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22화
3마리의 켈베로스가 아가리를 활짝 열고 지옥 화염을 뿜기 위해 예열하고 있었다.
거대한 조각상이 가하는 위협은 가히 압도적.
겁에 질린 파레호는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으아아악! 제발! 제발!”
그의 간절한 절규가 통한 것일까.
켈베로스의 입에서 이글거리던 불길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이윽고 활짝 벌렸던 입을 굳게 닫으며 다시 원래의 자세로 고쳐잡았다.
그리고 점차 희미해지는 초록색 눈동자.
“파레호 공. 켈베로스가 공격하지 않습니다.”
“...”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괜찮아요, 이제.”
노인은 쉽사리 경계를 풀지 못하고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이러다 공포에 질려 콱 죽어버리겠네. 이 늙은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런···.”
“그런 말씀 마세요. 천수를 누리셔야지요.”
파레호 노인은 거칠어진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이드로젠도 인제야 긴장이 풀리는 듯 손끝의 미세한 떨림이 멈추었다.
‘노인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엄살이 아니라 진짜 큰일 날 뻔했다.
다행히 다 마르드의 첫 번째 시험에 통과했지만 내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할 판이다.
단지 파레호가 시험자로 추가됐을 뿐인데 이건 뭐, 쪽지시험에서 수능으로 변한 것처럼 난이도가 대폭 올라갔다.
소설 속 내용과 상이한 시험의 난이도와 정답에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벤하트 혼자 보던 시험에 단지 노인 하나만 추가됐을 뿐인데···.’
첫 번째 시험부터 이 정도라니.
노인을 인제 와서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일단 다음 시험 문제를 떠올렸다.
[너를 울고 웃게 하고 젊게 만들어주며 찰나에 태어나지만, 평생 지속되는 것은?]
이것이 두 번째 시험 문제.
답은 기억이다.
하지만 답이 기억이라는 것도 이제 장담할 수가 없게 되었다.
더구나 기억을 표현한 조각상이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자네는 다 마르드라는 놈이 만든 이 시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파레호는 턱을 괴고 다 마르드의 시험에 관해 물었다.
“모두 알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시험의 답이 달라서?”
“맞습니다.”
시험의문제는 동일하지만 답이 다르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첫 번째 시험에 통과한 뒤 곧바로 두 번째 시험이 공개돼야 정상인데, 역시나 아직까지 방안에는 시험과 관련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저희가 문제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시험의 힌트와 문제는 켈베로스 조각상에 있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시험은···.
“역시나 이 조각상에 뭔가 쓰여 있는구먼.”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 조각상. 켈베로스 조각상처럼 그 아래에 짧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뭐라고 쓰여 있나요?”
“지혜는 듣는 데서 오고 후회는 말하는 데서 온다.”
“그럼 속담은 처음 들어보는군요.”
어머니 조각상 아래의 글귀를 확인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혜는 듣는 데서 오고 후회는 말하는 데서 온다라.
후회하기 싫으면 지금부터 입 닫고 말하지 말라는 뜻인가?
“파레호 공, 일단 글귀의 말대로 해보시죠.”
“그려. 함구무언 하겠네.”
츠츠츠
파레호와 글귀의 내용을 이해하자 잠시 후 중앙에 있던 켈베로스 조각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니, 무너진다기보다는 재구성되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켈베로스를 구성하고 있던 조각들은 퍼즐처럼 분리되더니 곧이어 각각의 개체로 자리 잡았다.
‘저건 뭐지?’
벌집처럼 보이는 수많은 개수의 함.
함이 풍기는 수상한 기운 때문에섣불리 그곳을 향해 다가가지 못했다.
파레호와 나는 제자리에서 침만꼴깍 삼키며 정체불명의 함을 경계했다. 켈베로스 조각상이 벌집 같은 함으로 모두 변하고 난 뒤, 잠시 후 함의 뚜껑이 개방되었다.
“뭔가 시작되었나 보구만.”
“파레호 공, 쉿!”
“아차.”
우리의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온 순간을 기점으로 함 속에서 무언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엄청난 숫자의 벌레들.
한 마리당 성인 남성의 주먹만큼이나 커다란 크기를 자랑하는 벌레들이 사나운 기세로 날아들었다.
‘일단 피하시죠.’
파레호에게손짓을 하며 도망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카이드로젠의 반대 방향으로 힘껏 달렸다.
중앙에 있는 함을 기점으로 원을 그리며 두 번째 시험 문제를 얻기 위한 방법을 강구했다.
타닥타닥! 위이이잉!
파레호와 나의 발소리에 맞춰 벌레들은 춤을 추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함에서는 벌레들이 소름 끼치는 날갯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이윽고 다 마르드의 방안을 모두 채울 만큼 많아진 벌레의 숫자.
그들을 피해 도망치던 나는 더이상 움직일 공간이 없어 꼼짝없이 제자리에 서서 가만히 그것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많은 놈을 무슨 수로 처치하지?’
부우웅! 위이이잉!
수천 마리의 벌레들이 내는 소음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함에서 나온 엄청난 숫자의 벌레 때문에 파레호가 어딨는지도 보이지 않을 만큼 시야가 흐려졌다.
맨손으로 이들을 상대할 수는 없는 요량.
카이드로젠은 눈앞에 벌레들을 모두 베어버릴 기세로 검을 뽑아 들었다.
채앵!
칼집에서 나오며 발생하는 날카로운 쇳소리. 벌레들은 더욱더 난폭한 기세로 윙윙거리며 위협적으로 주위를 맴돌았다.
큼지막한 크기의 벌레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생김새가 훤히 보였다. 새까만 눈동자와 꼬리에 달린 독침은 말벌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지네처럼 몇십 개씩 꿈틀거리는 다리와 역하게 생긴 푸르딩딩하게 생긴 몸통.
이것을 조합하면 내가 알고 있는흔한 벌레의 모습이 아니었다. 초당 몇백 번의 날갯짓을 하며 내는 소름 끼치는 소음을 듣고 있으니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찝찝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벌레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었다.
“으···. 으읍.”
나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자 벌레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광분하며 미친 듯이 내 주위를 휘젓고 다녔다.
안 그래도 징그러운 벌레들의 생김새가 한눈에 보일 만큼 가까이 붙어있는 상.
언제 독침을 쏘아붙일지 모르는 그들의 날갯짓에 조금씩 이성의 끈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내 몸이 카이드로젠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도망가고도 남았을 텐데···.
‘정신 차려라. 이 한심한 놈아.’
흔들리는 나의 이성에도 카이드로젠은 이게 뭐가 대수냐는 듯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역시 위대하신 칸 제국의 황제인가.
검을 굳게 쥐고 있는 두 손은 오히려 내게 이렇게 묻는 듯했다.
‘눈앞에 있는 이 벌레들을 벨 거냐? 말 거냐? 빨리 결정해라.’
마음 같아서는 화염방사기로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이 고대 대지 부족이 만든 시험의 일부분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만든 시험을 절대 힘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놓치지않은 나는 카이드로젠이 뽑은 검을 다시 칼집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윙윙거리는 벌레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혜는 듣는 데서 오고 후회는 말하는 데서 온다.’
어머니 조각상에 있던 글귀를 떠올렸다.
일단 '후회는 말하는 데서 온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정체불명의 벌레들이 우리에게 반응한 것은 두 가지.
파레호가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었을 때.
그리고 내가 벌들 앞에서 검을 뽑아 들고 신음소리를 내었을 때였다.
‘소리를 내지 않으면 이들이 반응하지 않는 건가?’
가만 보니 이놈들은 내 주위를 공포스럽게 서성거리기만 할 뿐 딱히 공격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으니 이들의 움직임이 살짝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했다.
내 예상이 맞는지 한번 시험해볼까?
“크흠!”
부아아아앙! 부아아앙!
크헉!
역시나 소리에 반응한 벌레들이 발작을 일으키며 광분하기 시작했다.
헛기침 소리를 듣자마자 사나운 기세로 윙윙거리는 벌레들.
미리 예상한 반응이어서그런지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다 마르드 이 정직한 자식.
‘정말 글귀 그대로 이해하면 되는 힌트를 주는구나?’
그나저나 참 다행인 것은 검을 뽑아 들고 이들을 베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성을 잃고 카이드로젠의 검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면···. 이방 안에 있는 수천 마리의 벌레들이 나를 공격했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몸서리 처지는 끔찍한 상황.
‘자, 이건 그렇다 치고 지혜는 듣는 데서 온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수천 마리의 벌레들이 내는 윙윙거리는 소음에 다른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이 벌레들이 내가 듣고 싶은 소리를 못 듣게 방해하고 있는 건가?
‘좋아, 한번 해보자.’
생각이 정리되자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뱉기를 몇 번.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을 아우르는 발전기를 꺼버린 것처럼, 나는 숨조차 쉬지 않으며 내 몸이 내는 모든 소리를 죽였다.
벌레들이 내는 윙윙거리는 소리 너머에 뭔가 들리는 것이 있지 않을까?
‘...’
위이잉
조금씩 잦아들고 있는 벌레들의 날갯짓.
그리고 아까는 들리지 않았던 어떤 작은 소리가 내 귓가에 들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크게···.’
집중하자.
윙윙거리는 벌레 소리 너머로 뭔가 있다.
[너를 울고 웃게 하고..]
“!”
서론만 짤막하게 들었음에도 내가 아는 문제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시험의 문제는 벤하트 때와 동일하다는 것을 이걸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다 마르드의 두번째 시험.
[너를 울고 웃게 하고 젊게 만들어주며 찰나에 태어나지만, 평생 지속되는 것은?]
답은 분명히 기억인데 이걸 어떻게 말해야할까.
기억을 표현한 조각상이 있을 리가 없는데···.
‘혹시···.’
순간 파레호 노인이라면 뭔가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그를 찾기 위해 그가 있던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걸어가다 보니 다행히 우두커니 서 있는 파레호가 등장했다.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는 그에게 조심스레 다가가서 귓속말로 속삭였다.
“너를 울고 웃게 하고 젊게 만들어주며 찰나에 태어나지만, 평생 지속되는 것은?”
“...”
“이것이 문제입니다, 파레호 공. 원래 정답은 기억이지만 기억을 표현할 수 있는 조각상은 없을 것 같아요.”
파레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귀에 가까이 대고 말했다.
“답이 기억이라고? 나는 문제를 듣자마자 전우애라고 생각했네. 거인족들의 동족 사랑이 유별나다는 것은 자네도 알지 않은가?”
“!”
노인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내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그의 말대로거인족들은 다른 어떤 종족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들만의 유대감이 대단히 끈끈하게 이어져 있었다.
비단 소설 속의 내용만으로 알고 있는 내용이 아니다.
얼마 전에 경험했던 리올라도 좀비로 변한 엘로함에게 미련을 보이다가 오히려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는가? 소설 속의 우트그라드는 좀비로 변해버린 동족조차 적으로 간주하지 못하고 끝내 그들의 손에 멸망한 나라였다.
“그렇다면 정답은 전우애가 되겠군요.”
“그렇지. 내가보기엔 부둥켜안고 있는 조각상이 있을 것으로 사료되네.”
파레호의 예상은 근거가 확실했다.
이것이 인생 선배가 보여주는 지혜인가.
그의 연륜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하십니다, 파레호 공.”
그와 함께 조각상을 천천히 둘러보니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거인의 조각상을 발견했다.
말없이 조각상에 손을 올리고 정답을 전우애라고 나지막이 내뱉었다.
츠츠츠
벌레들에게 반응이 있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귓속을 후벼 파던 윙윙거리던 소음은 잦아들었고 우리 주위를 맴돌던 벌레들은 중앙에 있던 함 속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츠츠
잠시 후 모든 벌레가 중앙에 있던 함 속으로 되돌아갔고 방 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나는 파레호를 존경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것으로 두 번째 시험도 통과다.
“겨우 이게 두 번째 시험이었단 말인가?”
“파레호 공, 별일 없으셨습니까?”
“긴장한 게 민망할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네. 고작 벌레들이 날아다니는 것으로 이 늙은이를 시험하려 하다니. 허허,거 참.”
파레호는 너스레를 떨며 만족스럽게 껄껄거렸다.
그나저나 이 파레호 노인.
처음은 우연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두 번째 시험까지 손쉽게 풀어내다니.
첫인상부터 범상치 않은 노인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활약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파레호공.”
“으응?”
“이 신전에서 나가게 되면 칸 제국으로 와주시겠습니까?”
“자네 밑으로 들어오라는 말인가?”
“극진히 대접하겠습니다.”
“허허, 뱃사람이 바다로 가야지 육지로 가면 어디다 써먹겠나?”
“바다가 있긴 있습니다.”
“뭐, 한번 생각해봄세!”
어깨가 한껏 올라간 파레호는 그동안 봤던 표정 중에서도 가장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다음은 뭔가? 이거 몇 번 해보니 참 시시하구먼!”
“이제 마지막 시험입니다. 이번 시험만 통과한다면 거인화의 비술이 있는 곳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앞선 두 번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 우리는 기세가 등등했다.
비록 소설 속 내용과는 조금 다른 시험을 치르고 있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내용보다 오히려 파레호의지혜가 더 의지가 될 정도로 그의 통찰력은 깊이가 있었다.
팟
“으어어? 뭐야?”
“?”
순간 정전이 일어난 듯 온 사방이 다 깜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