."
“태양이 폐하를 비추기를!”
“태양이 폐하를 비추기를!”
신하들에게 절도있게 팔을 들어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나는 근엄한 목소리로 국무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자,일단 좋은 소식부터 알려주겠네."
에린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벌떡 일어서서 단상으로 나서는 에린. 그녀는 주문을 외우며 내가 맡긴 물건을 회의실에 소환했다.
파앗
백색의 기운을 뿜어내며 아름답게 등장하는 뿔피리. 에린은 모두가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회의실의 가운데로 뿔피리를 둥둥 띄웠다.
“호오! 매우 아름다운 물건이군요!”
“이렇게나 희고 매끈한 뿔피리는 처음 봅니다!”
영롱한 뿔피리의 자태에 하나같이 놀라움을 표했다. 넋을 놓고 뿔피리를 감상하는 신하들.
"이게 뭔 줄 아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아라."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만 보는 신하들.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만큼 우트그라드는 소설 속 세계관에서 미지의 땅이기 때문이다.
에린의 손이 꿈틀꿈틀 거리는 것을 무시하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것은 우트그라드의 통치자만 가질 수 있는 '집결의 뿔피리'다. 이 자리를 빌려 그대들에게 선언하지. 우트그라드는 이제부터 칸 제국과 명을 함께한다.“
”예?“
”그들은 빛나는 태양 아래서 함께하는 동료이자 전우가 될 것이다!"
“폐..폐하?”
이번에도 신하들은 놀라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 방향성은 아까전과 달랐다.
“하..하지만 황제 시여! 우트그라드에 서식하는 그들은 지능이 낮고 포악한 이교도들이라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들의 무력은 저희가 감당할 수준을 한참 벗어납니다! 무엇보다 인간을 잡아먹기도 한다는 괴상망측한 소문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칸 제국이 그런 무모한 자들과 함께한다는 것입니까?”
“그들을 길들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폐하!”
미지의 땅, 우트그라드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무지한 신하들.
근거도 없이 뇌피셜에 의존한 멘트들을 쏟아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에 사로잡힌 그들을 향해 다그치듯 얘기했다.
"내가 언제 그들을 길들이려 한다고 했는가? 우트그라드의 거인들은명예를 중시하고 긍지 높은 전사들이다! 우리 칸 제국은 그들을 동등한 개체로 존중하고 대할 것이다."
또각
카이드로젠은 만년필을 악력으로 부러뜨리며 자신의 기분을 간접적으로 표출했다.
"그런 헛소문에 경거망동하는 자들은 내가 유심히 지켜볼 것이니 그리 알라."
“화..황공하옵니다, 폐하..”
싸늘하게 죽어버린 회의실의 분위기. 신하들은 과거의 카이드로젠이 저질렀던 공포스러운 기억이 떠오른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젠장, 이렇게까지 겁주려고 한 건 아닌데..
"자, 그대들이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니 너무 오해하지는 말아주게."
짝짝짝
“...”
“...?”
여전히 눈알을 굴리며 불안해하는 신하들. 분위기를 풀기 위해 어색하게 박수를 치며 미소를 짓는 카이드로젠의 표정은 가히 공포스러웠다.
“이 우둔한 자들을 용서하십시오, 황제폐하. 저의 지혜가 이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안 된 것 같습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폰 그라츠.
그는 가래가 낀 걸걸한 음성으로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오호, 폰 재상. 그대의 목소리는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군."
“황공하옵니다.”
“어제도 한잔했나?”
“약간의 술은 건강에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네는 약간이 아니니까 문제지 않은가.”
“하하하. 황공하옵니다. 폐하.”
폰 그라츠의 언행을 유심히 관찰했다. 에린이 수상하다고 경계하는 폰 재상. 아직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지만, 미리미리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건 그렇고 폰 재상. 그대는 우트그라드에 어떻게 생각하나?"
“저희에게 불모지였던 땅인 만큼 충분한 정보가 없습니다. 따라서 섣불리 이렇다저렇다 판단하기가 어렵지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믿어야지 어쩌겠습니까, 하하하!”
"좋은 자세로다."
의외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폰 그라츠.
"우리는 그들과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내말에 의구심을 품는 자들은 이번 기회에 사절단으로 우트그라드에 가보는 것이 좋겠군. 내 말을 듣는 것보다 직접 경험해보는 것이 확실하니까 말이지. 혹시 자원해서 가고 싶은 사람 있나?"
좌중을 둘러보며 사절단으로 보낼 지원자를 물색했다. 다들 눈치만 보며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는 신하들.
“...”
“...”
“...제가 가겠습니다!”
다행히 구석에서 번쩍 손을 드는 한 명의 지원자가 나왔다.
회의실에 있는 시선 모두가 그에게 고정됐다.
"지원자가 나왔군."
“병참 장교 헤카테가 폐하의 존안을 뵙습니다! 제가 우트그라드로 가고 싶습니다!”
"호오, 적극적인 모습이 아주 보기 좋구만."
“폐하의 말씀에 의구심을 품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단지 순수하게 그들의 진짜 모습이 궁금할 뿐입니다!”
병참 장교 헤카테의 우렁찬 목소리.
"좋다, 헤카테. 자네가 우트그라드로 가서 나의 전언과 선물들을 전달해라.
그들이 어떠한 존재들인지 똑똑히 보고 듣고 느끼고 와서 이들에게 전파하거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좋다. 이로써 우트그라드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변화할 수 있다. 거인족과 인간의 괴리감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오케이.’
나는 종이를 넘기며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폰 재상."
“예, 폐하.”
"그대는 에즈만토스 왕국으로 가서 휴전을 협상하라. 우리는 당분간 국력을 키우는 데 집중할 것이다. 아버지의 복수는 그 이후에 확실하게 되갚아준다. 완수할 수 있겠느냐?"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의 폰 그라츠.
“맡겨만 주십시오.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릴레나 총사령관이 우리 쪽에서 사신이 도착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대는 하루빨리 국경선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폐하.”
그의 대답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약간의 공백이 존재했다.
에린의 말대로 뭔가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확신하긴 일렀다.
소설 속의 폰 그라츠는 큰 임팩트없이 사라진 수많은 캐릭터 중 한 명일 뿐이니까.
'이거 말고도 신경 쓸 게 많으니 일단 넘어가자.'
종이를 넘기며 다음 안건으로 눈을 돌렸다.
"자, 다음은 군수 보급품에 관한 얘기다. 담당자는 황궁근위대를 포함한 칸 제국 전체의 보급품에 대해서 실태를 보고하라."
회의실에 있는 신하들은 구석에 있는 헤카테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보고를 시작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상황은 이보다 나쁠 수 없습니다.”
헤카테는 침을 꼴깍삼키며 조심스럽게 발언을 이어나갔다.
“황궁 근위대는 쓸만한 무기들을 추려내어 교대마다 돌려쓰는 판국입니다. 그리고 병영의 검사들은 오로지 나무로 만든 검으로만 훈련에 임하고 있습니다.”
"흠.."
“상태가 괜찮은 무기들은 국경선 전초기지를 최우선으로 조달하고 있습니다만, 그마저도 부족하여 전초기지에선 지속적으로 보급품 요청이 접수되고 있습니다.”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 뭐,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 크게 놀랍지도 않았다.
"제군들, 헤카테의 보고와 같이 제국의 현 실태는 아주 심각한 수준이네. 한시라도 빨리 브루크 해머 연합과의 관계를 개선시켜 군수보급량을 정상 궤도로 올려놔야 할 것이야."
“폐하.”
"발언하게, 폰 재상."
“외람된 말씀이오나..브루크 해머 연합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신 건 폐하의 의지 셨습니다. 난쟁이들 도움 없이 저희끼리 자급자족하여 일어서자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폰 그라츠는 눈썹을 씰룩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 분명 그랬지. 바로 폰 재상의 말을 듣고서 말이야. 그대가나에게 군수 보급품이 충분하다 못해 넘쳐 흐른다고 보고하지 않았는가?"
그는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능청스럽게 얘기했다.
“아아, 제가 그랬었나요? 하하하 이것 참..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노인의 건망증을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폐하.”
“폰 재상님!”
“왜 그러신가?”
“폐하께 예의를 갖추어 주시길 바랍니다.”
“허허허헛!”
에린은 그의 태도를 지적하며 다그쳤다. 폰 그라츠는 웃음을 멈춘 채 에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황궁자문관 나으리.”
에린과 폰 그라츠의 작은 신경전.
그들은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대며 서로를 견제했다. 확실한 것은 에린과 폰 그라츠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다.
마법을 숭배하는 에린 킨드라.
그리고 마법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폰 그라츠. 그들은 어쩌면 상극처럼 가까워질래야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존재였다.
"싸우지 말게, 나의 권위에 도전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황공하옵니다, 폐하.”
“황공하옵이다, 폐하.”
나는 살얼음판처럼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애써 환기시키며 안건에 대해 이어나갔다.
"지나간 일에 대해 이제 와서 따지자고 얘기를 꺼낸 것이 아니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지. 그렇지 않은가?"
“맞습니다, 폐하.”
"내 뜻을 전파하겠다. 칸 제국은 그들의 군수 보급품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건 우리의 명을 달리할 수도 있는 아주 중요한 일이네. 따라서 내가 직접 피아스트 광산지대의 브루크 해머 연합을 방문하려 한다."
피아스트 광산지대.
이곳은 브루크 해머 연합이라는 특수한 집단이 광물을 캐며 살아가는 곳이다.
그들은 만들어내는 검, 갑옷, 방패 따위의 군수 보급품들은 높은 수준의 퀄리티를 자랑했다. 그 때문에 칸제국의 무기 조달은 오로지 브루크 해머 연합에게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황제 폐하! 시찰단과 협상단을 보내시지요! 제국의 황제께서 어찌하여 그런 험한 광산으로 들어가십니까?”
“피아스트 광산지대는 매우 가파르고 위험한 산맥입니다! 차라리 그쪽 지도자를 칸 제국으로 호출 하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신하들은 동요하며 말했다.
"너희는 그게 문제다. 칸 제국과 브루크 해머 연합의 관계는 엄연히 동맹 관계다. 동맹국의 지도자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잘못됐나?“
”황공하옵니다. 폐하.“
그들과의 관계를 개선시킬 수 있는 최적의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잉대연 전문가가 직접 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 아니겠는가?
"그대들은 오만한 자세를 내려놓고 갑질하지 않도록 해라. 앞으로의 언행은 주의해서 발언할 수 있기를 기대하마."
“알겠습니다, 폐하!”
“알겠습니다, 폐하!”
브루크 해머 연합은 칸 제국의 운명을 쥐고 있는 매우 중요한 집단이었다.
그들을 반드시 우리 편으로 포섭해야 한다. 칸 제국이 멸망하지 않고 내 목 또한 무사히 붙어있으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