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30화
"음,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말이지."
곧 자신의 명령을 수행할 부하들이 온다. 그때가 바로 리올라의 잔꾀를 박살 내기 위한 신호탄이 될 것이다.
타다닷
막사의 커튼 밖에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내는 부하 한 명.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보고를 시작했다.
"겔미르 부족장님, 지시하신 명령을 완료했습니다. 상태가 안 좋은 부족원 3명을 선발하여 현재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마침 타이밍 좋게 들어온 좋은 소식.
광대가 하늘 높이 승천하며 파도처럼 씰룩거렸다.
"상태는 어느 정도지?"
"이성을 잃기 일보 직전입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부족장님까지 못 알아보고 공격할 겁니다."
커튼을 젖혀 밖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3명의 부족원을 확인했다. 부하의 말대로 정말 이성을 잃기 일보 직전이다.
눈을 새빨갛게 충혈됐고 몸뚱아리는 보라색 반점 투성이었다.
좀비가 돼버린 전(前) 전쟁 군주, 엘로함 군주의 상태가 딱 저랬다.
"크큭. 좋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던 상태다. 동족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폭력적으로 도끼를 휘두르는 바로 그 머저리 같은 상태!"
"이제 움직이셔야 합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부족장님."
"좋다, 목적지는 낮벼락 부족 둥지."
"넵!"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줄 시간이다.“
**
그 시각 낮벼락 부족 둥지.
"카이드로젠, 그럼 나는 가만히 앉아서 겔미르가 오길 기다리면 되나?"
"그렇다."
"그것 참 간단한 작전이네."
"내 작전을 이해했다니 다행이군."
리올라는 삐죽 입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맡은 역할이 비중이 낮아 보이기 때문에 저럴 것이다.
겔미르를 제압하는데 자신이메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 아쉬울 터.
하지만 그 역할은 오직 리올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녀는 내 깊은 속내도 모른 채자신의 애꿎은 허벅지만 열심히 꼬집어댔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절대 쓸 수 없는 작전이다. 방심하지 말고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도록."
내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리올라. 표정은 탐탁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완벽히 작전을 수행할 것이다.
그래 봐야 가만히 앉아서 겔미르를 맞이하는 것뿐이지만.
'이제 나만 결정하면 된다.'
아직 결정짓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겔미르의 목숨.
그의 목숨을 거둘지 아니면 살려둘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와 첫 대면을 했을 때만 해도 기필코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했지만, 막상 진짜로 죽이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그때는 리올라가 죽은 줄로 알았기 때문에 내가 제정신이 아니기도 했고.
'정말 우수한 전투력을 가진 놈인데..'
처음 우트그라드를 방문했을 당시에는 거인족을 대표하는 강력한 전사인 겔미르를 내 편으로 만들고 싶었다.
소설 속에서 칸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재앙과도 같은 존재.
비록 그가 괴팍하고 호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같은 편이 된다면 그 어떤 거인보다도 듬직한 거인이 될 것이다.
나를 위해 최전방에 나서서 얼음 쌍도끼를 휘두르는 겔미르.
용맹한 그의 무력을 내가 다룰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칸 제국은 적국에 의해 멸망할 확률이 현저하게 낮아질 것이다. 상상만 해도 아주 듬직하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뿔피리를 사용하면 나한테 복종하는 거잖아?'
리올라가 죽은 줄만 알았던 그 당시에 생긴 불같은 감정은 이미 사그라든 지 오래였다. 낮벼락 부족원이 학살 당한것은 가슴이 아프지만 결과적으로 리올라는 살아있기 때문에 전력에는 큰 손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녀는 치유 계통의 부족장이기 때문에 전장에서 더 유용하게 쓰일 거인은 바로 겔미르다.
'그럼 살려두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야하나.'
사실 그가 나를 따를지 말지는 본인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일이다. 아무리 뿔피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뿔피리의 지속시간은 무한대가 아니다.
그가 진심으로 나를 따르지 않는 이상은 내 마음대로 언제든지 통제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나를 따르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어차피 모 아니면 도.
사실 겔미르가 나를 혐오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이 나라는 오래전부터 인간이 벌인 패악질 때문에 유대감이 무척이나 낮은 상태였다.
얼마 전 다 마르드가 보여준 리트가르라는 거인의 일화도 그렇지 않았는가?
그는 진심으로 인간을 위해 싸우고 노력하려 했지만, 그들이 리트가르에게 준 것은 치욕적인 모욕감뿐이었다.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트그라드의 거인이 인간인 나를 혐오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는 캐릭터였어.'
그가 보기에 카이드로젠이나 페이튼이나 별반 다를 것 없는 악한 인간으로 보일 것이다. 더구나 내가 빙의하기 전의 카이드로젠이 보여준 위상은 어땠나?
잉그람 대륙 전체에 폭군 황제라는 이름을 떨칠 만큼 포악하지 않았는가.
겔미르가 나를 경계하고 혐오하는 것은 어찌 보면 거인족이라면 당연하게 느껴야 할 감정이었다.
'나 같아도 당연히 그렇게 느끼겠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겔미르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악감정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는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싶은 용맹한 전사일 뿐이었다.
표현이 조금 과격할 뿐이지.
'알고 보면 참 딱한 캐릭터야.'
겔미르에 대한 내 입장을 정리한 나는 허리춤에 찬 검을 만지작거렸다. 그를 내 편으로 만들고 싶지만, 일단은 혹시 모를 위험은 대비해야 했다.
그가 휘두르는 얼음 쌍도끼에 쓸리는 순간 아무리 카이드로젠이라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겔미르는 강력하고 위협적인 존재였다.
타박타박
그 순간 누군가 동굴 속으로 들어오는 소리. 이 밤중에 낮벼락 부족의 둥지로 들어올 사람은 단 한 명.
'겔미르, 드디어 왔군.'
겔미르가 나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동굴 구석진 자리로 몸을 옮겼다.
거인족이 사용하는 커다란 항아리는 인간인 카이드로젠의 몸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금이 간 항아리 틈 사이로 겔미르의 동향을 살폈다.
그는 역시나 부하들을 대동하고 낮벼락 부족의 둥지로 찾아왔다. 그의 뒤에는 이미 좀비라고 봐도 무방한 환자 3명이 함께했다.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구나. 소설 속 내용과 똑같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겔미르.
그 대상이 리올라인 것은 어느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적나라했다.
잠시 후 리올라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냐? 겔미르. 네 놈이 여긴 어쩐일이지?"
"하아, 다행이야. 리올라. 자네가 살아있어서!"
"가당찮구나. 네 놈이 내게 사정없이 도끼를 휘두를 땐 언제고 뭐가 다행이란 말이냐?"
겔미르는 속이 다 보이는 어설픈 연기를 시전했다.
소설 속에서는 저런 연기에도 속절없이 속아 넘어간 리올라였지만 이번엔 다르다.
그녀의 상기 된 표정에서 겔미르에게 가지고 있던 의구심이 확신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설마 부족장이 이런 비겁한 수를 쓸까?’
마지막까지도 반신반의하던 리올라였지만 실제로 상황을 맞닥뜨리니 이제서야 인정한 눈치다.
"자네가 나를 너그러이 이해해주길 바라네. 나는 자네와 달리 인간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는가?"
"그렇다고 동족에게 도끼를 휘두르다니 넌 부족장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이미르 의식에서도 기권하는 것이 어떠냐? 너 같은 놈이 우트그라드의 통치자가 되고 싶어하다니 선조들이 아시면 통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순간 겔미르의 안면이 꿈틀거렸지만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 말대로 난 자격 미달이야. 안 그래도 이미르 의식은 치르지 않을 생각이네. 차라리 자네나 베누 부족장이 그 자리에 어울려."
"하하! 네 놈도 아주 웃긴 구석이 있구나? 그런 맘에도 없는 소리는 썩 집어치우거라! 누가 그딴 어설픈 연기에 속을 것 같나?"
한껏 코웃음을 치며 겔미르를 도발하는 리올라.
하지만 겔미르는 그녀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평소처럼 거칠게 반응하지 않았다.
"리올라, 일단 그얘기는 나중으로 미루는 게 어떻겠나? 여기 내 부족원들을 좀 봐줘.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아. 얼마 전부터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온몸에 보라색 반점이 퍼졌어."
"하아 하아, 크르륵.."
"칵!칵!크르륵!"
그의 말대로 3명의 부족원들은 이미 온몸에 보라색 반점이 퍼졌다. 좀비화가 거의 진행 된 단계지만 타인에게 공격성을 비추지 않는 걸 보니 아직 진정한 좀비가 되진 않았다.
‘그 말은.’
치료 약을 먹이기만 한다면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상태란 것이다.
"제발! 리올라! 부탁이네! 내 이렇게 무릎을 꿇고 자네에게 사정하겠네!
지난날의 과오는 잊고 부디 우트그라드의 젊은 피들을 보듬어주게나!"
"..."
겔미르는 무릎을 꿇고 리올라에게 바짝 머리를 조아렸다. 미동도 없는 표정을 한 리올라는가만히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깐 동안 그녀의 얼굴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강한 분노가 느껴졌다.
그녀는 우트그라드의 한 부족장이 이렇게까지 타락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카이드로젠의 말대로 정말 권력을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 겔미르. 뻔뻔한 그의 모습에 질려버린 듯한 리올라였다.
"내가 카이드로젠이 준 치료 약을 먹이자고 하지 않았나? 그것을 거절한 건 바로 당신이다.“
"나는 그 인간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네..제발! 리올라! 자네의 치유 주술이라면 혹시 모르지 않는가!"
"내 치유 주술로는 이들은 고칠 수 없어.
이 상태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카이드로젠의 치료 약뿐이다. 그 약은 지금 내 방 안에 있지."
겔미르는 입술을 깨물고 잠시 고민했다.
아마 리올라가 가진 치료 약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좀비가 된다면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광분한 상태로 상대를 공격한다.
만약 그들이 내 치료 약을 먹고 완치가 된다면 리올라를 제압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완치된 부하들이 과연 리올라를진심으로 공격하려 들까?
그는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을 그려보는 듯 잠깐의 침묵 후 대답했다.
"방법이 그것밖에 없나.. 정말 자네의 주술로는 불가능한 건가?"
"그렇다니까."
"그럼 부탁 좀 하겠네, 리올라. 부디 내 부족원들의 고통을 덜어줘."
리올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며 그 뒤를 따라가는 3명의 서리도끼 부족원.
그리고 그 장면을 유심히 바라보는 겔미르였다.
"크르륵."
"조금만 더 정신을 부여잡아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겠다."
겔미르는 리올라와 자신의 부족원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나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으응?
'왜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거지?'
겔미르는 등에 메고 있던 얼음 쌍도끼를 뽑아 들더니 성큼성큼 내가 숨어있는 항아리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무엇인지 모를 확신에 찬 눈빛을 하고 사납게 다가왔다.
뭐지? 내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너무 쉬워, 네 놈들의 얕은 수작은. 거기 숨어있으면 모를 줄 알았나?"
그의 말이 끝나기와 무섭게 겔미르의 도끼가 항아리로 날아들었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항아리가 산산조각이 나며 카이드로젠의 위치가 발각됐다.
"그하하하하! 어딜 미천한 인간 놈이 우트그라드에서 설친단 말이냐! 결국, 이것이 네 놈의 최후다, 카이드로젠!"
겔미르는 얼음 쌍도끼를 휘둘러 카이드로젠의 몸통을 정확히 적중시켰고
도끼에 맞은 카이드로젠의 몸은 종이짝처럼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하하하! 인간 놈이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나!“
팔이 통째로 뽑혀버렸고 다리가 잘려져 나갔다. 겔미르는 카이드로젠의 몸을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며 땅으로 내리쳤다.
이미 의식이 잃은 카이드로젠.
겔미르는 재밌어 죽겠다는 듯 전의를 상실한 그의 몸을 사정없이 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