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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23화 (24/72)



〈 24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23화

“누가 스위치를 내렸나 보네요.”
"스위치를 내렸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갑자기 불이 꺼졌다는 뜻입니다."
"그런 단어는 처음 들어보는구먼."

갑자기 마르드의 방을 비추던 밝은 빛이 사라졌다. 바로 옆에  있는 노인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하지만 파레호와 나는 앞선  번의 경험으로 이런 갑작스러운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 또한 시험의 일부리라. 의연한 자세로 앞으로 있을 시험을 대비했다.

“일단 어둠에 적응하고 생각해보시죠.”
"그러시게나."

일단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잠자코 기다리며 다 마르드의 마지막 시험에 대해 떠올렸다.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은?]

이것이 마지막 시험 문제다.
현실 세계의 나였다면 당연히 돈.
돈이 가장 소중하다고 했을 것이다.
소설  카이드로젠이라면 생명이  것이고.
파레호라면 카일라를 포함한 가족이  것이다.
시험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대단히 주관적인 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문제.
하지만 이 문제의 출제자가 거인족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면?
충분히 그들이 원하는 답을 제출할  있었다.

‘정답은 바로 평화.’

어느 종족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변방에서숨어지내는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평화였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거인족으로 변해버린 그들은 이전에 누렸던 평화로운 생활을 몹시 그리워했다.
인간으로 누렸던 당연한 권리.
사람들과 조직을 이루어 사이좋게 지내는 평범한 삶.
그저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거인족들이 평생을 갈구하며 원했던 소망이었다.
인간들의 사주로 용병으로 활약했던 이미지 때문에 그들이 폭력적이고 위험하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인간들의 전쟁에 참여한 이유는  한 가지.
바로 평화를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잉그람 대륙에서 누구보다 평화를 추구하던 종족이 바로 거인족이다.

'비록 말년에는 깊은 배신감과 생체 실험의 부작용이 합쳐져 칸 제국을 침공해버렸지만.'

이번 회차에는 내가 그들의 침공을 미리 막으러 왔으니 상관없다.
일단 파레호에게 마지막 시험의 문제에 대해 알려줄 요량으로 말을 걸었다.

“파레호 공, 마지막 시험에 대해 알려….”
"..."
“...”

이건 또 갑자기 무슨 시츄에이션일까.
노인에게 마지막 시험의 문제를 공유하기 위해 말을 거는 순간.
성대라는 기관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입이 턱하고 막혔다.
목소리를 내기 위해 사용되는 입과 턱, 목, 단전 같은 부위의 근육이 모두 소강상태에 빠졌다.

'노인도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니 나와 똑같은 증상인듯하군.'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다 마르드의 방은 워낙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니까 말이다. 하지만 목소리가 안나오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시간을 보낸  꽤나 지났는데 아직까지  시야는 옅은 실오라기 하나  없다는 점이다.
이거 설마 감각기관을 아예 없애버린 건가?

'에헤이.'

생각에 여기까지 미치자 급하게 손을 얼굴에 갖다 대려 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팔과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이거 뭐 어쩌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아직 마지막 시험의 문제는 나오지 않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난이도가 급격하게 올라갈 것이라고 예상됐다. 그리고 마지막 시험이 벤하트가 보았던 시험의 내용과 동일할 것이라고도 섣불리 판단 할 수 없었다.

'벤하트는 오감이 없어진 적이 없었으니까!'

이쯤 되니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그래 좋다.  마르드. 네 놈이 할 수 있는 모든 심혈을 기울여서 시험을 준비해라. 나는 보란 듯이 통과해서 거인화의 비술을 손에 넣고 말겠다. 비록 소리없는 아우성이었지만 마음  구석에서 열기가 불타올랐다.




'으응?'

열기가 불타오르거나 말거나. 말 그대로 띡 하는 소리와 함께 카이드로젠과 이어져 있던 정신의 끈이 끊어져버렸다.


**


잔잔하게 부는 기분 좋은 바람. 부스러진 흙과 차가운 강철의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여긴 어디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체스카 신전의 내부가 아닌 일종의 전초기지. 그곳에서 펄럭거리는 아리보리 바탕의 검은색 그리핀은 이곳이 인간의 군대임을 뜻했다. 그리고 언뜻 칼집에 비친 내 모습은 어느 한 거인의 모습이었다.

'뭐지, 거인으로 빙의한 건가?'

곧이어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각. 마치 가상현실 체험을 하는 것처럼 나는 거인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카이드로젠으로 빙의했을 때와는 다른 상이한 상황.
 마르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잠자코 거인이 이끄는 대로 몸을 향했다. 어디론가 저벅거리며 걸어가는 거인. 이윽고 어느 한 무리의 인간들을 만났고 강한 언쟁이 시작되었다.

"인간 사령관,이건 우리의 군주들께서 서로 약속한 내용과 다르지 않소! 우리는 당신 백성들을 인질로 잡고 있는 강도 집단을 공격하는 줄 알았소, 하지만 그게 아니더군!"
"아니긴 뭐가 아니란 말이오?"
"그대들이 말한 올 쿠슈 은 광산에는 어떠한 인질들도 존재하지 않았소. 애초에 인질이 없었다는 말이오! 우리가 그들을 공격한 명분이 대체 무엇이오?"

거인으로 빙의한 나는 목에 핏발이 곤두설 정도로 인간들에게 분노를 표출했다.

"진정하시오, 리트가르 대장. 당신들이 공략해준 올 쿠슈 은 광산은 분명 '강도 같은 것'들이 장악하고 있었소. 그놈들이 부리는 마법은 꽤나 골칫덩이였지. 은 광산에서의 승리는 우리 리클라 왕국에 크나 큰 전력이 될 것이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요? 우리가 당신네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싸우러  것 같소?"
"정의로운 거인들께서 당연히 그건 아니시겠지.아무튼, 의사소통에서 뭔가 혼선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겠소이다. 더이상 언쟁을 이어가봤자 서로에게 득 될 것도 없으니 이쯤하고 그냥 넘어 갑시다."
"그..그게 무슨!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우리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 당신들을 도와 무장 세력에게 대항하러 온 것이지 은 광산을 강제로 빼앗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란 말이오!"
"리트가르 대장, 내 마지막으로 말하겠소. 이쯤 합시다. 이것은 모두 군주들께서 약속하신 내용이오."

리클라 왕국의 사령관은 사악한 미소와 함께 자리를 피했다. 잠시 후 리트가르의 대장 쪽으로, 그러니까 내 쪽으로 모이는 거인 병사들. 그들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내게 질문을 마구 쏟아냈다.

"리트가르 대장님, 역시 그랬던 것입니까?"
"저희가 제압한 그들이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지요?"
"은 광산의 사람들은 강도단치고는 너무나도 순박해 보였습니다. 리클라 왕국이 말하는 인질 또한 없었고요!"

웅성웅성.

수여 명의 거인들이 혼란에 휩싸였다. 리트가르는 리클라 왕국의 왕과 우트그라드의 전쟁군주가 나눈 대화를 급히 떠올렸다.

"정말 고맙소, 엘로함 군주. 우트그라드의 군사들은 우리 리클라 왕국의 생명의 은인이나 진배없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 거인들을 사사로이 쓰지 마시오. 우리가 약조한 대로 강도단의 납치 사건만 해결하면 곧바로 복귀시킬 것이네."
"하하하! 당연하지요! 엘로함 군주! 우리 인질들만 구출하고 나면 작전은 종료될 것이오!"

안타깝게도 리클라 왕국의 얘기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인질은 존재하지 않았고  광산의 사람들 또한 강도 집단이 아니었다.

"이런 젠장! 리트가르 대장님!뭐라고아무 말씀이라도 해주십시오!"
"저희가 제압한 그들이 강도단이 아니었다면 우린 무슨 짓을 저지른 겁니까?"

엄청난 분노가 마음속에서 끓어올랐다. 리트가르를 믿고  광산의 인간들을 제압한 부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 잘못도 없는 선량한 인간에게 무력을 행사한 것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진정해라, 우트그라드의 전사들이여. 아직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강도들이 자신이 강도라고 만천하에 티를 내고 다니겠느냐? 그들은 강도 집단이 맞다. 괜히 넘겨짚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하도록."
"..."
"해산하고 우트그라드로 복귀할 준비를 해라. 내일 새벽에 당장 이곳을 떠나겠다."
"알겠습니다...대장님."

리트가르는 부하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자신은 물론 부하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리클라 왕국이  광산을 탈환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속였다는 것을.

"하아."

리트가르는 부하들이 힘없이 막사로 이동하는 것을 보며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엘로함이여, 저희는 얼마나 큰 죄를 저질러 버린 것입니까?'

**


스르륵 눈이 감기며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엔 어디지?

"갓 만들어진 이끼소금세트가 나왔습니다! 유리타 소금 농장의 명물 이끼소금! 선물용으로 사 가세요!"
"필수 영양분이 모두 들어있는 이끼소금입니다! 귀하신 자제분들의 건강을 위해 준비하세요!"

이곳은 사람들이 붐비는 어느 한 시장. 상인들이 왁자지껄하게 호객 행위를 벌이며 떠들고 있었다.

"리트가르 대장님, 데베트 입니다."

나는 계속해서 리트가르라는 거인의 시점에서 바라보았다.

"그래, 무슨 일이냐?"
"이끼소금이 대체 뭔가요?"
"나도 처음 본다."
"신기하게 생겼습니다."
"이곳의 특산품인가 보구나."

이곳은 페스카나 제국의 외각에 위치한 유리타 소금 농장. 최근에 이 농장을 노리고 있는 무장 집단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앞선 은 광산에서의 헤프닝에도 불구하고 엘로함은 인간을 위해 또다시 임무를 부여했다.

"페스카나 제국의 소금 농장을 안전하게 보호하라."

리트가르는 전쟁군주의 명령에 따라 이곳으로 파견 나왔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농장의 경비를 선지 어느덧 열흘이 훌쩍 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무장 집단은 발견되지 않았고 경비를 서던 병사들은 점점 따분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대장님, 저희가 한낱 소금 농장이나 지키는데 얼마나 오래 있어야 하는 걸까요? 언제까지 이런 시시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전혀 명예롭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엘로함님께 서신을 전달했지만, 임무를 그대로 유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전쟁군주께서는 이곳의 분위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불평하지 마라. 평화를 지키기 위해 경비를 서는 것이 뭐가 명예롭지 않단 말이냐."

부하들을 달래며 엘로함의 명령에 복종하려는 리트가르. 하지만 그도 부하들처럼 마음속에 작은 의구심이 뭉게뭉게 커져가고 있었다.

'인간들이 과연 우리가 지켜줘야  만큼 가치가 있는 존재들인가?

리트가르는 자신의 뿌리가 인간이라는 것은 선배들에게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을 지켜주며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라는 전쟁군주의 의지. 하지만 그는 전쟁군주의 의지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힘들었다. 자신을 포함한 현 세대의 거인들은 처음부터 거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들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그건 고대 거인족들이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인데..'

더군다나 리트가르는 페스카나 제국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마을의 추악함을 보고 말았다. 유리타 소금 농장. 이 곳은 겉보기엔 밝고 생동감이 넘치는 마을로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얼마  소금땅의 지주와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안녕하시오, 한스."
"오우, 리트가르 대장. 오늘도 별일 없으셨나요?"
"아직까지는 특이사항이 없구려."
"허허, 그것참 다행이군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한스 지주, 내 잠시 물어볼 것이 있소."
"말씀하시지요."
"이곳을 순찰하면서 많은 것을 보았소.태양에 반사되어 에메랄드 빛을 내뿜는 유리타의 소금들. 그 소금을 사러 각지에서 찾아오는 활기찬 시장 분위기. 이 곳, 페스카나 제국의 사람들은 표정이 아주 밝더군."

한스 지주는 리트가르를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리트가르님께서 칭찬을 다 하신다니 의외로군요. 무뚝뚝하신 분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나는 아직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소."
"그게 뭐지요?"
"소금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일꾼들. 그들중엔 어린아이도 포함되어 있소이다. 어찌하여 저들은 쉬는 시간도 없이 하루종일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오? 그대들이 노예라고 부르는 계급의 아이들은 왜 그대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것이지? 그들의 곁에서 경비를 서며 한참을 생각해봤는데 당최 이해할 수가 없소이다."

페스카나 제국이 소유하고 있는 유리타 소금 농장. 그들은 철저한 계급 사회를 이루고 있는 나라였고 노예 제도를 통해 소금 농장을 발전시켰다. 불모지였던 유리타를 빛나는 소금 농장으로 탈바꿈시킨 원동력은 바로 이 추악한 제도 덕분이었다. 한스를 포함한 소금 땅의 지주들은 노예들을 하루종일 혹사시키며 농장을 일구었다.

"당신들의 노예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소. 다른 종족도 아닌 같은 인간인데 그렇게나 차별하다니."
"허허, 리트가르님. 제가  당신에게 이런 질타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모르시는 것 같으니  말씀 드리자면 이 농장이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이 농장을 통해 우리 페스카나 제국이 국력을 유지 할 수 있게 되었죠."
"그게 합당한 명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
"..."

잠시 정적이 흐르는 서로의 침묵.

"어이쿠, 자리가 더 불편해지기 전에 전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무례한 질문은 삼가해주셨으면 하네요. 리트가르 대장님."
"..."
"흠흠. 계속 수고하십쇼."

소금땅의 지주, 한스는능청스럽게 자리를 떴다. 리트가르는 무엇을 위해 이들을 도와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우트그라드의 위대한 전사들이 이런 썩어 문드러진 지주를 돕고 있다니..'

이들을 돕는 것이 과연 평화를 추구하기 위한 일인가? 자신의 의문이 옳든 그르든 리트가르는 전쟁군주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존재였다. 밀려오는 무력감. 그리고 자신은 명예라는 단어와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엘로함이시여. 도대체 저희가 하는 행동들이 이치에 맞는 걸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당신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에는 제가 아직 부족한 걸까요?

'하아, 비참한 밤이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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