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35화
그토록 고대하던 리트가르와의 만남.
아쉽게도 겔미르는 리트가르의 음성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이것이 겔미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리트가르와의 만남이었다.
어느 동굴 안에서 깨어난 겔미르는 옆에 놓인 리트가르의 쪽지를 발견했다.
**
“리트가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고? 아니, 살아있긴 하단 말인가?“
“리트가르 님이 살아계시다고요?”
“그게 사실인가! 인간!”
리트가르의 행방을 알려주겠다는 카이드로젠의 폭탄 발언.
잠시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모든 거인들이 혼란에 빠졌다. 리올라와 베누를 포함한 모든 거인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중에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거인은 단연코 겔미르였다.
“그 말이 사실인가! 그 말이 사실이냔 말이다!”
페스카나 제국을 멸망시킨 후에 자취를 감춰버린 리트가르와 그의 일당들.
우트그라드의 후손들은 당연히 그가 죽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들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리트가르의 일당과 교류가 끊어진 지 몇십 년이나 지나버렸으니까.
“그 말이 거짓이라면 너는 내가 기필코 죽여버릴 것이다, 카이드로젠!”
겔미르는 결계를 뚫고 들어올 기세로 격정적으로 소리쳤다.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마치 우트그라드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칸 제국의 황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네 놈도 조만간 주입식 교육을 해주던가 해야겠군."
“그게 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날 믿으라는 뜻이다."
소설 속에서 벤하트는 어느 한 거인족을 만났다. 잉그람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에서 말이다.
[거인족의 탄생은 오로지 호루크 신전의 미지의 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작가의 설정이었으니 불변의 진리였다.
그 말인즉슨.
'모든 거인족은 우트그라드 출신이다.'
그런데 벤하트가 외딴 섬에서 만난 의문의 거인족.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벤하트에게 적대적으로 반응했던 바로 그 거인.
책을 읽을 땐 누군지 몰랐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다 마르드의 방을 통해 경험한 정의롭고 긍지 높은 거인.
'리트가르.'
오직 리트가르 일당만이 우트그라드로 복귀하지 않고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던 것이다. 벤하트가 만났던 거인은 분명 리트가르가 확실했다.
그들은 우트그라드에서 한참 떨어진 어느 외딴 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
털썩
“게..겔미르!”
“부족장님!”
“부족장님! 왜 그러십니까!”
순간 눈앞을 의심하게 만드는 놀라운 광경.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을 것 같던 겔미르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네..네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 겔미르는..”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다. 그토록 자존심 강하던 괴팍한 거인이 내게 무릎을 꿇다니!
급기야 겔미르 눈동자에 눈물까지 맺히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저..전적으로 너에게 협력하겠다..”
“그게 정말이냐?”
“내 모든 명예를 걸고 맹세할 테니 믿어도 좋다..”
철커덕
겔미르의 뒤로 서리도끼 부족원이 일제히 도낏자루를 바닥에 내지르며 부족장의 의지에 동참했다.
나를 거부하던 부족원들도 고개를 푹 숙이며 내게 복종의 뜻을 내비쳤다.
베누와 길버트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동그란 눈으로 겔미르와 서로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이제서야 마음이 놓이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리올라.
“제발...제발 그가 어디 있는지 내게 알려줘...”
'이 정도로 리트가르를 그리워할 줄이야.'
난폭한 거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겔미르 그도 우르그라드가 자랑하는 긍지 높은 전사였다.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리트가르가 살아있다는 소식에 겔미르의 어깨는 크게 들썩거렸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겔미르.
리트가르를 그리워하는 겔미르의 눈물을 보고 나도 감정이 북받치며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사나이의 눈물. 그것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뜨거웠다.
“일어나게, 겔미르.”
베누는 겔미르의 어깨를 토닥이며 단상 앞으로 나섰다.
“이제 슬슬 이미르 의식을 마쳐야겠구만. 승자는 모두 알다시피 결계 안에 있는 카이드로젠이네. 그에게 우트그라드의 통치자를 상징하는 뿔피리를 수여하도록 하겠네.
혹시 불만 있는 거인이 있다면 거수하게나.”
그는 벅찬 목소리로 이미르 의식의 종료를 알렸다.
당연하게도 이견을 가지고 있는 거인은 아무도 없었다.
베누는 나지막이 주문을 읊조리더니 잠시 후 결계가 해제되었고 공중에 떠 있던 뿔피리가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거대한 크기의 뿔피리는 내가 사용할 수 있을 만큼 크기가 작아졌다.
“공식적으로 선포하겠다. 제 7대 전쟁군주이자..”
영롱한 백색의 자태를 뽐내고 있는 집결의 뿔피리.
드디어 이 뿔피리가 내 손에 들려있다.
이게 내 손에 있다는 뜻은 바로...
“우트그라드의 통치자는 카이드로젠이네!”
**
드디어 우트그라드의 여정이 끝났다.
칸 제국을 멸망시킨 주범 중 하나인 거인족을 내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내 밑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수십 명의 거인 군단.
칸 제국을 멸망시키는 수많은 요인 중에 겨우 하나를 클리어했을 뿐이지만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벌써 천하를 통일한 것만 같은 격한 성취감을 느꼈다.
“당신은 처음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았지. 잘 부탁하네, 카이드로젠.”
“이제는 어이 인간! 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겠군! 에잉, 관계가 불편해졌어!”
“카이드로젠님! 축하드립니다!”
리올라와 베누 그리고 길버트 이 3인방은 돌아가며 나의 즉위를 축하했다.
그리고 멀리서 쭈뻣쭈뻣하며 다가오는 겔미르. 그는 리올라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올라, 나는 너무 많은 죄를 지었어. 그대의 부족원들을 학살한 나를 벌해주게.”
겔미르의 놀라운 기행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리올라에게 자발적으로 잘못을 고하는 모습!
“벌? 음..이제부터는 여기 있는 통치자님의 말씀을 따라야겠지. 그렇지요, 카이드로젠님?”
"그래, 확실히 할 건 하고 넘어가야지."
겔미르를 바라보며 따끔하게 얘기했다.
"죽은 낮벼락 부족원의 시체를 찾아서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러주게."
“알겠다.”
"알겠다?"
“..알겠습니다.”
"하루에 한 번씩은 반드시 리올라에게 미안하다고 사죄해라. 기한은 무한정이야. 죽을 때까지 그녀에게 사죄하며 살아가라."
“알겠습니다.”
"특별히 말은 편하게 하게 해주겠다, 겔미르. 고마운 줄 알아라."
“고맙...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잔뜩 상기 된 표정의 겔미르. 이 정도면 리올라에 대한 위로를 어느 정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리올라의 마음이 넓어서 다행이다. 자신의 부족을 살해한 배신자를 너그러이 용서해주다니..
리올라의 동족을 위한 신념은 그 누가 봐도 박수를 쳐주기에 이상 할 것 없었다.
“저기 그..리트가르님께서는 어디 계시지?”
겔미르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주 멀리.“
”멀리?“
"그렇다."
”그분을 만나보았나, 카이드로젠?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셨나? 아니다. 그냥 그분의 위치를 알려주게. 내가 지금 당장이라도 만나러 가볼 터이니.“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겔미르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살짝 실망한 기색이 보였지만 그는 납득한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시간이 필요하시겠지..“
"분명히 약속하지, 겔미르. 때가 되면 리트가르를 반드시 이곳으로 모셔올 수 있도록 하겠다.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그래..”
리트가르의 위치는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지금 찾아간다고 그가 우트그라드로 돌아오려고 할지는 미지수였다.
더구나 인간의 도움을 받은 겔미르가 그를 찾아왔다고 하면 리트가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예상하기 어려웠다.
“주제넘은 말일 수도 있지만, 겔미르.”
“무슨 일이지?”
“왜 엘로함 님께서는 뿔피리를 사용해서 리트가르 님을 소환하지 않으셨는지 혹시 알고 있나? 그분께서 살아계실 적에 몇 번이고 물어봤지만 통 답변을 해주지 않으시더군.”
“그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겔미르.
“그분께서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아..그렇군.”
리올라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고 베누는 수염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겔미르의 아픈 곳을 더이상 찌르지 않기 위해 급히 화제를 돌렸다.
“어이! 카이드로젠! 이제 당신의 계획은 뭐지?”
"난 이제 칸 제국으로 돌아가 보겠다."
“벌써간다고?”
“아니, 왜 벌써 가려는 건가!”
“연회라도 즐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깜짝 놀라며 카이드로젠을 만류하는 거인들. 나는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애써 외면했다.
‘아직 여유를 부리기엔 일러.’
아쉽지만 이들과는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황궁을 너무 오래 비워 힘들어하는 에린의 곡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칸 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채비를 했다.
“이..이렇게 가시면 문제가 생깁니다!”
“무슨 문제?”
“통치자가 되시려면 신고식을 해야 합니다!”
“그..그래 맞다! 우리가 특별히 제조한 술을 마셔야 하는 전통이 있단 말이다!”
어설프게 연기를 시도하는 길버트와 리올라.
우트그라드에 그런 신고식과 전통은 없다.
"거짓말 하지 마라, 리올라. 다 티 난다."
“그..그치만 너무 급한 거 아니냐? 정식으로 즉위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칸 제국은 나를 필요로 한다. 급히 가봐야 해."
나의 단호한 어투에 리올라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봐라! 잠깐이면 돼!”
리올라는 아쉬운 기색을 보이며 급히 부족원들을 다시 불러모았다.
순식간에 오와 열을 맞추어 각을 잡고 사열한 거인족들.
겔미르와 베누, 길버트도 듬직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거지?"
단상 위에 오른 리올라는 나를 향해 소리쳤다.
“떠나기 전에 이것 하나만은 알아둬라!
그대는 이 위대한 대지! 우트그라드에서 언제나 환영받을 존재라는 것을!”
나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당연하지 않나? 나는 이미 너희들의 군주..“
”자, 자! 우리의 통치자께서 집에꿀 발라놓고 오셔서 얼른 가보셔야 한다는구나! 어서 보내주자! 형제들이여!“
철커덕!
리올라는 도끼를 땅으로 내리치며 주먹을 심장에 갖다 댔다.
철커덕! 철커덕!
잠시 후 모든 거인이 리올라의 행동을 따라 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우트그라드의 위대한 전사들이 통치자에게 예를 표하는 인사 방식.
나는 벅차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칸 제국으로 그들을 뒤로했다.
”감사합니다, 카이드로젠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빨리 가버려라! 이 나쁜 놈아!“
”길버트! 통치자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인가!“
”에라이 싸가지 없는놈! 잘먹고 잘 살아라!“
”리올라!“
멀어지는 거인들에게서 전율이 일정도로 감동적인 외침이 가슴을 울렸다.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카이드로젠은 입꼬리를 한껏 치켜세우며 만족스럽게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거인들의 우렁찬 목소리는 우트그라드 전체를 메아리치며 한참을 울려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