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19화
노인의 얼굴은 매우 차분해 보였다.
“내겐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들이니 전달이 매끄럽지 않더라도 이해해주게나.”
“알겠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는 천천히 입을 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말했다시피 나는 에즈만토스 왕국의 어촌 구석에서 고기나 잡으러 다니는 뱃사람이었지. 함장에서 은퇴한 지 겨우 1년밖에 안 된 신입 어부였다네. 비록 해군에 더이상 말뚝을 박지 못하고 전역을 하게 되었지만, 우리 집은 행복했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가 무럭무럭 잘 자라주어 하루하루 꿈같은 날을 보냈다네.”
“이름은 뭐죠?”
“카일라 레딘. 내 딸래미는 약초학에 큰 두각을 나타내어 왕궁 양초계까지 진출했다네. 이 보잘 것 없는 가정에서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이룩한 정말 기특한 아이지.”
“카일라 레딘이요?”
굴속에 있던 무덤의 명판에 분명 카일라 레딘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페이튼의 거인화 비약 탐사대에 들어온 그녀는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파레호는 딸과의 추억을 상기하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헤벌레하는 표정은 단연코 딸바보 아빠였다.
그를 보며 형언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슬픈 감정이 벅차올랐다.
“모든 비극은 페이튼이 주도한 거인화 비약 탐사 원정대로부터 시작되었다네. 내 딸이 왕궁으로 출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아내가 크게 아프기 시작했고 우린 돈이 필요했어. 내가 평생을 함장으로 일하며 벌어둔 돈으로도 약값을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 내 딸은 큰 보수를 약속받은 채 원정대로 지원했고 그렇게 인간들에게 불모지였던 이곳. 우트그라드로 가기로 결정 났네. 나는 내 딸을 이렇게 위험천만한 곳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네. 하지만 뜻이 워낙 확고해서 꺾을 수가 없었지. 어쩔 수 없이 내 딸을 지키기 위해 나도 원정대에 지원해서 함께 들어오게 되었다네.”
이때부터 파레호의 눈꺼풀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호루크 신전에 대한 정보는 너무나도 부족했어.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골렘들의 공격에 원정대는 괴멸됐고 페이튼 왕과의 연락은 끊겨버렸어. 신전 안에 고립된 우리는 한없이 페이튼의 지원을 기다렸네. 하지만 나와 내 딸을 포함한 원정대를 밀어 넣은 그는 우리를 찾아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 그 누구도 여기에 버려진 우리를 기억해주지 않았지.”
과연 페이튼다운 행동이다.
썩을 노무 자식.
“목숨을 걸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네. 하지만···. 하지만 그가 내게 돌려준 것은···. 그가 내게 돌려준 것은!! 살아남기 위해선 인간임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추악한 짓을 저질러야 하는 생지옥이었다네!!!”
그는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냈다.
“움직이는 토템과 함정들 사이에서 고립된 우리는 수개월 간 지속한 배고픔 끝에 결국···.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했네···.”
“!”
“그래···. 잡아먹었어 말 그대로. 문명인이라고 불리는 에즈만토스 왕국의 인재들이 배고픔을 못 이기고 서로를 물어뜯었단 말이다. 자네는 그런 광경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그 상황을 겪고 난다면 미치지 않고서야 버틸 수 있겠냐는 말이다!!!”
파레호는 더이상 말을 이어가기 힘든 듯 고개를 떨구고 침묵했다.
호루크 신전 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참사.
소설 속에서도 묘사되지 않는 충격적인 사실에 속이 메스꺼워 울렁거렸다.
“나는내 딸을 지키기 위해 미쳐버린 놈들에게 응당 마땅한 죽음을 선사했다. 그들을 처단하기로 한 내 결심에 후회는 없다. 나와 카일라는 마지막까지 인간으로 해야 할 도리를 지켰어. 이것이 바로 네 놈이 궁금해하는 이 동굴에서 있었던 일이다. 자, 어떠냐? 이제 좀 속이 시원한가? 젊은 뱃사공이여!”
그는 딸을 지키기 위해 미쳐버린 동료들을 죽였다.
처절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는 노인의 절규를 보며 가슴을 송곳으로 쿡쿡 찌르는 듯 아파왔다.
“유감입니다, 파레호 공.”
“그러고 보니 아직 자네의 정체가 뭔지도 모르고 있었군. 페이튼이 보낸 조사단인가? 그렇다면 날 체포하게. 나는 임무에도 실패하고 동료들을 죽인 배신자니까 말이네.”
파레호는 수갑을 채우라는 뜻으로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큰오해가 있습니다, 노인장. 나는 에즈만토스의조사단이 아닙니다.”
“뭐야? 그럼 자네는 대체 누군가?”
“칸 제국의 황제, 카이드로젠입니다.”
“여긴 왜 왔지?”
“볼일이 있어서요.”
“내가 아는 칸 제국의 황제는 미친놈이라 들었는데···."
"예?"
"이곳에 들어온 걸 보니 역시 소문이 확실하단 뜻이겠군.”
내가 칸 제국의 황제라는 것을 알고도 크게 개의치 않은 모습을 보이는 파레호 노인.
“아무튼, 파레호 공. 이곳에서 계속 무의미하게 시간을 허비할 생각입니까?”
“나를 지탱하던 삶의 원동력을 잃었어. 내 딸과 아내는 모두 죽어서 없어져 버렸는데 굳이 밖으로 나갈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나저나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서 속에 있던 얘기를 풀어내니 참 후련하긴 하구먼.”
“나는 당신이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저 끝내고 싶겠지요. 이 모든 걸 말입니다. 딸과 아내를 잃어버린 남자. 그리고 살아갈 목적이 없는 이러한 삶을···. 당신은 이 동굴을 나가는 것이 골렘들보다 두려운 것이지요. 이 동굴에서 나가면 딸과 아내가 없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파레호는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당신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소. 자네가 칸제국의 황제라고 하면 더더욱 나와 상관없지. 이제 날 다시 내버려 두시오. 나는 지쳤소.”
“파레호 공, 잘 들으세요. 따님과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우나 하늘에서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그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과연 행복할까요?”
노인은 삐죽하게 자란 머리카락 사이로 카이드로젠의 두 눈을 응시했다.
“페이튼은 지금도 자신이 지닌 마법에 대한 욕망 때문에 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막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것이고요. 파레호 공. 내가 당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우리는 비슷한 처지에 있습니다. 나 또한 페이튼의 손에 가족을 잃은 몸입니다.”
“그게 사실인가?”
“아레스 빌라트. 칸 제국의 선대 황제였던 내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참 유감스럽구먼.”
“괜찮다면 당신이 잃은 삶의 원동력을 내가 주겠습니다. 나는 반드시 이 신전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합니다. 페이튼이 행하고 있는 재앙적인 고리를 끊을 수 있게 나를 좀 도와주시지요. 우리 힘을 모아서 페이튼에게 복수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파레호 공.”
사실 나는 파레호라는 노인의 도움 없이도 호루크 신전을 공략할 수 있다.
나의 정보력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풍부하고 전투력은 카이드로젠이 보증한다.
하지만 노인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듣고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페이튼으로 인해 신전에서 지옥과도 같은 날들을 보낸 파레호라는 노인에게,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목적의식을 심어주고 싶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손을 잡을 것을 제의했다.
“페이튼이 아직도 그 욕망을 채우고 있는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자네가 여기 온 건 이유는 우리 원정대와 같은 것이고?”
“맞습니다.”
“내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 우리 원정대는 얼마 전진하지도 못한 채 포기해버렸으니까 말이야.”
“어디까지 공략하셨습니까? 파레호 공. 사소한 것이라도 괜찮습니다.”
“음···. 그래. 이 사실은 분명 자네에게 도움이 될 거야.”
파레호 노인은 턱을 흔들며 천천히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양반다리를 하고 자리에 앉은 채 원정대가 경험한 썰을 풀어냈다.
“아까 등장한 골렘 봤지?”
“봤습니다.”
“자네는 골렘의 약점이 어딘 줄 알고 있나?”
“가슴팍에 있는 초록색 구슬이요.”
“그건 알고 있군. 하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 약점을 모를래야 없지.”
“그렇죠.”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원정대는 온통 바보 천지였다네. 너무나도 훤히 보이는 약점이 설마 진짜 약점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게야. 우리 원정대는 반 이상이 괴멸되도록 그들의 약점을 공략하지 못했어.”
“아이고.”
“정말 바보 천지 같은 사실이 무엇인 줄 아는가? 사실은 다들 골렘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네. 하지만 겁에 질린 나머지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하고 도망치기 바빴어. 약점을 공략하기 위해선 골렘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했으니까.”
파레호는 그때의 참사가 생생한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괴로워했다.
“아,미안하네. 넋두리는 그만해야 하는데 도무지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구먼.”
“괜찮습니다, 파레호 공. 천천히 말씀하십시오.”
“진짜 쓸만한 팁을 전수해주지.”
“예.”
“자네도 알겠지만, 호루크 신전은 엄청나게 거대한 신전이자 동굴이야. 이곳은 가늠할 수조차 없는 광활한 크기를 자랑한다네.나조차도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으니 말이야. 자네, 뒤를 한번 돌아보게. 자네가 왔던 길을 한번 쳐다보라 이 말이야.”
노인의 말에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바라본 방향은 내가 걸어온 신전의 입구다.
“입구가 보이는가? 당연히 보이지 않지. 어두우니까! 하지만 입구가 안 보이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네.”
“그게 뭡니까?”
“주술사 놈들이 만든 토템들은 이곳의 흙과 바위를 양분으로 하여 만들어졌다네. 그들은 신전 곳곳을 누비면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지형을 바꾸고 있어. 우리가 신전을 들어왔던 입구가 안 보이는 것은 당연해! 망할 토템 놈들이동굴의 지형을 바꾸어 놓은게야! 마치 미로처럼! 내가 예상하기에는 의도적으로 입구를 찾을 수 없도록 설계 된 게 아닌가 싶어.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아직도 신전 안에서 헤매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말이네.”
“이것 참 큰일 났군요.”
“큰일 난 말투가 아닌데? 거 참 태평한 뱃사공일세.”
파레호는 김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원정대가 내린 결론은 이거였네. 신전의 끝에 있는 거인화의 비술을 손에 넣는 방법만이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앞으로 어떤 장애물들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전진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어. 그러던 어느 날 골렘 같은 토템이 아닌 다른 생명체를 만난 적이 있었지.”
“그건 뭐였죠?”
“공포에 질려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지만, 우트그라드의 거인족이 확실했어! 우리는 죽기 살기로 그에게 달려가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네. 하지만 그놈은 오히려 우리에게 도끼를 휘둘러댔지. 그리고는 갑자기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더니 우리를 멀리 날려버렸어.”
대지 부족이 만든 수호신이라는 존재를 만난 건가?
노인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점차 빠져들었다.
“골렘들이 돌아다니는 이곳을 첫 번째 관문이라고 한다면 우릴 날려버린 그 주술사 거인 놈이 두 번째 관문이라고 생각한다네. 그놈에게 당한 뒤로 우리 원정대는신전을 공략하는 것을 반쯤 포기해버렸어. 식량은 바닥난 지 오래고 누가 죽었고 살아있는지도 모를 만큼 혼란스러웠다네. 너무나도 지친 우리는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뭐, 뒷이야기는 자네가 아는 그대로네.”
“그런데 어르신은 식량도 없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계신 겁니까?”
“나? 나야 뭐, 운이 좋았던 게지. 아사하기 직전에 우연히 풀떼기가 손에 잡히더라고. 그래서 송아지처럼 우악스럽게 뜯어먹으며 지금까지 연명하고 있다네. 끅끅끅.”
그는 자조적인 쓴웃음을 지으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아, 진짜 팁을 알려줘야지. 늙은이가 참 쓸데없는 서론이 길었구먼.”
노인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우리를 날려버린 거인의 위치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