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27화
밝게 비추는 빛을 향해 달려간 출구.
체스카 신전을 무사히 나온 나는 눈앞에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이게 다 뭐야?"
신전 밖의 풍경은 말 그대로 충격적이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고 여기저기에 죽은 거인들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온갖 녹색 식물들로 즐비하던 우트그라드의 숲은 거인들의 피와 시체로 엉망진창이었다. 예상치 못한 처참한 광경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저 멀리 나무 위에 걸터앉아서 여유롭게몸을 흔들거리고 있는 거인.
그는 무언가를 손에 쥐고 나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나는 저자가 이 사건의 주동자라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지 알아내기 위해 그가 있는 방향으로 발을 내디뎠다.
파밧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거리.
몸에 보라색 반점이 드문드문 보이는 것으로 봐선 그도 생체실험의 피해자였다.
그리고 그는 내가 아주 잘 아는 인물이었다.
서리도끼 부족의 부족장을 상징하는 푸른색 깃.
스산한 기운을 풍기는 얼음 쌍도끼.
그리고 칸 제국을 멸망시키는데 일조한 재앙과도 같은 존재.
"네..네놈은 분명..."
"표정이 왜 그래? 칸 제국의 황제. 혹시 린돌프라고 아나?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얘가 어찌나 네 놈 자랑을 하던지."
그간 봐온 거인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잘라낸 시체 머리통을 흔들며 한껏 나를 도발했다.
흔들거리는 머리통의 주인은 바로 린돌프였다.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버린 린돌프.
그는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은 채로 치욕적인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나와 유대감을 맺고 살가운 모습을 보여준 린돌프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순간 피가 끓는 뜨거운 감정에 눈앞이 새빨갛게 변해버렸다.
"띠꺼운 말투를 보니 겔미르가 틀림없군. 왜 린돌프를 죽인 것이냐?
거인족이 동족을 살해한다는 일은 어디서도 듣지 못했다."
"왜일까? 큭큭."
"설마 나 때문이냐?"
"너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궁금하군."
"단지 인간인 내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죽인 것이라면 너는 쓰레기가 틀림없다."
"캬학학학! 이거 왜 이래, 카이드로젠! 나 그렇게 속 좁은 놈이 아니라고!"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사악하게 웃는 겔미르.
혹시 이놈이 리올라도 죽였을까?
여기저기 나뒹구는 거인들의 시체는 린돌프와 같은 낮벼락 부족원들이다.
리올라가 본인의 부족원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터.
상황을 간단히 종합하여 정리하면 리올라를 포함한 낮벼락 부족원 모두가 전멸했을 가능성이 컸다.
"겔미르, 너는 칸 제국의 황제가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군."
"그걸 굳이 내가 알아야 하나?“
”목숨이 여러 개인가?“
”열개 같은 한목숨이다. 큭큭."
"하! 그것 참 재밌는 표현이군. 장래희망이 개그맨인가?"
"개그맨? 그게 무슨뜻이지?"
"알 필요 없다. 이 재활용도 불가능한 쓰레기 같은 놈아."
겔미르는 우트그라드가 자랑하는 최강의 전사다. 소설 속에서 거인족이 칸 제국을 침공 했을 때 그는 최전방에 서서 전쟁을 지휘했다.
푸른색의 갑주를 입고 얼음 쌍도끼를휘두르는 겔미르는 자연재해에 버금가는 공포의대상이었다.
칸 제국이 자랑하는 황제 직속 친위부대의 검사들마저 거인들이 휘두르는 도끼질에 속수무책으로 잘려나갔으며 유고 깊은 칸 제국의 역사는 그들의 손에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겔미르를 내 편으로 만들면 든든할 것 같았는데..'
이미르 의식으로 상대를 죽일 필요는 없다. 그저 전투 불능 상태로만 만들면 우트그라드의 전쟁군주로서 뿔피리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다.
내 계획은 거인족 최강의 전사인 겔미르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어차피 뿔피리를 이용하면 누구든 전쟁군주의 명령에 복종할 테니까.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린돌프와 리올라를 죽여버린 그를 도저히 살려두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가차 없이 검을 뽑아 들고 다짐했다.
'놈을 죽인다.'
촤악
지면을 박차며 겔미르를 향해 돌진했다.
카이드로젠으로 빙의한 이래 이렇게까지 분노한 적은 없었다.
겔미르를 죽이지 않고서는 이 화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전력을 다해 겔미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지직
단발의 차이로 비껴가는 칼날.
그가 있던 자리에 있던 애꿎은 통나무는 찰진 소리를 내며 두 동강 났다.
겔미르는 나와의 거리를 벌린 채 여전히 입가에 실소를 머금었다.
"카학학! 이봐, 카이드로젠! 역시 듣던 대로 성격이 괴팍하구나?"
"시끄럽군. 먼저 네 놈의 혓바닥부터 도려내 주마."
"워!워! 거 참 성격이 급하시군."
"닥쳐라."
겔미르는 요리조리 도망 다니면서 외쳤다.
"네 놈이 원하는 건 이미르 의식 아니었어? 거기서 실컷 싸워보는 게 어때? 칸 제국 황제의 실력을 모두에게 보여주자구!“
”그 입 닥치라고 했다.“
”이미르 의식을 치르는 3명의 부족장과 최초의 인간, 카이드로젠.
구경꾼들도 참 재미나지 않겠어? 큭큭."
이미르 의식을 치르는 3명의 부족장?
그럼 리올라가 살아있다는 얘기인가?
"리올라가 살아있나?"
"카학학! 그건나도 잘 모르겠는데?
“배때지가 뚫린 채로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건 기억이 난다만.”
“뭐라고?”
“만약 그녀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이미르 의식에서 확실히 죽여버릴 거다."
"넌 참 재밌는 녀석이다. 아주 귀여워."
"그치? 이 도끼에 묻은 핏자국을 봐.”
겔미르는 도끼를 흔들거리며 한껏 도발했다.
“배신자들을 처단한 이 도끼의 모습이 얼마나 귀엽냐."
"기대해라, 겔미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을 너에게 선사하마."
"카학학! 좋아! 그런 적극적인 자세! 그 감정을 잘 유지하고 있어라! 아주 재미있는 의식이 되겠어!”
“...”
“기억해라. 이미르 의식은 이틀 후다! 무섭다면 그 안에 도망치던지 말든지! 하하하!"
겔미르는 끝까지 조소를 머금으며 자리를 떠났다.
건방진 자식.
당장이라도 겔미르를 처단해버리고 싶지만, 그의 말대로 지금 승부를 보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미르 의식에서 박살을 내면 그만이니까.
더구나 대중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굴복시킨다면 그보다 확실한 임팩트는 없을 것이다.
일단 리올라를 찾는 것이 급선무다.
나는 분노로 부들거리는 손을 보며 다짐했다.
'이미르 의식에서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
리올라를 찾기 위해 시체 더미를 헤집으며 보낸 지 수 시간.
도저히 그녀를 찾을 수가 없어 허탈한 상태였다. 조금씩 그녀가 살아있다는 희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젠장!’
리올라 만한 인재를 잃는 것은 잉대연의 세계관으로 봐도 엄청난 인력 손실이다.
인과 의를 중시하는 그녀를 진심으로 따르는 거인들의 숫자는 굳이 낮벼락 부족이 아니더라도 상당했다.
감정적이고 거친 성격의 겔미르.
동굴 속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며 부족원들에게 소홀한 베누.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가진 리올라.
셋 중에서 당연히 리올라를 따르는 거인들이 많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내가 굳이 뿔피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거인족을 통솔 할 수 있는 리더의 역할을 리올라에게 기대했는데...
겔미르가 죽여버렸다?
"진짜 리올라가 죽었으면 이 새끼를 절대 곱게 죽이지 않을 거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냐? 카이드로젠."
익숙한 음성.
”으응?“
뒤를 돌아보니 웬 거인 하나가 늠름한자태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리올라!"
"누굴 그렇게 찾고 있나?"
"그..그야 당연히.."
배때지를 뚫어버렸다던 겔미르의 말과는 다르게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있는 리올라.
얼굴에 도는 선명한 혈색은 처음 그녀를 동굴 속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건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겔미르가 자네를 죽여버렸다고 하던데..'
"그래서 내가 지금 죽어있나?"
"아니. 아주 잘 살아있군."
"그래, 보다시피 나는 살아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하하. 내가 죽었을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나 보구나."
"..."
"동료애가 이렇게 넘치는 스타일이었나? 카이드로젠."
"무슨 소리!"
리올라는 내가 귀엽다는 듯 놀리듯이 얘기했다.
그나저나 정말 다행이다!
리올라가 살아있다니!
"자네를 노예처럼 부려먹어야 하는데 벌써 죽어버리면 나만 손해지 않은가?"
"역시 당신 같은 발상이군."
"리올라, 겔미르와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일단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있었던 일에 관해서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널브러진 시체들을 바라보며 자책했다.
"나는 부족장으로서 실격이다. 우리 부족을 겔미르로부터 지켜내지 못했어."
"설마 나에게 협력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딴 짓을 벌인 건가?"
"그렇다. 그는 당신이 준 치료 약을 받아들이지 않았어. 그저 인간이 꾸미는 간사한 술수라고 생각했지."
리올라는 담담히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체스카 신전으로 들어 간 후 그녀는 린돌프와 함께 고동치는 대지 부족의 거인들을 치료했다.
그다음 서리도끼 부족으로 찾아가 겔미르를 만나서 치료 약에 대해 설명했다.
"겔미르, 부족장으로서 내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줘. 이 치료 약은 효과가 분명해. 카이드로젠은 우리에게 도움을주러 온 거야."
"카학학학! 정말이지 자네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대체 무슨 근거로 그자를 믿는 거지?
네 놈이 끔찍이 따르던 엘로함이 변해버린 이유를 그새 잊은 거야?
엘로함도 네 놈과 똑같은 소리를 했다! 이 인간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러 왔다고!”
“...”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는 자네가 누구보다 잘 알 텐데. 부끄럽지도 않나, 리올라?"
"페이튼과는 다른 인간이다. 그의 행동에는 진실함이 느껴졌어."
"보아하니 엘로함이 그랬던 것처럼 그자를 체스카 신전으로 안내했겠군, 그렇지?"
"엘로함은 페이튼에게 체스카 신전을 알려주지 않았어! 그건 오해다, 겔미르!"
"닥쳐라! 너는 표정에서 속마음이 아주 훤히 드러나."
"..."
"거인족을 우습게 아는 것도 유분수지. 체스카 신전을 무너뜨려 그 인간을 당장 땅속으로 파묻어버리겠다."
겔미르는 산 전체를 아예 뭉개버릴 생각으로 체스카 신전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를 막기 위해 리올라를 포함한 낮벼락 부족원 전체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래서 겔미르가 자네 부족 원들을 죽인 것이로군."
"그렇다. 내 부하들은 자네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겔미르에게 대항했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들은 힘에 굴복하지 않고 낮벼락 부족이 추구하는 신념을 지켰을 뿐이다. 나는 내 부하들이 자랑스럽다."
겔미르는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리올라까지 쌍도끼로 제압한 뒤 잠시 숨을 골랐다.
다행히도 그사이 내가 체스카 신전을 클리어하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타이밍 한번 환상적이군.'
"겔미르는 강하다. 그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힘의 격차가 존재할 줄은 몰랐다.
당신이 준 치료 약이 아니었다면 나도 아마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다른 부하들도 그렇고."
"자네가 치료 약을 가지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었군."
"그래, 그건 그렇고 카이드로젠. 결국 체스카 신전은 공략하지 못한 건가? 실패한 것은 아쉽지만 신전에서 살아 돌아온 것도 기적이니 너무 상심하지 마라."
나 때문에 본인의 부족이 해를 입었는데 전혀 원망하는 기색이 없는 리올라.
그녀는 아직 인간의 형상을 한 카이드로젠을 보며 위로했다.
그녀의 지식으로는 돌을 만지면 반드시 몸이 거대해진다고밖에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신기한 것을 보여주지.“
”으응? 어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