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26화
에린은 황궁의 연회실로 들어서며 카이드로젠을 떠올렸다.
'황제께서는 언제 돌아오시는 걸까?'
황궁의 연회실. 이곳은 카이드로젠의 술판을 장식하기 위해 칸 제국에서 가장 화려하게 꾸며진 곳이다. 하루가 멀다하고술판을 벌이던 카이드로젠. 그는 분명 칸 제국을 이끌어 가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인물이었다. 에린 킨드라는 낯선 적막감이 감도는 연회실에서 사색에 잠겼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 한 걸까?'
언제부턴가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 카이드로젠 황제. 그는 시종들과 함께 겸상을 하거나 시덥지 않은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거기다 자신을 포함한 마법사에게 먼저 자세를 굽히고 용서를 구하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그가 보여준 일련의 순간들은 다시 생각해봐도 믿기 힘든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칸 제국의 황제가 이렇게 변하다니.
'며칠 전만 해도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
에린은 그가 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하던 때를 떠올렸다. 자신을 당장이라도 처형시킬 듯한 기세로 역정을 내던 카이드로젠. 그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대노하여 눈이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갑자기 손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한번 스윽 보더니. 마치 다른 자아가 자신의 몸속에 들어온 듯 이성적인 모습으로 180도 변해버렸다. 그는 에린의 처형하려던 명령을 극적으로 철회했고 제국의 마법사를 상대로 가하던 모진 핍박도 멈추었다.
'혹시 나의 충성심을 드디어 알아주신 건가?'
에린은 빙긋 웃으며 생각했다. 충성심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그녀였다. 선대 황제인 아레스 빌라트 또한 에린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했다.
그녀는 카이드로젠이 극적으로 변한 이유가 자신의 충성심을 알아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을 갑자기 신뢰하기 시작하는 카이드로젠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도 딱히 없었다.
'재상까지 시켜주시겠다고 한 걸 보면 나를 극진히 아끼고 계신 것이 분명해.'
늦게라도 자신을 알아주는 카이드로젠에게 헤아릴 수 없는 감사함을 느꼈다. 에린은 지금보다 더 깊은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태양이 그대를 비추기를! 왜 그렇게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것이오? 에린 킨드라 경."
흑색의 경갑옷을 입은 사내가 에린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우! 태양이 그대를 비추기를! 오랜만에 뵙습니다, 릴레나 총사령관님."
에린은 갑작스런 그의 입장에 놀라며 인사했다.
"역시 총사령관님이십니다. 그런 경갑옷을 입으시고도 아무런 인기척도 내지 않으시다니요.'
"하하. 이정도는 기본이지요. 에린 경."
에린과 릴레나. 이들은 칸 제국에서 활동하는 영역이 다르다. 황궁 안에서 생활하는 에린과 전방에서 적국과 성벽을 맞대고 있는 릴레나. 이들은 서로 마주칠 접점이 없어서 친분을 쌓을 기회가 없었지만, 황제에 대한 서로의 충성심은 소문으로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일까. 에린과 릴레나는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친구를 만난 듯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요즘 폐하의 안위는 어떠십니까? 자리를 계속 비우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폐하의 깊은 혜안을 헤아리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저 저의 눈에는 항상 빛이 날뿐입니다."
"하하, 역시 겸손하십니다. 에린 경. 그런데 말입니다."
릴레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에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폐하께서 최근에 조금 달라지시지 않았나요?“
"네, 맞아요! 총사령관님께서도 느끼셨나요? 간혹 과격한 모습을 보이시긴 하지만 그래도 뭐랄까..."
"인간다워지셨죠?"
"맞아요! 맞아요! 최근 황제께서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계십니다."
릴레나는 예상치 못한 에린의 격한 호응을 보고 이내 마음을 놓았다. 혹여나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 한 황제에게 악감정이 남아 있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다행이군. 그리고 황제께서 변하셨다는 것을 나만 느끼고 있던 것이 아니었어.'
릴레나는 황제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본인 말고도 다른 사람도 똑같이 느끼는지 궁금해하던 차였다. 에린도 본인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심 뿌듯했다.
"황제께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참 궁금했습니다."
"저는 내심 저의 충성심을 알아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하하!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전 그분에게 희망을 보았어요. 폐하의 행동을 진심입니다."
이들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순식간에 서로의 호감도를 쌓아갔다. 무너져 가는 칸 제국에서 믿을 만한 동료가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따각 따각
경쾌한 소리를 내며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걸음. 잠시 후 그가 데려온 시종장이 연회장을 입장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폰 그라츠 재상님이십니다!"
시종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폰 그라츠. 복도에 있던 시종들은 고개를 숙인 채로 그의 입장에 예를 표했다.
"폐하의 행동이 진심이라..으하하핫! 아, 태양이 그대를 비추기를!"
폰 그라츠는 호탕하게 웃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과거 선대 황제인 아레스 빌라트와 함께 최전방에서 활약한 칸 제국의 살아있는 역사. 겉모습은 비록 술에 절은 힘없는 알코올 중독자처럼 보이지만. 그는 칸 제국에서 황제 다음가는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거물급 인물이었다.
"태양이 그대를 비추기를! 저의 신실한 예를 표합니다, 재상님."
"태양이 그대를 비추기를."
에린과 릴레나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반갑소, 에린 킨..킨드..음..뭐드라? 뭐, 아무튼 최근에 황궁에 부쩍 자주 드나드시는 분이구려. 그간 바빠서 인사할 기회도 없었던 것 같군. 내 이 자리를 빌려 정식으로 소개하리다. 난 이 제국의 재상, 폰 그라츠요."
"칸 제국에서 재상님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에린 킨드라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킨드라였지. 나 원 참. 나의 실례를 용서하시게 에린 경."
폰 그라츠는 빈정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내 그냥 지나가려던 참이었으나 흥미로운 대화를 엿듣고야 말았소."
"흥미로운 대화요?"
"황제의 진심 어린 행동이라..그거 혹시 황제 피습사건을 말하는 것 아니오? 으하하핫. 젠장, 천하의 황제가 자해를 하고 피를 흘리다니 이게 말이나 되오? 그것도 자신의 황궁 한가운데서 말이지. 으하하하하. 나 원 참."
기분 나쁜 웃음소리의 폰 그라츠. 에린과 릴레나는 그가 웃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재상님, 죄송하지만 어느 부분에서 웃음이 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건방진 칼잡이 놈이 어디서 끼어드느냐? 내 지금 어여쁜 아가씨와 이야기 중이지 않으냐!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게냐? 지금의 칸 제국을 일궈낸 일등 공신, 폰 그라츠란 말이다!"
"죄송합니다, 재상님."
폰 그라츠는 릴레나에게 호통을 치며 면박을 주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지독한 바인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는 초점까지 흐리멍텅 할 정도로 바인에 취해있었다.
"끄윽, 자 그럼 우리 아가씨? 우리 하던 얘기를 마저 해볼까?"
"제 이름은 에린 킨드라입니다. 아가씨라는 호칭보다는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에린은 애써 불쾌한 기색을 감추고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얘기했다.
"그래, 그 정도는 내가 양보할 수 있지. 에린 경. 그대가 말하는 '황제의 진심 어린 행동'은 분명 황제 피습사건을 말하는 것 같은데.. 내 생각이 맞나?"
"황제 피습사건이라뇨, 재상님. 그건 순전히 황제께서 직접 하신 행동입니다."
황제가 마법사를 상대로 자해를 하며 용서를 구했던 그 사건. 그 자리에는 에린과 폰 그라츠가 함께 하고 있었다. 하지만 폰 그라츠는 에린과 다르게 그 사건을 괴상한 방향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에린 경. 자네는 그럼 황제께서 진짜로 자해를 하셨다는 말씀이시오? 한낱 마법사들을 위해서?"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에린의 대답을 들은 폰 그라츠는 악의로 가득 차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는 지독한냄새를 풍기며 과장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우리 아가씨가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른 거라 이해하리다. 그대는 아직 황제라는 존재를 그다지 무겁게 여기지 않는 것 같군요."
"그건 절대 아닙니다, 재상님."
"우리의 선조들과 내가 일구어낸 칸 제국의 머리는 황제입니다. 그런 황제가 어찌하여 한낱 마법사를 위해 자해를 할 수 있겠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설사백번 양보해서 말이 되더라도 안되게끔 만들어야 하는게 우리의 일이오."
폰 그라츠는 꽤나 도발적인 눈빛으로 에린과 릴레나를 노려보았다.
"재상님, 어찌하여 현실을 부정하십니까? 그것은 마법사에 대한 폐하의 진심이었..."
"틀렸소이다! 카이드로젠 황제는 아버지를 잃어 심신이 약해진 상태였소. 간사한 마법사 놈들이 그것을 놓칠 리 없겠지. 그는 분명 마법에 홀린 것이오."
그는 에린의 말을 끊으며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카이드로젠이 얼마나 이기적인 인물인데 어찌 그걸 간과하고 계시오! 한낱 마법사들을 위해 자해를 했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내 말에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소? 당신들! 어디 할 수 있다면 해보시오!"
눈을 부라리며 에린을 무섭게 노려보는 폰 그라츠. 그는 선대 황제가 에즈만토스 왕국에 당해버린 일로 에린을 극도로 원망하고 있었다. 에린은 더이상 트러블을 만들기 싫어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이 폰 그라츠가 그대들에게 가르침을 주겠소. 내 비록 전성기가 지난 빛바랜 영웅이지만 지금의 칸 제국을 만든 역사적인 인물이오. 나의 권력의 탑은 황제에 버금갈 정도로 높이 솟아 있소. 그대들도 알다시피 바로 지금!“
쾅
그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말했다.
"황궁에는 황제가 자리를 비웠지. 그 물렁물렁하고 젖비린내나는 그 어린 황제 말이오! 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황궁을 비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내겐 아무런 상관이 없지. 황제가 없다면 바로 이 내가 제국의 통치자요!"
"재상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릴레나가 불편한 기색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폰 그라츠는 가볍게 무시하고 얘기를 이어나갔다. 카이드로젠에 대한 모욕을 서슴지 않는 폰 그라츠.
"칸 제국은 다시 일어설 것이오. 과거의 영광을 내 손으로 다시 이끌어 낼 것이야. 그대들도 앞으로 행동을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나는 카이드로젠처럼 무르지 않으니 말이오!“
그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 채 연회실을 떠났다. 남겨진 에린과 릴레나. 폰 그라츠의 충격적인 발언에 어이가 없어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그들은 한참을 침묵하며 그가 남기고 간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과거의 영광을 본인의 손으로 이끌어 내겠다고? 반역이라도 하겠다는 뜻인가?'
아무리 현실 감각이 떨어진 재상이라고는 하나 대놓고 반역을 꾀할 만큼 무모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럼 역시나 술에 취해서 실언을 내뱉은 건가?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그의 속마음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에린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흐음, 에린 경. 폰 재상의 얘기가 맞긴 맞는 것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총사령관님.
그의 발언이 대체 뭐가 맞다는 말씀이세요?"
오랜 침묵을 깨고 릴레나가 입을 열었다.
"그게..아주 처맞을 얘기라고요."
"아.."
릴레나의 농담에 에린은 문득 카이드로젠이 생각났다. 변하기 시작한 황제는 이런 썰렁한 농담을 자주 내뱉곤 했었다. 에린은 본인의 언어 유희에 만족스러워하는 릴레나를 외면하고 열린 창문 너머로 고개를 돌려 가만히 사색에 잠겼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마음속에서 맴도는 것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황제 폐하, 폰 그라츠가 뭔가를 꾸미고 있습니다. 얼른 돌아오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