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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33화 (34/72)



〈 34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33화

“정말인가? 정말 겔미르 님께서 오셨나?”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보십시오!”
“어? 어어?”

거인 하나가 가리킨 손가락의 끝에는 정말 겔미르가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겔미르. 그의 등장에 조용하던 장내는 일순간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겔미르 님께서는 통치자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인간에게 우트그라드를 넘겨주지 않으실 작정이다!”
“그래! 이래야 이미르 의식이지!”
“우트그라드를통치할  있는 지배자는 오직 거인족이다!”

비록 카이드로젠에게 도움을 받긴 했지만, 인간의 통제를 받기에는 거부감이 있었던 몇몇 서리도끼 부족원.
리올라와 베누가 주도한 여론에 휩쓸려 쉬쉬하고 있던 그들은 겔미르가 등장하자 휘파람을 불며 반겼다.

“휘익! 휘익!”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겔미르님!”
“역시 이미르 의식에 참여하시는군요!”
“저희는 믿고 있었습니다! 휘익! 휘익!”

‘우디르급 태세 전환이군.’

그 광경을 보며 씁쓸한 듯 입술을 깨무는 리올라.
가능한 희생자 없이 이미르 의식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그녀는 겔미르의 등장에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자웅을 겨루는 이미르 의식.
동족을 지킬만한 힘을 가진 인물인지 증명하기 위한 의식은 필연적으로 피튀기는 결투가 되는 것이 자명한 일이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듯 입을 앙다물며 나를 바라봤다.

“리올라.”
“응?”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그에게 승산은 없으니."
”또 무슨 작전이 있는 건가?“
“아니, 이번엔 없다.”
“그런데 그에게 승산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지?”

나는  없이 리올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이유를 알  같기도 하군.”
“오호라, 알 것 같나?”
“자네가 칸 제국의 황제이기 때문 아닌가.”
“하하하! 장족의 발전이로군. 주입식 교육에도 장점이 있구나!”

만족스럽게 웃는 카이드로젠을 보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는 리올라.
하지만 얼굴에 만연한 긴장한 기색은 차마 감출 순 없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입꼬리를 한껏 과장스럽게 치켜올렸다.

“나는  제국의 황제다.”
“그건 알겠으니까 제발 그만 얘기해다오. 귀에 딱지가 앉을  같으니.”

어느새 베누의 앞에 가까이 다가온 겔미르. 그가 이미르 의식에 참여한다는 의사를 표현한다면 통치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결투가 시작된다.

‘어쩔 수 없이 전투는 한번 해야겠군.’

겔미르와 싸우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뿔피리를 얻기 위해선 겔미르를 확실하게 제압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우트그라드의 통치자로서 자격을얻게 되는 거니까.
충분히 예상했던 상황이었지만 칼자루를 쥔 손에는 은은한 긴장감이 흘러나왔다.

‘그만큼 겔미르는 방심할  없는 위험한 존재다.’

거인화를 실행하고 단 10분.
10분 안에 반드시 그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만약 10분 만에 제압하지 못해서 거인화 지속시간이 끝나버린다면?
거기다 에린의 런닝쪼가리 갑옷 이외에 부위에 도끼질을 당한다면?’

카이드로젠이 대단하긴 하지만 인간인 상태로 겔미르와 대결을 펼쳤다가는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른다.
지금의 카이드로젠은 소위 템빨로 겔미르를 제압해야 하는 상황이다.

‘거인화의 힘이 꺼지기 전, 조기에 결판을 내야 해.’

이미 그와 한번 힘을 겨뤄봤기 때문에 전투 구도에 대한 견적은 얼추 나왔다.
압도적인 힘을 바탕으로 찍어누른다.
초반부터 불도저같이 돌진해서 단숨에 승부를 낼 것이다.
거인화의 비술과 카이드로젠의 육체가 합쳐진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엄청난 힘은 이미 낮벼락 둥지에서 한번 경험한 바 있다.
거인화가 풀리기 전, 10분 안에 전력을 다해서 압박하면 승리는 분명 내 쪽에 가까울 것이다.

‘괜히 10분을 넘겼다가는 무슨 참사가 일어날지 몰라.’

초반 러쉬를 계획하는  다른 이유.
소설  카이드로젠은 칸 제국을 침공해온 거인족을 피해 달아나기만 했다는 묘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술과 여자로 자신의 몸을 양껏 망가뜨린 그는 자신의 제국을 지킬 힘이 없어 비겁하게 도망 다녔다.
황제가 도망만 다니는 것을 본 병사들까지 전의를 상실한 것은 덤이다.
덕분에 맹렬한 기세로 침공한 거인족은 삽시간에  제국을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비록 소설 속에서 카이드로젠과 겔미르의 일대일 대결은 없었지만, 만약 맞붙었다면 높은 확률로 패배했을 가능성이 컸다.

‘비록 지금은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겠지.’

그리고 서리도끼 부족 역사상 최강의 전사라고 평가받는 겔미르가 아무런 준비 없이 왔을 리가 없다.
그는 무력도 무력이지만 지력도 상당한 인물이다.
괜히 시간을 끌어서 변수를 만드느니 초반부터 전력을 다해 몰아붙여 작전을 펼칠 수도 없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 우두커니 있는 겔미르를 노려보며 잠시 후 있을 대결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겔미르, 의식에 기어코 참여할 텐가?”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게 된다면 의식이 끝나게 되네.”

이미르 의식의 규칙 중 하나.

의식을 시작하고부터 6시간이 지나도 승부가 가려지지 않을 경우에는 결계 속에서 가장 오래 있었던 인원을 최종 승자로 지목한다.
경쟁자의 힘이 빠지길 기다렸다가 의식에 참여하려는 꼼수를 방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겔미르가 늦게 참여하면 할수록 나는 도망 다니며 시간만 끌어도 유리하다는 사실.
그도 이 사실을 분명 알고 있을 텐데 무슨 꿍꿍이인지 아직 참여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었다.

'너의 패를 보여라. 뭘 하고 싶은 거냐, 겔미르?'

잠시 후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그는 입을 열었다.

“카이드로젠, 자네가 한 말은 진심인가?”
“무슨 말?”

정적을 깨고 질문을 날리는 겔미르.

“자네가 내게 했던 그 모든 말들 말이다.”
“원한다면 다시 해줄 수도 있다. 내가 했던 말들은 모두 진심이었어.”

다시 침묵.

속을 알  없는 그의 눈동자에서 왠지 모를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네 놈이 이곳에 온 이유는 뭐지? 솔직하게 말해라. 모든 거인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명확하게 할 수 있도록.”

겔미르는 여전히 의식에 참여하지 않고 결계 밖에서 대화를 시도했다.
이건 예상 밖에 상황이지만 오히려 좋다.
잘하면 겔미르는 물론 서리도끼 부족원들의 마음까지 얻을 수 있는 상황이다.
장내의 모든 거인들은 나와 겔미르의 대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잘 들어라."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래를내려다보며 근엄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첫 번째는 평화다. 나는 자네가 가진 전쟁 의지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
“무슨 수로?”
“그건 영업 비밀이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말해봐야 믿지도 않을 테고.”
“그래, 그건 아무래도 좋겠지.”
“내가 가진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네들을 달래주는 것이 필요했다. 페이튼이란 놈이 이곳을 쑥대밭처럼 헤집어 놓고 종적을 감췄으니 말이지.”

페이튼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장내는 술렁거렸다.

“페이튼을 알고 있군.”
“평소에 거인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아주  알고 있어.
자네는 페이튼은 물론 잉그람 대륙의 모든 인간 사회를 파괴하고 싶어했겠지.
내가 이곳에  이유는 자네의 그 전쟁 의지를 막고 싶었기 때문이다.”
“...”
“나도 자네들 못지않게 평화라는 단어를 좋아하거든."

차분하게  얘기를 듣고 있는 겔미르.

그를 보며 속으로 놀란 마음을 애써 다스렸다. 그렇게 괴팍하던 겔미르가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다니!

”두 번째는?“
“두 번째 이유는 난 자네들을 이용해서 그 페이튼이란 놈을 죽이고 싶기 때문이다. 거인과 인간의 관계를 어지럽힌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그를 포함한 에즈만토스 왕국을 갈기갈기 찢어놓기 위해선 자네들의 도움이 필요해.”
”평화를 원하지만 에즈만토스 왕국과의 전쟁을 원한다?“
”그렇다.“
”왜지?“

다시 웅성거리는 장내.

평화를 원한다던 카이드로젠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모순적인 의지를 피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다.

“평화를 원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실시간으로 근본도 없는 머저리 같은 무리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그들 중에 소수는 하나의 나라를 만들 만큼 강성해지지.
과연 그런 놈들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할까?”
“...”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절대 아니라고 말할  있다.
나는 확신 한다. 그놈들은 우리를 침략하고 약탈할 것이다.”

겔미르는 내 이야기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건 인정한다. 역사가 증명하는 내용이니까.”
“겔미르, 너는 평화와 명예를 위해 모든 인간을 적으로 돌리려 하고 있다.
그건 너무 위험할뿐더러 일차원적인 생각이다. 평화와 명예를 동시에 지키기 위해선 우리가 힘을 모아야 가능한 일임을 반드시 알아야 해.”
”네가 말하는 근본도 없는 머저리란 놈이 혹시 페이튼인가?“
“그렇지. 그는 이미 내 아버지를 죽였다. 난 그를 반드시 죽여놓을 작정이야.”
“네 놈의 말은 거의 맞는 말이다.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말이지..”

겔미르는 시선을 똑바로 고정한 채로 계속 질문을 이어나갔다.
흡사 까다로운 면접관을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네 놈처럼 말하는 인간이 그동안 없었던 것이 아니다. 모두가  놈과 비슷한 얘길 했어. 평화를 위해 힘을 합치자고!”
“...”
“그럼 우리 모두가 좋아질 것이라고 얘기했지. 하지만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치욕적인 수모뿐이었다! 네 놈이 알고 있는것처럼 리트가르님은 인간의 평화를 지켜주려다 결국 배신자로 몰렸다. 그분은 역대 최악의 명예를 가지고 쓸쓸히 잊혀져가고 있다!
전(前) 전쟁 군주였던 엘로함은 어떤가?
인간에게 호의를 베풀다  모양 저 꼴이 됐다! 그런데 이번에  인간을 믿어달라고?”

언성이 높아지는 겔미르.
그는 인간들에게 당한 거인들을 추억하며 분노로 치를 떨었다.

“네 놈은 그들과 다르다고 말하지만 그걸 어떻게 믿지? 도대체 우리가 무슨 근거로 네 놈을 믿을  있겠나?”
“일단 내가 가져온 치료 약이 효과가 있지 않나.”
“언제 부작용이 생길지 모르는 거지!”

우트그라드의 숲을 가득 메우는 겔미르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아따, 그놈 참. 목소리 한번 우렁차네.'

겔미르가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나는 목소리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뉘앙스를 읽었다.
나는 확신했다.
이 정도면 거의 다 넘어왔다고.

‘좋다.’

이제 내가 가진 패를 공개할 시간이다.
겔미르가 콜을 외칠 수밖에 없는 나의 비장의 패.

"겔미르. 날 믿어준다면 내가 약속 하나 하지.“
”무슨 약속?“

숨을 한번 골랐다.
그리고 잠시 후.

내 발언을 들은 모든 거인들은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리트가르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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