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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24화 (25/72)



〈 25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24화

반이 뭉텅 잘려버린 달을 올려다보며 회의감에 빠져나오지 못하던 그때였다.

"리트가르 씨!"
"엘리즈? 이런, 엘리즈로구나. 이런 야밤에 뭐 하는 거냐?"

 꼬마 숙녀는 유리타 소금농장의 제4구역 소금지대에서 일하는 어린아이다. 힘든 고역에도 불구하고 항상 밝은 모습을 유지하는 긍정적인 아이였다.

"저야 이제 일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죠. 아저씨의 하루는 어땠나요?“
"너는 내가 무섭지 않니?"
"또 그 질문이다. 늑대인간이라면 모를까 제가 왜 아저씨를 무서워해요?"
"나는 거인족이지 않니. 보통 다른 인간들이라면 우리를 피하곤 한단다."
"다른 인간? 그럼 아저씨는 거인 인간이네요? 그래 봐야 똑같은 인간이면서  다른 것처럼 얘기해요."

똑같은 인간이라.. 10살도 채 되지 않은 엘리즈가 하는 얘기가 머릿속을 세차게 흔들었다. 어쩌면 엘리즈같이 순수한 아이들이 다음 세대에 들어선다면 언젠가 인간과 거인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동화되지 않을까?

'애초에 우리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서로를 경계하게 되었을까.. 다른 것은 생김새, 오직 크기뿐인데..'

"리트가르 씨? 리트가르 씨! 제  안 들리세요?“
"..."
"야 이 멍청아!

빼액하고 소리를 지르는 엘리즈.

"아, 미안. 잠시 생각에 잠겼구나."
"제가 아저씨한테 보여줄 게 있어요. 이거 아무한테도 말 안했는데 꼭 비밀 지켜주셔야 해요?"
"그래, 비밀을  지켜주마."

엘리즈가 건네는 작은 쪽지. 그 안에는 믿을  없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이건 진짜 진짜 비밀인데요, 이걸 쓴 사람은 우리 엄마예요. 내가 저번에 말했죠? 우리 엄마는 일이 있어서 농장에서 잠시 밖으로 나갔다고. 나를 꼭 데리러 오겠다고 하셨어요. 기억나죠? 아니, 내가 말  했었나?"
"그 말이 진심이었구나."
"당연하죠! 우리 엄마는 거짓말 안 해요."

쪽지 안에는 유리타 소금 농장을 공격하는 정확한 시기가 적혀있었다.

[형제자매들이여. 뿌리부터 썩어빠진  소금땅에 자유를 선사할 시간이 왔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위해서 싸워주실 분들이 오십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짓 된 반쪽 달이 떨어지고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때, 우리는 농장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대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모쪼록 준비하시어 이곳의 부패한 지주들을 처단합시다.]

"엘리즈, 이 종이 누가 줬니?"
"그건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제 주머니 속에 있었어요. 오늘 농장에서 일하는 아저씨랑 언니들도 다 종이를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분들도 농장을 떠난 가족들을 저처럼 기다리고 계셨어요. 이렇게 쪽지를 발견하다니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얘기하는 엘리즈. 그녀를 뒤로하고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 소금농장에는 더러운 진실이 존재한다. 철저한 계급사회를 통한 노예제도. 나는 전사로써 군주의 명령에 따른다. 엘로함의 명령은 바로 이 농장을 수호하는 것. 엘리즈의 쪽지에 따르면 내일 여명이 밝아 올 때에 소위 무장 강도세력이 이곳을 공격한다. 그들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노예들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 공격하는 세력들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들을 막아내는 것이 옳은 일인가? 애초에 나에게 선택지가 존재하긴 하는지도 의문이다. 우트그라드의 전사가 전쟁군주 엘로함의 명령에 거스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자칫 잘못하면 엘리즈의 어머니에게 도끼를 휘둘러야 하는 불상사가 생기겠어.'

"리트가르! 리트가르!"

농장 지주, 한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즈, 잘 들어라. 일단 숙소로 돌아가라. 그리고 그 종이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마."
"하, 하지만 저희 노예들은 이미  알고 있는 걸요?"
"어서 숙소로 돌아가!"

엘리즈는 판자 울타리 사이로 작은 몸을 비집고 장소를 피했다. 그와 동시에 막사로들어오는 한스.

"리트가르! 리트가르!  종이를 좀 보시오!"

그는 엘리즈가 보여준 것과 똑같은 종이를 내게 건넸다.

"무장 강도세력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허허, 당신들이 이곳에 있어서 천만다행입니다. 그 종이에는 내일 아침에 공격이 시작된다고 적혀있습니다. 보셨지요? 부디 그대들의 역할에 충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종이는 어디서 났소?"
"노예 중에 몇 명은 내 심복으로 거두었지요. 아주 믿을만한 정보이니 확실하게 대처해주시길 바랍니다, 리트가르 대장."
"..."
"만약  농장을 수호하지 못한다면 양측 군주의 관계가 틀어지겠지요.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사면초가. 지금 이 상황에 이보다  걸맞는 단어는 없으리라. 엘로함이여,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나의 황제께서는 그대들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크십니다. 필히 유념해주시고 그럼 나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한스는 거만한 발걸음으로 막사 밖으로 퇴장했다.

부스럭부스럭.

한스가 떠나고 구석진 곳에서 들리는 또 다른 인기척 소리. 잠시 후 그의 충직한 부하, 데베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장님.."
"어디서부터 들었느냐?"
"처음부터..처음부터 다 들었습니다."
"처음부터라면?"
"엘리즈라는 소녀가 한 얘기부터입니다. 그들이 자유를 되찾기 위해 이곳을 공격한다는 얘기가 맞습니까, 대장님?"

데베트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도 리트가르와 마찬가지로 추악한 지주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현실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광산에서부터 시작된 인간에 대한 의구심은 이곳 소금농장에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네가 무슨 심정인지 충분히 알고 있다, 데베트. 나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썩어빠진 지주들을 위해 전쟁군주의 명을 끝까지 받들어야 할지. 아니면 무장강도라고 불리는 노예들을 도와 우리의 명예를 지킬지. 어느 선택을 하던 선택하지 않은 반대쪽의 명예는 저버리게 된다."
"대장님, 저를 포함한 대장님의 부하들은 오직 대장님의 명령만을 따릅니다. 막사에서 쉬고 있는 동료들에게 전투를 치를 준비를 하라고 하겠습니다. 저희의 창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대장님께서 인도해주십시오. 어떤 선택을 하시든 간에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리트가르와 데베트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그들은 서로의 눈빛을 보며 진심을 확인했다. 이윽고 반쪽짜리 달이 떨어지고 새로운 태양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

뿌우우

마을의 기슭까지 울리는 산양의 뿔피리 소리. 소금농장의 지주들은 정체불명의 소리에 혼비백산하여 급히 거인족들을 찾아 나섰다.

"리트가르! 리트가르는 어디있나!"

한스는 리트가르를 목이 빠져라 불렀다. 그의 외침에 따라 시종들이 아침부터 부리나케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리트가르는 대체 어디있단 말이냐!"
"한스 지주님. 리트가르는 아직 막사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뭐라고? 지금 해가 뜬지가 언젠데 아직도 막사에서 뭘 하고 있는 거냐? 너! 나를 호위해서 그의 막사까지 안내해라! 어서!"
"예? 지..지주님. 강도단이 공격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얼른 도망가심이.."
"지금까지 받은 월급을 모조리 토해내고 싶지 않다면 당장 안내해라! 이 얼빠진놈아!"

한스는 시종을 앞세워 거인족이 묵고 있는 막사로 향했다. 잠시 후 도착한 리트가르의 거처. 한스는 리트가르의 거처 앞에서 먼저 데베트와 조우했다.

"경비는? 소금농장의 경비는 언제 할 생각이냐! 리트가르는 대체  하고 있단 말이냐!"
"아직 대장님의 명령이 없다. 인간, 말조심해라."
"이런 건방진 괴물 자식이! 어디서 말대답이냐!"

한스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악을 써댔지만 데베트의 표정은 돌처럼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런 젠장할! 그렇게 창이라도 들고 있으면 나가서 싸우란 말이다! 강도단이 부는 뿔피리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소금농장에 위협이 되는 저들을 무찌르란 말이다!"
"아직 대장님의 명령이 없다고 말했을 텐데."
"이런 개같은 자식들! 이딴 식으로 조약을 어겨?"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데베트를 보며 한스는 환장 할 노릇이었다. 짧고 단호하게 말을 뱉는 데베트에게 더이상 대화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한스는 옆에 있던 시종의 어깨를 흔들며 과격하게 명령했다.

"여봐라, 너는 당장 황제께 이 사실을 보고해라! 망할 거인 놈들이 우리 지주들을 배신했다고!"

**

그 시각. 소금농장의 노예들이 생활하는 수용소. 그곳에서 리트가르는 급히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있었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시오!"
"다..당신은 우리를 감시하는 거인이지 않소?"
"시간이 없으니 설명은 나중에 하겠소!지금 들리는 뿔피리 소리를 따라가서 그대들의 가족들과 합류하시오. 그리고  말을 꼭 전하시오. 모든 노예는 해방되어 이 농장을 공격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그게 진심이오?"
"나, 리트가르는 당신들을 해방하고 싶소. 그러니 얼른!"

리트가르의 외침에 소금농장의 노예들은 서로 말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리트가르의 진심을 이해하는 눈치였다.

"리트가르 씨!  무서워요.."
"엘리즈! 나를 믿고 가거라. 너를 찾아온 어머니를 만나야 한다."
"아저씨.."
"저 사람들을 따라가라. 그리고 다시는 이런 추악한 곳에 발을 들이지 말거라."

엘리즈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들으시오! 내가 앞장서서 이곳의 경비병을 제압하겠소! 그대들은 나가자마자 뿔피리의 소리를 따라서 가족들을 만나시오! 곧 페스카나 제국의 군대가  것이니 빠르게 움직여야 하오!"

소금농장의 일꾼들은 일사불란하게 열을 맞추어 리트가르의 뒤를 따랐다. 수용소를 지키던 인간 경비병을 단숨에 때려눕힌 리트가르는 그들을 탈출시키는데 성공했다. 어느 인간의 손을 잡고 뛰어가는 엘리즈. 그녀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리트가르를 쳐다보았다.

'살아남아야 한다, 엘리즈. 반드시 어머님의 품에 안기거라.'

리트가르는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뒤를 보며 마음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전쟁군주의 명령을 어겼지만,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행동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자, 이제 나도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 볼까.

"거기까지다! 리트가르  망할 녀석아! 너의 반역죄는 온 천하가 알게  것이다!"

순간 쩌렁쩌렁하게 울려오는 한스 지주. 그의 곁에는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병사가 무장을 하고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벌써 페스카나 제국의 군대가  것인가?'

자국의 군대보다는 소금농장으로 얻은 재산을 바탕으로 용병을 고용하는것이 익숙한 그들은, 언제 섭외했는지도 모를 다양한 용병들을 고용하여 전면에 내세웠다. 돈이라면 어떠한 행패라도 기꺼이 일삼는 역겨운 용병들.
그래, 차라리 이편이 더 좋다. 더러운 그들에게 내려칠 도끼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을 것이다. 리트가르는 등에 메고 있던 도끼를 거칠게 뽑아 들었다.

"대장님."
"데베트!"

데베트는 부하들을 이끌고 어느샌가 리트가르의 뒤에 위치하여 전투를 준비했다. 그리고 리트가르처럼 도끼와 창을 손에 쥐고 그가 명령만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들은 내가 우트그라드로 복귀하라고 하지 않았나!"
"어찌 대장님만 두고 갈 수 있겠습니까? 저희는 대장님의 명령을 받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결사 항전의 아우라를 뿜어내는 데베트. 그의 용기 있는 행동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미안하다, 제군들... 못난 나를 따라주어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었구나."
"이보다 명예로운 결말은 없을 것입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외치는 데베트를 포함한충직한 부하들. 리트가르는 페스카나 제국의 군대를 향해 외쳤다.

"네 놈들의 추악한 악행은 여기서 멈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반역이라고? 나는 그 어떠한 순간에도 네  페스카나 제국에소속 된 적이 없었는데 무슨 얼어 죽을 반역이냐? 우트그라드의 위대한 전사들은 명예를 위해 네 놈들을 이곳에서 처단하겠다.
"너의 군주, 엘로함이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할까? 고작 이것이 그대들의 통치자에 대한 충성심인가! 정말 실망스럽구나! 우트그라드가 이것밖에 안되는 저열한 집단이라니!"

촤악

리트가르는 분기탱천하여 한스를 향해 도끼를 던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스의 모가지는 몸통에서 떨어져나와 바닥에 뒹굴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해버린 한스.

'미안합니다, 엘로함. 나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한스의 시체가 힘없이 쓰러지자 페스카나 제국의 군대는 거인족을 향해 공격 신호를 내렸고. 곧 그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칼과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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