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31화
"다들 잘 보셨지요? 저것이 현재 겔미르의 의지입니다."
"저..정말 카이드로젠 님의 말씀대로 행동하는군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우트그라드의 부족장이라는 분이 이런 짓을 벌인단 말입니까? 충격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겔미르가 이곳을 습격할 것이라는 나의 의견에 반신반의하던 거인은 리올라뿐이 아니었다.
베누 부족장 또한 그가 이런 식으로 거인족의 신념을 더럽힐 것이라고는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입을 떡 벌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거인들.
겔미르는 짚을 엮어 만든 인형을 카이드로젠으로 착각하여 그에게 맹공을 펼치고 있었다.
"역시 체스카 신전을 관리하는 부족다운 실력입니다."
"내 실력이 어디 가겠는가? 평생을 주술을 다루며 살아왔는데."
베누와 길버트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주먹을 부딪쳤다.
나는 그들과 함께 낮벼락 둥지 2층에서 겔미르의 움직임을 훤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우리의 뒤편에는 몇 명 남지 않은 낮벼락 부족 원과 대지 부족원이 자리했다.
환영 주술을 다루는 고동치는 대지 부족.
그들의 능력은 이미 체스카 신전에서 겪은 다 마르드의 방을 통해 똑똑히 경험한 바가 있었다.
소설 속 내용을 모두 알고 있는 나로서도 그들의 환영에 정신을 가다듬기 힘들 만큼 그들의 능력은 대단했다.
잉그람 대륙에서 이만한 주술을 다룰 수 있는 인물이 과연 더 있을까?
'대마법사는 에린 킨드라의 칭호니까...이들은 대주술사라고 불러줘야 하나.'
그들이 만든 주술은 겔미르를 착각시키기에 충분했다. 짚으로 만든 인형 따위를 카이드로젠인 줄 아는 겔미르.
그는 한낱 짚을 향해 얼음 쌍도끼를 들고 전력을 다해서 내려치고 있었다.
"카이드로젠님, 이다음은 어떻게 흘러가지요?"
"리올라의상태를 파악하겠지요. 자신의 부하들이 임무를 잘 수행했는지 궁금할 겁니다."
"리올라 님께서 다치시기라도 한다면 큰일인데요."
2층의 시야로는 리올라의 방안까진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모를 위험에 리올라를 걱정하는 거인들.
좀비가 된 거인족의 위험성은 그들도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문제없을 겁니다."
쾅
문을 박차며 방은 나서는 리올라.
다행히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생채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뒤편에는 서리도끼 부족원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는 모습.
역시 예상대로 겔미르의 의도를 알고 있던 리올라는 그들의 공격에 순순히 당해주지 않았다.
"역시 리올라 부족장입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참 듬직하군요."
"좀비가 되지 않은 부족원가지고는 리올라에게 역부족이죠. 그리고 그들의 치료까지 성공 한 듯합니다."
리올라는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 깜빡였다.
길버트를 포함한 대지 부족원들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그녀의 윙크에 화답했다.
"자, 이제 슬슬 저희도 내려갈 채비를 하시죠. 당황한 겔미르의 표정이 벌써부터 기대되는군요."
"알겠습니다, 카이드로젠님."
**
잠시 후 겔미르는 자신이 공격하던 대상이 짚이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매우 당황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자신이 아끼는 얼음 쌍도끼조차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칠 정도였다.
"아..아니 이게 뭐야? 분명 카이드로젠이었는데!"
그는 두리번거리다니 다시 도끼를 부여잡고 리올라의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한 그는 직접 행동을 취하려는 액션을 보였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거지?”
다시 성큼성큼 리올라의 방으로 걸어간 그는 문을 거칠게 열어 재꼈다.
방안에는 그가 찾던 리올라의 모습은 온대 간데 보이지 않고 기절한 그의 부족원만 누워있을 뿐이었다.
"대체 누가 이딴 짓을 벌인 거지?"
"누가 이딴 짓을 벌인지 몰라서 묻는 거냐?"
고개를 홱 돌리며 나를 발견한 겔미르.
그는 내 뒤에 위치한 길버트와 베누, 그리고 수십 명의 부족원까지 확인하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떡하고 벌렸다.
곧이어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리올라.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이것이 당신이 원하는 우트그라드인가? 나를 죽이려는 것도 모자라 우리를 도우러 온 카이드로젠까지 해하려 하다니. 눈으로 직접 보고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어이, 겔미르 부족장. 신전 밖에 오랜만에 나오게 되었는데 이것 참..뭐라 할 말이없을 정도로 참담하구나."
리올라와 베누는 겔미르에게 실망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겔미르는 상황파악을 하느라 그들의 외침에 대답도 하지 않고 멍하니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이..이..이 자식들이.."
"상황파악은 끝났나, 겔미르? 자네의 만행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가 목격했다."
"자네에게 정말 실망이 크네, 겔미르.
내가 신전 안에만 있었다면 이런 몹쓸 일을 알지도 못할 뻔했구먼."
"그 입 닥쳐라!"
흥분한 겔미르는 도끼를 부여잡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진정해라, 겔미르. 아무리 너라도 너 혼자서는 우리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 텐데."
"그 도끼를내려놓게나. 아무리 과오가 있다지만 자네를 굳이해치고 싶은 마음은 없네."
리올라와 베누는 그를 차분히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나저나 리올라도 참 대단하군.'
리올라와 작전을 회의하며 겔미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마지막까지 고심했다.
나는 그를 살리고 싶었지만, 리올라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차였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겔미르를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내가 한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였다. 리올라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거인족의 신념을 지키는 긍지 높은 전사였다.
동족을 지켜야 한다는 거인족의 숭고한 사상.
그녀는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겔미르에게도 자신의 신념을 여지없이 투영시켰다.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겔미르를 회유시키는 작전에 동의했다.
"이런 멍청한 자식들. 단체로 아주 카이드로젠에게 단단히 홀렸구만?"
"겔미르, 흥분하지 마라.나는 그간 있었던 인간들과는 차원이 다른 인간이다."
"본인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나?"
"사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이런 미친!"
겔미르는 씩씩거리며 분노를 표출했다.
"리올라! 베누! 대체 왜 그를 감싸고 도는 것이지? 인간들이 우리에게 잘해준 적이 있기는 했었나? 항상 괴물 취급하며 이용해먹을 생각만 하는 것이 바로 저 족속들 아니었나!"
"그랬었지."
"그런데 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려고 하는 거지? 저놈이 준 치료 약에 대해 신뢰성은 확보했나? 언제 다시 부작용이 발할지도 모르는 그 약을 맹신하는 이유가 뭐냔 말이다!"
그는 도끼를 부여잡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제 뒤로 빠지세요.“
거인화를 실행하여 내 몸을 거대화시켰다. 동등한 눈높이에서 그가 휘두르는 도끼에 맞섰다. 겔미르는 거인이 된 내 모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아니 뭐냐! 네 놈도 거인족이 된 것이냐?"
"그렇다. 일시적이지만 지금은 나도 너와 같은 거인족이다."
"그래 봤자 나는 네 놈을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죽어라, 이 건방진 인간 자식!"
쾅 쾅
그가 휘두르는 도끼질에 동굴 안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겔미르! 나를 믿어라! 나는 너희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있다. 인간들이 너희들에게 준 모욕감을 모두 알고 있다는 말이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과거에 있었던 인간의 만행을 청산하기 위해서다!"
"웃기지 마라! 네 놈이 뭘 안다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마지막으로 나를 믿어주면 안 되겠나? 자네의 동의만 얻는다면 우트그라드의 평화는 내가 장담한다!"
"그 입 닥치라니까!"
콰과강
겔미르는 폭주했다.
미친 듯이 얼음 쌍도끼를 사정없이 휘둘러대며 성난 기세로 달려들었다.
"크윽!"
눈 깜짝할 사이 파고드는 겔미르의 도끼 날.
쿠콰콰콰
전광석화 같은 그의 공격에 카이드로젠의 복부가 정확하게 가격당했다. 역시 우트그라드 최강의 전사다운 매서운 움직임이었다.
아무리 카이드로젠이라도 이런 공격에 당한다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데...
'응?'
도끼에 맞아 날아가는 동시에 깊은 의문이 생겼다.
정통으로 그의 공격에 맞았는데 왜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지?
나는 겔미르에게 가격당한 복부를 이리저리 매만졌다.
‘아하.’
잠시 후 나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은 이유를 깨닫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린의 런닝 쪼가리 갑옷.‘
런닝 쪼가리 같은 가볍고 편안한 착용감의 갑옷 때문에 내가 이것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마저 잠시 망각했다.
겔미르의 도끼질을 정통으로 맞았는데도 멀쩡하다니.
성능이 아주 뛰어난 갑옷이었다!
황궁으로 돌아간다면 에린에게 특별히 칭찬한마디를 해주기로 결심했다.
"맷집은 칭찬해줄 만 하구나. 내 도끼질을 맞고도 쓰러지지 않다니!"
"진정해라, 겔미르."
"왜 가만히 막고만 있는 거냐?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이나!"
겔미르는 지면을 박차며 높이 뛰어올랐다.
두 손에 도끼를 쥐고 전력을 다해 내려치려 하는 그의 얼굴에는 엄청난 살기가 느껴졌다.
'도끼가 얼굴로 날아온다면 이거 위험한데?'
"위..위험합니다, 카이드로젠님!"
나를 걱정하는 거인족을 뒤로하고 공중에 떠 있는 겔미르를 향해 힘껏 외쳤다.
"리트가르! 리트가르를 알고 있나, 겔미르!"
"뭐..뭐라고?"
"리트가르 말이다!"
겔미르는 내게 도끼를 내려찍지 않고 사뿐히 땅으로 착지했다.
리트가르라는 말을 들은 그의 표정은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다.
"나는 리트가르를 알고 있다."
"..."
"인간들의 패악질을 견디지 못한 리트가르가 하나의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우트그라드에 해가 되지 않기 위해 평생을 몸을 숨기고 살아갔지."
"그..그걸 네 놈이 어떻게.."
"엘로함은 그를 어쩔 수 없이 반역자로 취급하여 인간들의 반발심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리트가르의 훼손 된 명예는 어느 누구도 바로잡아 주지 못했지."
"..."
"나는 리트가르를 지지한다. 동시에 그의 숭고한 신념을 잉그람 대륙에 널리 펼쳐 보일 것이다. 칸 제국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이건 진심이다!"
"네..네놈이 어떻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겔미르.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도끼를 자신도 모르게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겔미르, 내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면 안 되겠나? 우트그라드의 위대한 전사. 리트가르를 위해서 말이다.“
소설 속에서도 등장하지 않았던 미지의 인물 리트가르.
다 마르드의 방에서 본 리트가르는 서리도끼 부족을 상징하는 푸른색의 도포를 입고 있었다.
과거 서리도끼 부족장이 가지고 있던 슬픈 역사를 겔미르가 모를 리 없었다.
"자네는 분명 리트가르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도 자네와 같은 서리도끼 부족이었으니."
"그..그걸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내가 리트가르를 아는 것이 이상한가?"
"네 까짓 놈이 어찌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이냐!"
쿠콰콰콰쾅
폭주하는 겔미르.
그는 고함을 지르며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