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28화
말이 끝나기와 동시에 거인화를 실행.
거인족의 힘을 온몸으로 퍼뜨려 나의 크기를 거대화시켰다.
리올라는 자신과 눈높이가 같아진 카이드로젠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아니? 와아!"
"돌의 힘이 예전만 못한가 보더군. 그래서 내가 원할 때 잠시동안 거인으로 변할 수 있다. 오히려 실용적이게 됐어."
"세상에 이런 진귀한 광경을 보다니."
"리액션이 아주 좋군."
"리액션이 무슨 뜻이지?"
"몰라도 된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했다.
마치 과거에 최초로 거인족이 된 선조들의 모습이 이러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듯,
카이드로젠이 거인으로 변하는 과정을 매우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얼마나 그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거지?"
"한 10분 정도 될 것이다. 뿔피리를 사용하는데 그 정도면 충분하지."
"이미 전쟁군주가 됐다는 가정이로군."
"칸 제국의 황제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하이고. 그 유치한 말이 반갑게 느껴지는 날이 오다니.“
간만의 황제의 유행어를 듣고 실소를 터뜨리는 리올라. 어련하시겠다는 표정으로 카이드로젠을 바라봤다.
"겔미르가 전쟁군주가 된다면 분명 전쟁을 일으켜 모두를 나락으로 빠뜨릴 것이다. 부끄럽지만 나로서는 그를 저지할 힘이 부족하다."
"이 몸이 이곳에 있는데 그게 무슨 쓸데없는 걱정이냐? 걱정하지 마라."
"혹시 체스카 신전에서 베누를 만났나? 그도 이미르 의식에 참여할 수 있다."
"이미 만담을 나누고 왔지. 참으로 유쾌한 거인이더군. 그는 의식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리올라는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의 상대는 오직 겔미르 하나.
"그것참 다행이로군. 그나저나 카이드로젠. 혹시 이미르 의식에 대해서 계획이 있나?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전력을 다해 돕겠다."
"자네가 해줘야 하는 일이 하나 있지."
"그게 뭔가?"
"겔미르는 그렇다 치고. 서리도끼 부족원들이 아직 좀비화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그러니 자네가 그들을 책임져 줬으면 한다. 최대한 해치지 않고 치유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의식 중에 갑자기 그들이 좀비가 돼버리면 골치 아플 터이니."
"그것도 그렇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더 중요한 이유?"
"내가 우트그라드의 통치자가 되는데 명령을 수행할 부하들의 숫자가 적다면 폼이 안 살지 않겠나?"
"아하."
카이드로젠은 어깨를 들썩이며 얘기했다.
리올라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옅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잠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망각했군.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래."
"이미르 의식에대한 내 계획을 말해주마, 리올라. 귀 쫑긋이 세우고 들어라."
리올라는 내 계획에 집중하기 위해 가부좌를 틀었다.
쿵쿵 쿵쿵
그 순간 요란하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
한 명이 내는 소리가 아닌 수십 명의 다수가 내는 소리였다.
"손님이 왔군."
"이제 막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 하는데. 누구지?"
고개를 돌려 바라본 방향에는 다수의 거인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를 급히 찾는 듯한 반짝거리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 가장 적극적인거인 하나가 리올라 앞으로 나섰다.
"리올라 부족장님! 겔미르가 여기서 한바탕 날뛰었다고 들었는데 괜찮습니까?"
"보다시피 괜찮습니다. 그런데 대지 부족이 여긴 어쩐 일로?"
"더이상 그의 기행을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동족을 살해하다니요!"
그는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동안 겔미르의 호전적인 움직임에 쉬쉬하고 있던 우트그라드의 거인들.
그들도 이제는 조금씩 변하고 있는 듯했다. 동족을 살해한 행동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었다.
"생명의 은인이 다칠까 싶어 급하게 달려오는 길입니다! 리올라 부족장님은 무사하셔서 다행이군요. 그럼 그 카이드로젠이라는 인간은 어디 있습니까? 혹시 당해버렸나요? 아! 이럴 수가!"
그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치며 한발 늦었다는 액션을 취했다.
턱을 까딱거리며 내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는 리올라.
대지 부족원은 그제야 찾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카이드로젠의 앞에서 예를 갖추었다.
"아하! 살아계셨군요, 카이드로젠님! 리올라 부족장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덕분에 우리 부족이 살아남았어요! 당신의 치료 약이 아니었다면 우린 꼼짝없이 전멸해버렸을 것입니다!"
"잘 아니 다행이군."
"이렇게밖에 계신 것을 보니 체스카 신전을 무사히 공략했나 보군요! 대단한 인간이십니다. 살아생전에 이런 놀라운 인간을 만나다니! 제 인생에 가장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그는 과장스러운 몸짓을 섞어가며 놀라워했다. 오버액션이 심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거인족 중에 이 정도로 사교적인 성격을 가진 거인이 있었나?
"어이, 리올라. 이 거인은 지금껏 내가 만났던 거인 중 가장 맘에 드는 거인이다."
"이 자의 이름은 길버트. 베누를 보좌하는 대지 부족원이다."
리올라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그의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베누님도 만나보셨습니까? 신전에 가셨으니 아마 만나셨겠군요! 그분은 잘 지내시던가요? 저희 부족장님을 대신해서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카이드로젠님."
"잘 지내다마다. 그 양반 기력이 정정해서 앞으로 백 년은 충분해 보이더군."
"하하, 다행이군요. 신전에 갈 일이 없다면 통 뵙기가 힘든 분입니다. 혹시 카이드로젠 님께 꼬장은 안부리시던가요? 워낙 엉뚱한말씀을 자주 하시는 분이거든요. 하하, 그래도 심성은 착하시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 부족장에 그 부족원인가?
길버트가 보여주는 유쾌한 에너지는 베누와 매우 흡사했다.
말투조차 베누와 닮은 것 같다는 느낌은 기분 탓일까? 그의 활기찬 언행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자, 정식으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길버트라고 합니다! 저희 부족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철커덕
절도있게예의를 갖추는 대지 부족원들.
길버트가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수십 명의 대지 부족원이 한쪽 무릎을 꿇고 감사를 표했다.
그들이 내 앞에서 칼같이 각을 잡고 앉아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아직 전쟁군주가 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의 충성심이라니!
이미르 의식을 통해 뿔피리를 얻게 된다면 내 손에 들어올 엄청난 거인 군단은 상상만으로도 듬직했다.
'이거 좀 간지나는데?'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흐뭇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카이드로젠님! 감사하다는 말은 몇 번을 말해도 부족 할 것 같군요!"
"괜찮다. 앞으로 나를 위해 얼마든지 일하게 될지니."
"하하, 그런가요? 벌써 전쟁군주가 되신 것 같은 말씀이시네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카이드로젠 님이 뿔피리를 얻으시면 좋겠습니다."
사회생활 만렙으로 보이는 길버트.
그는 인간인 카이드로젠에게 어떠한 경계도 보이지 않았다.
설령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고 한들 거인족과 인간은 표면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인데도 말이다.
"길버트라고 했지? 자네의 특기는 뭔가?"
"베누님 아래서 배울 것이 주술 말고 또 뭐가 있겠습니까?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제 주특기입죠!"
길버트가 베누와 함께 신전의 힘을 불어넣는 주요 인물이라는 직감이 왔다.
신전을 관리하는 부족답게 주술에 자신감을 보이는 길버트. 그는 베누와 마찬가지로 다 마르드를 유지하는 일에 적잖은 공을 세우고 있는 인물일 것이다.
"그래? 맘에 드는군. 혹시 내가 일거리를 하나 던져주면 할 생각이 있나?"
"생명의 은인께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하하하!"
웃음소리마저 베누와 닮았다. 혹시 부자 관계인가? 모쪼록 주술의 실력이 베누와 닮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그의 다리를 툭 쳐주었다.
"아주 맘에 들어, 길버트. 조만간 부르겠다."
"하하! 감사합니다, 카이드로젠님!"
"저기 길버트. 미안한데 잠시 자리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카이드로젠과 의식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리올라는 한시라도 빨리 이미르 의식에 대한 내 계획을 듣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길버트는 특유의 과장스러운 움직임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우, 당연히 그래야지요! 언제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말씀해주세요. 한달음에 달려오겠습니다!"
다시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는 길버트.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답례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나는 길버트가 뿜는 에너지에 기분이 한껏 고취됐다.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지."
리올라는 그들의 모습이사라지는 것을 보고 다시 카이드로젠의 옆에 양반다리로 앉았다.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올 시간.
"아, 그래. 우리 하던 얘기가 있었지. 내 계획에 대해 말해주마."
"그런데 계획이라고 할 것이 따로 있나? 어차피 너와 겔미르만의 대결이 될 텐데. 이미르 의식은 순전히 너희 둘만의 정정당당한 싸움이 될 것이다."
"정정당당? 내 생각은 다르다, 리올라."
"무슨 뜻이지?"
소설 속 겔미르는 리올라와 이미르 의식을 치러 전쟁군주의 자리에 올라섰다.
리올라는 거인족의 긍지를 가지고 순수하게 힘의 대결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겔미르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힘을 과신하긴 했지만 약간의 변수마저 제거하고 싶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결국 리올라를 상대로 비겁한 수를 꺼내 들었다.
"겔미르는 이미르 의식 전에 나에게 뭔가 행동을 취할 것이다."
"무슨 뜻이지?"
"이미르 의식을 제대로 치를 수 없도록 방해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는 우트그라드의 부족장인데..“
리올라는 내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트그라드는 거인족의 신념을 목숨과도 같이 여긴다.
그녀는 아무리 겔미르가 권력욕에 취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설마 이미르 의식이라는 종족 최대의 행사에서 거인족의 긍지를 저버릴 만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자네 부족원들을 죽였나?"
"..."
묵묵부답의 리올라.
그녀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우트그라드는 과거의 리트가르가 있었던 시절처럼 정의롭거나 청렴하지 않았다. 긍지 높은 거인족의 신념은 겔미르의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의지로 인해 무참히 어지럽혀지고 있는 실정이다.
"유감스럽지만 겔미르는 우트그라드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자네들의 신념을 한없이 더럽히고 있지."
"동의한다.그런데 카이드로젠.”
“응?”
“어떻게 그가 비겁한 수를 쓸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지?"
"자네 아직 내가 누군지 모르나?"
"알고 있지. 칸 제국의 황제."
"그것으로 충분히 답이 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익살스럽게 어깨를 들썩였다.
”에휴.“
”에휴?“
"그건 그렇다 치고, 좋다. 겔미르가 무슨 행동을 취할지는 의문이군."
리올라는 본론으로 돌아와서 겔미르에 대해 생각했다.
우트그라드, 서리도끼 부족의 부족장.
그가 과연 거인족의 긍지를 저버리면서까지 카이드로젠에게 가할 위협을 무엇일까.
의식에 사용할 수 없도록 그의 무기를 모두 숨겨 놓는 것?
음식에 독을 태워서 몰래 먹이는 것?
밤중에 카이드로젠이 잠이 든 틈을 타서 숨통을 끊어버리는 것?
그것도 아니면..
"아마 자네는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