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36화
에린은 평소처럼 황궁으로 출근했다. 여전히 공석으로 비어있는 황제의 옥좌.
그가 우트그라드로 떠난 지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카이드로젠 황제는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조차 없었다.
'잘 지내시고 계실까?'
그를 걱정하는 에린에 비해서 칸 제국의 신하들은 아무도 황제를 걱정하지 않았다. 워낙 잔혹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던 황제라서 그런가. 오히려 그가 없는 지금이 평화롭다고 생각하는 대신들이 많았다.
“카이드로젠 황제께서 어디 계시는지 아시오?”
“뭐, 보나 마나 어디서 술에 취해 거하게 나자빠져 있겠지요.”
“쉿! 이 사람아! 누가 듣겠어!”
“들을 사람이 어디있습..”
에린의 모습을 발견하고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신하들. 황제가 홀연히 우트그라드로 떠난 뒤로 수군거리는 신하들이 꽤 많아졌다. 그녀는 황제에 대한 인식이 안타까웠지만 지금으로써는 별수 없었다.
그가 그동안 보여준 행동들을 되짚어 생각해보면 신하들의 반응은 사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워낙 난폭하던 분이셨으니까...'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의 성격은 180도 달라졌다. 침착하고 냉정하던 귀공자에서 우발적이고 다혈질인 산적으로 말이다.
그의 성격을 거스르는 신하들은 직위를 박탈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음도 면치 못했다. 황궁 안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새빨간 피가 낭자했다.
옥좌 아래에 깔려있는 붉은 색 양탄자는 수많은 신하들이 적신 피라는 소문도 이때 생겨났다.
'이젠 달라지셨으니기대해도 좋아.'
에린은 카이드로젠의 아버지가 죽은 일로 자신을 크게 자책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도로 진행하던 에즈만토스 왕국과의 동맹 건. 마법을 수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아레스 빌라트 황제에게 에즈만토스 왕국과 동맹을 할 것을 제의했다.
그 당시 칸 제국은 마법에 대해 비교적 무지한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참혹한 결말.
에즈만토스 왕국은 배신자 자네스 총독과 결탁하여 아레스 빌라트 황제를 함정에 빠뜨려 죽이는 데 성공했다.
'하아..'
그 날만 생각하면 에린은 괴로워 미칠 것만 같았다. 마치 자신이 직접 아레스 황제를 죽여버린 것만 같았다. 카이드로젠이 자신을 처형하기 위해 호출했을 때도 기꺼이 그의 명령에 따랐다. 칸 제국의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본인이 작정하고 마음만 먹는다면 카이드로젠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도 말이다. 자신이 죽어야 카이드로젠은 물론 본인의 슬픔도 치유될 수 있다고 믿었다.
'변화는 거기서부터 시작됐지.'
자신을 죽이려는 그 찰나에 순간 돌변해버린 황제의 기행. 기적적으로 목숨을 살린 에린은 카이드로젠에게 형언할 수 없는 깊은 미안함을 느꼈다. 아버지를 죽음에 빠뜨린 자신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목숨을 건져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황제의 행동이 이해 가지 않았다. 왜 나를 살려주신 걸까?
'사건의 내막을 알았기 때문에?'
그저 그 이유만으로는 카이드로젠 황제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기분에 따라서 사람을 죽이는 잔혹한 황제였기 때문이다. 카이드로젠은 갑자기 최악의 폭군 황제에서 총명하고 어른스러운 황제로 변해버렸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에린은 그의 변화한 모습을 보고 가슴에 큰 기대감을 품었다.
어쩌면 다시 한번 칸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지 않을까?
아레스 황제를 죽음으로 이끈 에즈만토스 왕국에 복수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상황은 긍정적이야. 황제께서 지금 자리에 안 계신 것만 빼면.'
황제가 우트그라드로 가서 무엇을 하려 하는지 에린은 알지 못했다. 그저 카이드로젠을 믿고 기다리기로 결심하는 에린.
그녀는 황제가 돌아올 때까지 자신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내리라 다짐했다. 그것이 그녀가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자..어디보자..일단 옥새가 잘있는지 한번 확인해볼까?”
국정에 관심이 없던 카이드로젠이 옥새를 분실하진 않았을까 걱정했다. 황제가 돌아오면 결재받아야 할 문서들이 산처럼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직무를 유기하는 폰 그라츠를 대신해서 사실상 재상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에린.
그녀는 옥새를 찾기 위해 조심스레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
순간 그녀는 얼음장처럼 굳어버렸다.
알현실 안에 있는 정체불명의 물체.
“으응?”
잠시 후 그녀는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악!”
**
“꺄아아아악!”
“이거 어디서난 소리야?”
“알현실인 것 같습니다!”
한적하던 황궁을 깨우는 에린의 하이톤 비명소리. 시종들이 알현실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벌컥!
부리나케 달려온 시종들은 눈앞에 광경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놀라서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아..아니? 폐하?”
“돌아오셨습니까, 폐하!!”
시종들은 내가 여기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듯 얼빠진 얼굴로 맞이했다.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가볍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그대들은 나가보게. 나는 이 친구랑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지."
“아..알겠습니다, 폐하!”
뒷걸음질 치며 알현실을 빠져나가는 시종들. 나는 여전히 입을 쩍 벌리고 서 있는 에린을 향해 손짓했다.
"오랜만이구나."
“폐..폐하?”
"반갑다."
“언제 오셨습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요? 대체 뭐하다 오신 겁니까? 왜 이렇게 늦게 오신 겁니까? 무슨 큰일이라도 있으셨는지요?”
다다다다 질문 공세를 퍼붓는 에린 킨드라.
"하나씩 물어봐라.“
”그럼..이거부터 여쭙겠습니다. 어디 다친덴 없으신지요?“
"네가 만들어준 갑옷 덕분에 하나도 안다쳤다.“
”오오, 참으로 다행입니다, 폐하.“
베시시 웃으며 좋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에린. 역시 사람은 칭찬에 약하다.
"그나저나 네 놈한텐 앞으로 장난을 못 치겠구나. 무슨 비명소리를 그렇게 있는 대로 크게 지른단 말이냐? 귀 떨어지는 줄 알았다."
”폐하의 모습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무슨 괴물인 줄 알았습니다. 저라서 비명소리에 그친 것이지 릴레나 경이 보셨다면 검을 뽑았을 것입니다.“
빨개진 얼굴로 항명하는 에린.
하긴,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던 상황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했다.
에린을 놀래켜주고 싶은 마음에 옥좌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아주 호러틱한 귀신처럼 보일 것이다.
”앞으로 조심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찌 황제에게 괴물 같다고 할 수 있느냐?"
”그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고맙군."
오랜만에 만난 충성스러운 부하, 에린 킨드라. 그녀의 반가운 얼굴을 보니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두 번째 질문드리겠습니다. 우트그라드에서 무엇을 하고 오셨는지요? 그 누구도 개척하려 시도하지 않은 위험한 땅에서 말입니다..“
"내가 신기한 걸 하나 보여주지."
포대기를 벗겨내며 소중하게 감싸온 물건을 에린에게 공개했다.
”와아!“
에린은 탄성을 질렀다. 여전히 영롱하게 빛나는 백색의 뿔피리. 그녀는 뿔피리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뭐 하는 물건인 줄 아느냐?"
”한번 맞춰보겠습니다.“
에린은 눈을 감고 뿔피리가 가진 힘에 대해 집중했다. 잠시 침묵하던 에린은 생각이 정리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한 마력이 깃들어있는 물건이로군요. 보기에 예쁘기만 한 평범한 뿔피리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그 이상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 아는 것도 대단하다."
역시 마법사는 마법사라는 건가. 에린은 뿔피리가 가진 힘에 대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이 물건의 이름은 '집결의 뿔피리'다."
”용도가 어떻게 되지요?“
"이걸 불면 우트그라드의모든 거인족이 내 명령에 따른다."
”그..그게 정말입니까? 그 종족들이 폐하를 따른다고요?“
"정말이고말고. 이건 그들의 통치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다."
”지금 폐하가 가지고 계시다는 뜻은..“
"그렇다. 우트그라드의 통치자가 바로 나라는 소리다."
에린은 소리도 지르지 못할 만큼 놀란 기색이었다.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토끼 눈으로 뿔피리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우트그라드로 가신 이유가 이것 때문이셨습니까?“
"그래. 워낙 급한 사항이라 자세히 설명도 못 하고 떠난 점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아닙니다! 폐하의 깊은 뜻을 제가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폐하. 너무 덤덤하게 말씀하셔서 그런지 제가 실감이 잘 안 날 정도입니다.“
순간 장난기가 발동해서 거인화의 비술을 실행할까 고민했다. 에린이 거인의 된 내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놀랄까? 분명 이번에는 비명을 지르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네, 혹시 내가 거인족이라면 믿겠나?"
”폐하의 말씀이 곧 법이십니다.“
"솔직하게 말해봐라.”
“못 믿겠지요.”
거인화를 실행할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기서 거인화를 실행했다가는 황궁이 무너진다. 그녀를 놀래켜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거인화의 비술은 다음에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괜히 소란스러운 일은 만들고 싶으니 말이다.
"이 뿔피리는 칸 제국의 국보로 지정한다. 자네가 안전하게 관리해줘."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그거 자네가 몰래 불어봐도 아무 소용없다. 오직 내가 불어야만 효력이 있는 물건이다."
“몰래 불어 볼 생각은 없었지만..유념하겠습니다.”
용맹한 우트그라드의 전사들을 소환할 수 있는 '집결의 뿔피리'. 이 물건은 나중에 분명 요긴하게 쓰일 일이 있을 것이다.
"그래. 그건 그렇고 그동안 별일 없었느냐?"
“다행히 아직까지는 별일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폰 그라츠 재상을 경계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폰 재상이? 왜?"
에린은 폰 그라츠가 자신과 릴레나에게 했던 만행을 낱낱이 고했다. 카이드로젠이 마법사들 앞에서 자해를 하며 고해성사를 했던 일을 '황제 피습사건'이라고 왜곡하는 발언과 카이드로젠 황제는 그저 물러터진 애송이라는 모욕적인 발언까지.
“폐하의 행보에 불만이 아주 많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음.."
칸 제국의 재상, 폰 그라츠. 그에 대한 소설 속 묘사를 떠올렸다.
[칸 제국의 멸망을 가속화하고 과거의 영광에 취해있는 술주정뱅이.]
[칸 제국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술에 취해있던 머저리.]
내가 카이드로젠으로 빙의해서 본 폰 그라츠도 딱 소설 속 묘사 그대로였다. 언제나 술에 취해 국정에 관심이 없는 무능력한 재상. 그는 내가 보기에 칸 제국을 멸망시키는 주역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물론 해가 되는 인물이란 건 백번 맞는 얘기지만.
"그때도 술에 취해있었나?"
“예, 폐하. 바인 냄새가 역하게 진동했었습니다.”
"그럼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술에 취해 실언을 한 것이니."
“그..그치만..그의 발언은 한없이 폐하께 모욕적이었습니다.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습니다.”
"그거 말고도 우리에겐 급한 일이 많다. 자네 말은 무슨말인지 알겠으니 일단 폰 그라츠 재상은 후순위로 미루도록."
에린은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재상 취임식은 조금 미루는 게 좋겠어. 자네를 재상에 앉힌다고 하면 그가 무슨 말썽을 피울지도 모르니 말이지."
“저도 동의합니다, 폐하.”
"일단 현재 역할에 충실하도록 해라. 재상 취임식이 미뤄진다고 너무 실망하진 말고."
“실망하긴요, 폐하. 안 그래도 현재 제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에린은 웬 대형마트에서 볼 법한 카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게 다 뭐냐?"
“폐하께서 결재해주셔야 할 공문서입니다.”
"저..저게 다 내가 확인해야 하는 거라고?"
“예.”
"왜 이렇게 많나?"
“폐하께서 자리를 오래 비우셨으니까요.”
"난 자네를 믿는다. 모두 승인하도록 하지."
“그래도 내용은 보시고 결재를 해주셔야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런데...저건 너무 많지 않냐?"
에린은 내가 당황하는 모습이 재밌는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추후에 요약해서 보고하러 오거라."
“그러실 줄 알고 미리 요약했습니다.”
"오, 그래?"
“예.”
"준비성이 투철하군."
에린은 장바구니 같은 카트로 가서 공문서를 집어 들었다.
“굵직한 내용만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칸 제국 안에서 생산하는 곡물 수확량에 대한 보고입니다.
둘째는 포트할레 항만 시설의 노후 된 장비를 개선하는 건이고요.
셋째는 솔라스트림 동부광장의 치안 개선 사업 검토 건입니다.
넷째는 피아스트 광산지대에..”
"그만 그만."
나는 검지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모션을 취했다.
"자네는 아직 내 스타일을 모르나 보군."
“내용이 너무 긴가요?”
"그래."
“폐하.”
"응?"
“저는 폐하의 명령에 따라 최선을 다해 제 역할에 충실하는 중입니다. 최대한 짧게 요약하였으니 부디 가엽게 여겨주시옵소서.”
영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에린. 옷깃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표정은 한없이 즐거워 보였다.
'이 친구가 원래 이런 스타일이었나?'
산더미처럼 쌓인 공문서를 보니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회사원일 때도 저만한 파일을 정리하며 일만 하다 왔는데 카이드로젠의 몸으로도 일을 해야 하다니.
벌써부터 몸에서 거부반응으로 좀이 쑤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욱 웃기는 사실은 카이드로젠의 머릿속이었다. 새하얀 도화지같이 깨끗한 카이드로젠의 뇌. 그는 단 한 번도 국정에 대한 보고를 듣고 검토한 적이 없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지식이 하나도 없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두드렸다.
뭐 어쩌겠나.
인생은 고달픈 것이다.
소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 그게 비록 지루하고 시시한 일처럼 보이더라도 말이다.
"그래, 검토를 시작해볼까?"
“폐하.”
"응?"
“더욱 간단명료하게 다시 준비해올까요?”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주 기특한 말을 하는 에린. 그녀에게 카이드로젠과 나의 진심이 담긴 마음을 전달했다.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