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32화
콰과광
겔미르는 두 손에 쥔 얼음 쌍도끼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하지만.
눈에 보일 정도로 확연히 무뎌진 겔미르의 움직임. 감정적으로 휘두르는 그의도끼질은 카이드로젠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흐아압!"
파앗
거기다 거인의 몸을 한 카이드로젠의 스피드는 인간일 때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살벌하게 날아드는 도끼날에도 유유히 빠져나가는 날렵한 움직임.
방심하다 한 대 맞긴 했지만...
겔미르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회피하며 백스텝을 밟았다.
"읏차."
겔미르는 도끼를 어깨에 들쳐메고 육탄전으로 달려들었다. 하복부를 향해 강하게 스피어를 날리는 겔미르.
"흐압!"
겔미르가 전력을 다해 달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이드로젠의 무게중심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직 힘만으로 겔미르를 떼어내며 다시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이..이자식이!"
'역시 거인화의 비술은 대단한 힘이야.'
모든 면에서 카이드로젠이 가지고 있던 능력이 배로 증가한 느낌이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단점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몸이 커지면서 파워가 늘어났다면 기회비용으로 스피드가 떨어지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이 거인화의 비술은 오직 육체의 레벨을 증가만 시키는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기회비용 따윈 없다.
'말 그대로 로우리스크 하이리턴.'
아니, 노리스크 하이리턴이다. 거인화를 실행하는데 리스크란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이런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니!’
체스카 신전에서 그 고생을 하면서 비술을 얻어냈다는 사실이 새삼 뿌듯하게 느껴졌다. 비록 10분 정도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지만 그게 어디인가.
주인공 벤하트도 이 능력을 가지고 활약한 에피소드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미안하게 됐다, 벤하트. 이번 회차에서는 내가 환상적으로 사용해주마.
'굳이 단점을 하나 뽑아보자면 몸이 거대해져서 눈에 너무 잘 띈다고나 할까.'
단점이라곤 겨우 이런 것밖에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사기적인 능력.
거인화의 비술과 합쳐진 카이드로젠의 초월적인 육체는 과연 한계가 어디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내 쌍도끼에 한 번만 걸리면!"
"걸리면?"
"이이익!"
휘익 휘익
겔미르는 다시 도끼를 뽑아 들고 악을 쓰며 휘둘러댔지만, 허공을 가르는바람 소리만 무성했다.
시간이 지나자 점점 느려지는 도끼날.
그와 대비해서 카이드로젠의 움직임은 여전히 날쌘 모습을 보여주었다.
몸집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재빠른 스피드는 구경하는 거인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리올라와 베누는 카이드로젠에게 시선을 고정 한 채로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이 리올라 부족장, 저 양반 정말 대단하구먼! 어찌 거인의 몸으로도 저리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거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서도 믿기 힘든 움직임입니다. 겔미르의 공격을 이렇게도 쉽게 회피하다니요!"
"그가 흥분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정말 놀랍군 그래."
"거인의 몸으로 움직이는게 처음이 아닌 것처럼 보여집니다. 정말 대단하는 말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한쪽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모두 엿들었다.
역시나 리올라와 베누는 리액션이 괜찮은 거인이다. 겔미르와의 이야기를 매듭짓는 날에는 반드시 이 말을 해줄 것이다.
'경배하라, 칸 제국의 황제를!'
약간 오그라드는 문장이지만 내가 기분이 좋은데 뭐 어떠랴!
카이드로젠의 육체와 류지상의 지식이 곁들어진 나는 벌써부터 말도 안 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칸 제국을 멸망시킨 주범.’
칸 제국의 재앙이라 불리는 겔미르를 상대로 단 한 순간도 위험한 상황이 없었다.
비록 거인화를 실행한 상태라서 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격차는 실로 엄청났다.
'생각한 것보다 더 대단해! 비술의 힘이 이 정도일 줄이야!'
"허억..허억.."
거인화의 뽕맛에 취해있을 무렵 겔미르는 체력이 딸리는지 숨을 헐떡였다.
그는 뭐라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의 힘을 압도적으로 넘어서는 존재는 그동안 만나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가 리트가르에 대한 얘기를 할 것 까지도.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겔미르, 나는 리트가르를 존경한다."
"그 입.."
"그의 숭고한 정신은 후대에 오롯이 전달되어야 할 것이야.'
"닥치라니까!"
사자후를 내지른 겔미르는 우두커니 서서 나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내가 말하는 내용이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닌지 판단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속으로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겔미르의 얼굴을 아무리 자세히 관찰해봐도 표정의 의미를 해석하기 힘들었다.
졸지에 행방을 감춰버린 리트가르에 대해서 그리운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아니면 압도적인 힘을 가진 나란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인간 자체가 싫은 것일까.
'어쩌면 3개 다일 수도 있겠지.'
츠츠츠츠
거인화 지속시간인 10분이 지나고 카이드로젠의 몸이 인간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겔미르는 더이상의 공격 의사는 보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카이드로젠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겔미르.."
"크..크윽!"
겔미르는 결국 괴상한 소리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겔미르! 어디 가는 겐가!"
베누가 급히 불러보지만, 그는 이미 동굴 밖을 뛰쳐나간 뒤였다.
겔미르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너무 많은 정보가 튀어나와 당황스러울 것이다.
거인화를 사용하는 인간.
그리고 잊혀진 존재였던 리트가르에 대한 언급까지.
그에게는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 당장 결판을 낼 필요는 없겠지.'
굳이 자리를 피하는 겔미르를 쫓아갈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그가 어떤 방향으로 의지를 표현할지는 알아서 나올 테니까.
멀찍이 거리를 두고 구경하던 거인들이 내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뜀박질로 가장 먼저 내게 도착한 길버트.
그는 경외 어린 눈빛으로 말을 걸었고 뒤이어 베누와 리올라가 도착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카이드로젠님. 겔미르를 어떻게 그리 쉽게 상대하신 겁니까?"
"그가 몹시 흥분한 상태여서 운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제가 인간으로 돌아왔을 때는 공격을 하지 않더군요."
"놀라운 인간! 겔미르는 어디로 간겐가? 혹시 짚이는 것이 있다면 말해주게! 설마 또 난동을 부리려는 건 아니겠지?"
베누는 겔미르가 또다시기행을 벌일 것을 걱정했다.
내가 보기엔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기행을 벌일 작정이었다면지금 당장 시작했어도 이상할 것 없었으니까.
"어디로 갔는지는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을 보니 꽤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네요."
"긍정적이라면.."
"제가 다른 인간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허허, 우리 모두는 그것을 잘 알고 있는데 오직 겔미르만 인정하지 않고 있구나."
수염은 매만지며 혀를 끌끌 차는 베누.
리올라는 여전히 그의 폭력성이 걱정스러운 듯 우려했다.
"겔미르가 또 사고나 치지 않았으면 좋겠군. 시종일관 흥분한 상태여서 마음이 놓이질 않아."
"리트가르를 인정하는 인간은 처음 봤기 때문에 아마 몹시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러니까 나와의 결투를 그만두고 자리를 피해버린거겠지.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리올라."
"당장 내일이 이미르 의식인데.."
"만약 그 자리에서 내게 적대심을 표출한다면 어쩔 수 없다. 여차하면 거기서 결판을 내는 수밖에 없어. 나도 뿔피리는 포기하고 싶지 않으니 말이지. 내게 협조하지 않는 거인들은 나와 함께 할 수 없다."
리올라와 베누, 그리고 길버트를 포함한 부족원들은 카이드로젠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정말 그랬으면 한다. 우트그라드가 더이상 피로 물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리올라의 말의 모든 거인들은 겔미르가 가져온 피바람이 생각나 얼굴이 몹시 상기되었다.
동족을 해친 겔미르.
아무리 우트그라드를 위한 일이었다고는 하나 역대급으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런 거인들의 모습을 보며 마음속에동정심이 구름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저 평화롭게 살고 싶어하던 이들을 누가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들었을까.
'답은 딱 하나.'
그들을 괴물 취급하며 모욕감을 주던 인간들 때문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인간들은 한결같이 거인족을 멀리하고 혐오했다.
페이튼이 일으킨 생체실험의 부작용은 단지 그들 속에 내재 된 분노를 일깨우는 시발점이었을 뿐이다.
’이번 회차는 반드시 그들이 잉그람 대륙에서 어엿한 종족으로 대접받을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그게 내가 이 소설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하고 다들 해산하시죠.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카이드로젠."
"응?“
"작전명 호두까기 인형은 대체 무슨 뜻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가질 않아."
"음, 그거?"
작전명에 대해 궁금해하는 리올라. 사실 별 깊은 뜻도 없는데 말해줄까 말까 망설였다.
리올라의 냉담한 반응이 두려워 잠시 고민한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작전명은 모두까기 인형이다. 겔미르의 만행을 보고 모두가 비난한다는 뜻이었지."
"모두까기가 그런 뜻인가?"
"그렇다.."
"참으로 대단한 언어 유희로군"
"..."
"역시 카이드로젠이야!"
오버액션을 하며 익살스러운 말투로 놀리는 리올라.
나는 수치심에 얼굴이빨개졌다.
’차라리 욕을 해줬으면 좋겠군.‘
**
다음 날.
대망의 이미르 의식이 치뤄지는 결전의 날이다. 리올라와 베누를 포함한 우트그라드의 모든 거인족들은 의식이 치뤄지는 장소로 집결했다.
그곳에는 겔미르의 부족인 서리도끼 부족원들도 모두 위치했다.
참석하지 않은 거인은 단 한명.
서리도끼 부족장 겔미르였다.
"지금이 딱 이들을 치료하기 좋은 타이밍이군."
"안 그래도 지금 시작하려고."
아직 생체실험의 부작용을 치료받지 못한 서리도끼 부족원들.
여전히 보라색 반점이 그들의 몸을 썩게 하고 있었고 몇몇은 고통스러운 듯 거칠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리올라는 겔미르가 자리에 없는 틈을 타 거리낌 없이 그들을 치료해줄 수 있었다.
"이걸 먹어라. 그럼 자네들은 좀비로 변하지 않는다."
"가..감사합니다, 리올라 부족장님!"
"감사합니다!"
"감사는 여기 인간에게 해야지. 이 약을 가져온 자가 바로 카이드로젠이다."
치료 약을 먹고 기뻐하던 서리도끼 부족원들은 리올라의 말을 듣고 일순간에 카이드로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초롱초롱한 눈빛은일전에 린돌프를 처음 치료해줬을 때와 비슷한 눈동자였다.
"예를 표하겠습니다, 카이드로젠님."
앞으로 나서서 서리도끼 부족을 통솔하는 거인 하나.
그는 부족원을 향해 우렁차게 구호를 외쳤다.
"부대 차렷! 경례!"
철커덕
"감사합니다, 카이드로젠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은 절도있게 도낏자루를 땅에 찍으며 생명의 은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지난번에 낮벼락 부족원들도 그렇고 이번에 서리도끼 부족원도 그렇고.
내게 각을 잡고 경례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듯 마음이 몹시 감개무량했다.
내가 이끄는 칸 제국은 이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전성기를 맞이할 것이다.
"자, 이제 슬슬 이미르 의식을 시작하지. 의식을 치를 사람은 단상 앞으로 나와라."
치료를 마친 리올라는 이미르 의식의 시작을 알렸고 베누는 주술을 외워 봉인되어있던 뿔피리를 소환했다.
영롱한 백색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등장한 집결의 뿔피리.
수십 명의 거인들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뿔피리의 자태에 최면이 걸린 것처럼 넋을 놓고 감상했다.
"오오! 저것이 뿔피리!“
"말로만 듣던 뿔피리를 처음으로 보게되는구만!"
몇몇 거인족조차도 뿔피리의 실물은 처음 볼 정도로 등장하는 빈도수가 많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엘로함이 좀비가 된 이후로 우트그라드에는 한동안 통치자의 자리가 공석이었기 때문이다.
웅성거리는 그들을 뒤로하고 단상 앞으로 나가서 의식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베누."
"건투를 비네."
베누는 고개를 끄덕이며 본인이 만든 결계 속으로 나를집어넣었다.
마치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이미르 의식을 위한 결투장.
이제 앞으로 6시간이다.
6시간 동안 이미르 의식에 참여한 거인들 속에서 강함을 증명해야 우트그라드의 통치자가 될 수 있다.
관전 포인트는 겔미르가 과연 의식에 참여할 것 인가 말 것인가.
겔미르의참석 여부에 나를 포함한 수십 명의 거인들의 귀추가 주목되어있었다.
"난 차라리 겔미르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만약에 와서 또 난동을 부리면 어떡하나 고민이야."
"걱정하지 마라. 칸 제국의 황제가 여기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하이고. 어련하시겠어요."
"나를 못 믿는 건가?"
"믿어요, 믿어. 칸 제국의 황제를 안 믿으면 누굴 믿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리올라는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어이.“
”으응?“
”내가 약속 하나 하지.“
리올라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고개를 돌렸다.
”무슨 약속?“
"자네가 나를 믿은 건 절대로 후회하지 않게 해주겠다."
"..."
"칸 제국의 모든 명예를 걸고 맹세할 테니 기대해도 좋다.“
카이드로젠의 확고한 어투를 듣고 씨익 입꼬리가 올라가는 리올라.
그 광경을 본 길버트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
겔미르는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계 속으로 들어온 지 어느덧 5시간.
1시간 이내에 겔미르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사상 처음으로 단 한 번의결투도 없이 우트그라드의 통치자가 탄생하게 된다.
'그것도 좋지만 그래도 얼굴은 한번 보고 싶은데..'
아직 그로서는 나를 인정하기 쉽지 않은 걸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이미르 의식이 끝나버리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화를 한 번만 더 할 수 있다면 나의 진심을 알아줄 것 같은데..
그가 이대로 모습을 아예 감춰버린다면 리트가르의 사례처럼.
그를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쿵 쿵 쿵
그 순간 어디선가 들리는 거친 발걸음 소리. 모여있던 거인들 무리 속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그가 왔습니다!"
"누가? 갑자기 누가 왔다는 건가?"
"겔미르 부족장님이요! 겔미르 부족장님께서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