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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34화 (35/72)



〈 35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34화
겔미르는 카이드로젠의 말에 돌연 듯 리트가르를 떠올렸다.
그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한 명의 전사이자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가장 정의로운 거인.
겔미르가 그를 본 것은  한 번뿐이었지만 그 한번이 겔미르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

“야, 겔미르! 소식 들었냐?
”무슨 소식?“
”페스카나 제국으로 파견 가신 리트가르님께서 인간들을 학살하셨다는 소식 말이야!“
”뭐..뭐라고?“

어린 시절의 겔미르는 엘로함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아직 정식으로 전사로 인정받기 전이다.
인간 친화적인 전쟁군주의 통치에 따라 겔미르는 인간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노력만 한다면 언젠가는 그들과의 관계가 개선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

”리트가르 님께서 인간을 학살하셨다고? 도대체 왜?“
”그 이유야 나도 모르지. 지금 인간들이 엘로함님께 찾아가서 고래고래 항의하는 중이야.“

겔미르와 절친한 사이인 하디야르는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존경하는 서리도끼 부족의 리트가르 님께서 그런 만행을 저지르셨다니!
푸르딩딩하게 어린 두 거인은 한참을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믿을 수 없어. 이건 뭔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해.“
”지금 리트가르 님께서 우리쪽하고도 연락이 끊기신 모양이야. 낮벼락 부족에서 조사단을 준비하고 있다더군.“

거인족이 파견 나간 인간을 배신한 전대미문의 사건은 우트그라드 전체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전쟁군주 엘로함은 사건을 조사하기위해 급히 조사단을 꾸리고 있었다.

”분명 무슨 함정에 빠지신 거야. 내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믿을  없어.“
”겔미르, 네가 뭐 어쩌려고?“
”페스카나 제국으로 가봐야지.“

겔미르가 위치한 곳은 북부의 미코노스 평원. 어린 전사들의  사냥터인 이곳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나아가면 페스카나 제국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는 도끼를 등에 메고 무작정 뜀박질을 시작했다.

”야야!  미쳤어? 낮벼락 부족에서 조사하러 간다잖아!“
”그쪽 부족은 뭔가 맘에 안 들어. 무서우면 집에나 가라!“
”무섭긴!  거면 너나 집에 가라! 괜히 리트가르 님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고!“

겔미르와 하디야르는 하루빨리 리트가르가 이끄는 서리도끼 부족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우트그라드에서 가장 용맹한 전사라고 불리는 서리도끼 부족.
그들은 인간 세계로 파견 나가는 임무를 도맡았고 그만큼 인간과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평소 얼굴 한번 본  없는 리트가르였지만 최전방에 나가서 거인족의 명예를 드높이는 그를 동경했다.
그런데 갑자기 리트가르의 인간 학살이라니?

”괜히 따라와서 짐이나 되지 마라, 귀찮으니까!“
”내가 할 소리!“

겔미르와 하디야르는 페스카나 제국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부족장의 허락 없이 인간 세계로 발을 들이는 것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지만, 뒷일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우상, 리트가르의 명예를 되찾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들은 리트가르가 아무 이유 없이 인간들을 학살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쿵 쿵 쿵 쿵

북쪽을 향해 한참을 뛰어가던 겔미르와 하디야르.
그들은 이윽고 폐허가 된 페스카나 제국에 도착했다.

”이..이건..“
”정말 리트가르 님께서 학살하신 건가?“

무참히 박살 난 마을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누군가 작정하고 파괴한 형상이었다.
바닥에 찍혀있는 큼지막한 발자국과 부러진 도끼 파편은 거인족의 행위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뭔가 이유가 있으셨을 거야.“
”겔미르! 저기 저거!“

하디야르는 무언가 발견한 듯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곳에는 푸른색의 도포 하나가 어지럽게 놓여져 있었다.

”이건 분명..“
”그래 맞아. 이건 서리도끼 부족원이 입는 옷이다.“

서리도끼 부족을 상징하는 푸른색 깃.
그 도포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가득했다.

”누구의 피지? 설마 우리 거인족의 피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겔미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면 진위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캐물을 작정이었다.

”하디야르, 주변을 샅샅이 뒤져 보..“

순간 번쩍하며 시야가 하얗게 변해버렸고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폭발.

콰아앙

”끄아아악!“
”뭐..뭐야? 크악!“
”내..내 다리가! 아아악!“

하디야르는 다리를 부여잡고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다.
폭발에 멀리 튕겨져 나간 겔미르는 하얗게 변한 시야에 당황스러워 몸을 웅크렸다.
하얗게 변해버린 시야 때문에 하디야르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쾅 쾅 

거기다 소나기처럼 내려치는 포격에 상황판단이 어려웠다.

'폭발 마법을 쓰는 자들인가? 그럼 역시 페스카나 제국? 아니면 다른 인간의 동맹국일 수도..놈들의 숫자는 몇이지? 포격은 어디서 하고 있는 거지?'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없는 상황에 놓인 겔미르.
그는 몸을 납작 웅크린 채 하디야르가 질러대는 비명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쏟아붓던 폭탄 세례는 잠시 멈추었고 겔미르는 곧장 하디야르의 위치를 찾았다.

”하디야르!“
”이..이거 진짜 위험해..이것 좀 봐..“

하디야르는 지혈을 위해 감싸고 있던옷가지를 덜어냈다.
그러자 왼쪽 무릎 아래로 잘려나간 다리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지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양의 피.

”이..이런 개새끼들!“
”겔미르, 흥분하지 마. 전사는 언제나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댔어.“
”일단 일어서.  놈들이  거야.“

겔미르는 하디야르를 부축하며 겨우 일어섰다. 몸을 일으켜 세우자 멀지 않은 곳에서 어느 인간의 군대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눈에 어림잡아봐도 그들의 능력 밖의 숫자였다.
자신의 다리에서 눈을 못 떼던 하디야르도 잠시 후 고개를 들어 인간의 군대를 확인했다.

”야,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닥쳐.“
”겔미르.“
”닥치라니까.“
”별말도 안했는데 뭘 닥쳐.“

겔미르는 하디야르가 무슨 말을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클리셰.
그는 절대 하디야르를 두고 도망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겔미르.“
”아, 닥치라니까!“
”내  들어! 이렇게 붙어있다간 우리 둘 다 죽어.“

그는 겔미르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하디야르의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

”난 죽을 생각 없어, 겔미르. 일단 우리끼리 거리를 벌려놓고 그들과 싸워야 해.
한 곳에 몰려있으면 놈들이 좋아하는 구도잖아.“
”그건 맞지..“
”정신 차려 새끼야. 우린 살아서 돌아간다. 우리 같이 서리도끼 부족의 위대한 전사가 되기로 했잖아?“

하디야르는 찡긋 웃어 보였다.

”그래도 있잖아..“
”또 뭐?“
”우리..혹시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그거 한번 해보자.“
”그거?“
”부족원들이 전쟁 나갈 때 하는 말 있잖아.“
”그걸 지금 왜..“

겔미르는 하디야르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친구가 하고 싶어 하는데.
잠시 고민하던 겔미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근엄한 목소리로 구호를 선창했다.

”명예로운 전투를.“
”그래, 명예로운 죽음을.“

**

명예로운 죽음. 그것은 우트그라드의 전사라면 누구나 꿈꾸는 죽음이다.

겔미르와 하디야르.

그들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사답게 싸우는 것을 택했다.

”리트가르 님께서 우리를 보신다면 분명 자랑스러워 하실 거야.“
”나도 동감이다.“

리트가르가 왜 인간을 학살했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인간이 왜 자신들을 공격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겔미르와 하디야르가 본능적으로 느낀 직감은 눈앞에 보이는 인간이 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다짜고짜 자신들을 공격하는 인간들.
리트가르 님도 분명 그들의 함정에 빠지셨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 일어서.“

하디야르는 겔미르의 부축을 받고 너덜거리는 다리로 겨우 일어섰다.

”일어날 수 있겠어? “
”저길 봐. 인간들이 거의 도착했군.“
”일단 이거라도 잡아. 부목으로 쓰던가.“

하디야르에게 통나무를 뽑아 건내는 겔미르. 그는 통나무를 목발처럼 짚고 조심스레 중심을 잡았다.

”오우, 길이도 적당하고. 나한테 딱이야.“
”다행이네.“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얘기하고 있었지만 무서웠다. 다리는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후들거렸고 시야는 지극히 좁아졌다.
하지만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함께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또 다른 느낌은 기대감이었다. 우트그라드에서 하던 시시한마수 사냥은 질린 지 오래다.

진짜 전사다운 싸움.

 순간은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상황이었다. 비록 예상치 못하게 상황이 빨리 도래하긴 했지만 그들의 가슴은 쿵쾅거렸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서 힘이 나네.'

둘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로의 눈빛을 확인하며 천천히 인간 군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가자,하디야르.“
”그래.“

**

그들은 그렇게 무모한 전투를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인간들은 그들을 향해 가차 없이 폭발 마법을 퍼부었다.
한눈에 봐도 그들에게 승산은 없었다.

”이거 재밌는데?“
”미친놈! 이게 재밌냐?“

하지만 그들의 투혼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부축하며 용맹하게 인간들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쿠콰쾅

페스카나 제국의 병력들은 사방에서 동시에 공격해왔다.
앞전에 리트가르를 상대해서인지 거인과 싸우는데 요령이 생긴 듯했다.
체급의 차이를 숫자로 메꾸어가며 겔미르와 하디야르를 서서히 압박했다.

”리트가르의 부하들을 죽여라! 망할 거인족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들이다!“
”폭발 마법을 멈추지 마라! 계속 캐스팅해!“

잠시 후 다시 한번 폭발 마법이 시전되었고 거인들을 향해 무차별 폭격이 내려쳤다.

  쾅

”크아아악!“
”하디야르!“

다리 부상이 심각하던 하디야르는 결국 그들의 공격에 쓰러졌다.
잠시  인간들은 하디야르의 온몸에 쇠뇌 살과 창을 쑤셔 넣으며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았다.

”하나 잡았다! 다들 힘을 내라!“
”예, 폐하!“

'하..하디야르..'

겔미르는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쇠창살이 박힌 하디야르를 보았다.
그의 죽음은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고 동시에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이제 인간들의 공격은 겔미르 하나에 집중되었다. 용맹하게 싸우던 겔미르도 인간들이 펼치는 온갖 공격으로 점차 지치기 시작했다.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이 희미해짐을 느꼈다.

”하아..하아..“

겔미르는 자신의 결말을 인지했다.
인간 군대의 숫자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펄럭이는 깃발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싸움에서 그는 도저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 까진가?“

현실을 직시한 겔미르는 이상하게도 전혀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분노를 넘어서서 극도로 차갑고 냉정해진 그의 도끼질은 마치 아수라를 연상케 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춤을 추듯 전장을 휘젓는 겔미르의 모습에 인간들은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대장님, 아군의 사상자가 엄청납니다! 마법사의 말대로 원거리에서 계속 마법을 퍼붓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차피 한 놈 밖에 안남았는데  하러 그러느냐? 모든 창기병들을 전진시켜라!“

겔미르의 위력에 인간들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승부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잠시 후 그는 온몸의 기력을 다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역류하는 피를 쏟아내며 그의 입가는 새빨갛게 물들었다.
인간들은 그를 조여왔고 죽음의 그림자는 서서히 커져만 갔다.

”전 병력, 쇠뇌 장전!“

인간 대장의 명령에 따라 공격은 잠시 멈추었고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겔미르는 이 정적이 오래가지 않음을 직감하고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곧 따라가마, 내 친구여.“

잠시 후 엄청난 쇳소리가 전장에 있는 모든 병사들의 귀를 찔렀다.

쿠콰콰카쾅

”끄아아악!“
”끄아악!“

난데없이 비명을 지르는 인간들 때문에 겔미르는 다시 눈을 떴다.
어딘가 낯이 익은 듯한 수수께끼의 인물.
커다란 글레이브를 등에 지고 있는 거인의 형체.
엄청난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누더기에 가까운 푸른 갑주.
그는 인간 군대의 한가운대로 진입하여 불도저처럼 그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누..누구지?“

그가 휘두르는 글레이브에 인간 군대는 추풍낙엽으로 쓰러졌다.
마법사들은 급히 폭발 마법을 캐스팅하여 날려보지만,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해 한참을 빗나갔다.
일순간에 혼란에 빠진 인간 군대.
겔미르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저..저 자식이 다시 돌아왔다!“
”도망간 거 아니었나? 언제 다시 돌아온 거냐!“
”그..그건 모르겠습니다! 얼른 피하시죠, 대장님!“

인간들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정체불명의 거인은 인간 대장의 목을 움켜잡고 심벌즈를 치듯 압착시켰다.
위풍당당하던 인간의 사지는 넝마가 되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잠시 후 겔미르를 향해 다가가는 거인.
그는 겔미르를 흔들며 물었다.

”네 놈이 왜 이곳에  것이냐?“
”하아..다..당신은?“
”상처가 심각하군.“
”당신이 설마 리트가르..흐윽..“

겔미르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젠장. 그래 내가 리트가르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자.“
”허억..허억..죄송합니다. 리트가르님..“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겔미르.
리트가르는 슬픈 눈동자를 하고 그를 끌어안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다  잘못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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