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18화
“작업실이라니요? 여기서 무슨 일을 하시는 거죠?”
“일? 내 일? 아 맞아, 내 일. 그래 일이 있었지. 여기 보다시피 여기 이 아가씨를 수리하는 중이라네!”
아가씨?
배를 뜻하는말인 것 같은데 아무리 둘러봐도 배는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동굴 안에 배가 있을 리가···.
“아,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먼저 내 선원들을 소개하지. 저기 충각을 수리하고 있는 놈은 다돌라즈! 아주 똘똘한 놈이지. 전투에서 혀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말을 못 한다네. 나 원 참, 하필 잃어버려도 혀를 잃어버리나? 재밌는 놈이었는데 아쉬워.”
노인이 다돌라즈라고 소개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해골이었다.
그것도 목 밑으로는 나무 막대기로 거치되어 머리만 덩그러니 남은 해골···.
“저기! 선미에 멀뚱히 서 있는 저놈은 뱅가프라트! 저 망할 놈은 싸가지는 없지만 실력이 괜찮은 놈이야. 나와는 사이가 별로라서 아무리 말을 걸어봐도 절대 입을 열지 않지.”
뱅가프라트 역시 해골이었다.
젠장, 이 노인은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다.
“여보세요, 노인장. 여긴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당장 밖으로 나가세요.”
“가긴 어딜 가! 나 같은 바다 사나이가 바다를 떠나면 어디로 가겠나? 개떡 같은 소리 하지 말게 젊은이!”
“개떡 같은 소리는 제가 아니라 바로 노인장께서 하고 계십니다. 여기가 무슨 바다···.”
“떽! 어린놈이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네 놈을 당장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주랴?”
노인은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동굴 안에서 메아리쳤다.
“다돌라즈! 뱅가프라트! 출항이다! 여기 애송이에게 바다의 무서움을 보여주자!”
대답 없는 해골을 향한 공허한 외침.
이 노인의 언행으로 봐서는 그는 우트그라드로 진입하기 위해 배를 조종한 에즈만토스 왕국의 선장인 것 같았다.
페이튼의 일행이 칸 제국 너머에 있는 우트그라드로 오기 위해선 오로지 배를 타고 해안가에 상륙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
본국으로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고 동굴 속에 갇혀 결국 미쳐버린 노인이 안쓰러웠다.
“노인장! 노인장! 더이상 여기서 나가라고 하지 않을 테니 바다의 무서움은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대신 나에게 당신의 이름을가르쳐 주시지요.”
일부러 오버액션을 하며 그의 장단에 맞추었다.
노인은 내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씨익 웃으며 다가왔다.
“나는 해군의 함장을 꿈꾸던 파레호라고 하네. 젊은이를 오랜만에 보니 정말 반갑군. 클클클.”
“함장을 꿈꾸던? 그럼 지금은 함장이 아니신 겁니까?”
“젊은이!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라네! 어촌 구석탱이에서 물고기나 잡으러 다니던 이 파레호의 꿈을 짓밟지 말아 주게나!”
함장은 아니고 그저 평범한 고기잡이.
에즈만토스 왕국에 살던 평범한 어부인가?
“당신의 꿈을 지지합니다, 노인장. 그런데 함장이 되고 싶다면 하루빨리 에즈만토스 왕국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순간.
에즈만토스 왕국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노인의 흐리멍텅한 눈이 매섭게 변하며 사나운 기운을 내뿜었다.
“에즈만토스? 에즈만토스라고? 자네 지금 에즈만토스라고 했나! 그 단어를 한 번만 더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작살로 네놈의 목을 꿰뚫어버릴 것이야! 냉큼 대답해라, 젊은이! 지금 당장!”
몹시 분노하여 살기를 내뿜는 노인.
“당자아앙!”
아니 갑자기 왜 이래?
난 단지 그의 안전이 걱정돼서 에즈만토스 왕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봤을 뿐인데!
길길이 뛰는 노인의 역정에 다소 어처구니가 없었다.
“입 조심해라, 애송이 녀석. 난 네까짓 놈이 우습게 볼 그런 사내가 아니야.”
“우습게 안 봤는데요?”
“내가 얼마나 에즈만토스 왕국에 충성을 다했는데 네 놈이 나를 무시한단 말이냐!”
대화가 통하지 않는 노인.
그는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굴 속에서 고립되어 있다 보니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분명했다.
얼마나 오래 동굴 속에 있었으면 이렇게 정신이 나가버린 것일까···.
미쳐버릴 정도로 혼자서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을 노인을 생각하니 그에게 다소 측은한 마음이 지어졌다.
일단 이 노인을 동굴 밖으로 인도하자.
입구에 있던 골렘들은 모두 처치했으니까 신전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너는 나를 무시할 자격이 없다.”
하지만 노인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작살 하나를 손에 쥐며 말했다.
“무시 안 했다니까요.”
“내 심기를 거스르지 마라. 두 번의 관용은 없어.”
영 적응이 안 되는 화법.
그는 작살을 들고 다짜고짜 어디론가 뛰기 시작했다.
‘오마이갓.’
또 어떤 골렘 같은 수호신들이 나타날지 모르는데 노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위험하게 달렸다.
그는 자신만큼이나 늙어버린 작살을 손에 쥔 채 어디론가 향했다.
“노인장, 어디로 가는 겁니까?”
“흥.”
“신전 안에서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면 위험하다니까요!”
“닥쳐라, 애송이.”
“그러다 노인장이 표적이라도 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이곳은 위험한 곳이니 잠시 좀 멈춰보세요.”
타다닷
발소리를 줄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노인.
짧은보폭으로도 빠르게 이동하는 노인의 뒤를 쫓았다.
그는 어두운 동굴 안의 지리가 익숙한 듯 능수능란하게 바위와 조각상들을 뛰어넘으며 전진했다.
젠장···.
대체무슨 생각인 거야?
쿠구궁
말 끝나기 무섭게 등장하는 한 무리의 골렘.
이미 입구에서 마주친 골렘들과 동일한 스펙을 가진 무리였다.
전투력은 카이드로젠에 비할 바 못하지만, 놈들의 숫자는 어림잡아 10마리.
저 정도의 숫자가 동시에 달려든다면 노인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웠다.
“여긴 제게 맡기세요. 제가 속전속결로···.”
“시건방 떨지 마라. 늙었다는 건 곧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예?”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네 놈에게 기댈 만큼 나약한 노인이 아니란 게다.”
노인은 작살을 들고 그대로 골렘들에게 돌진했다.
이어서 선사하는 믿기지 않는 움직임.
"하이얍!"
그는 마치 물고기를 사냥하듯 골렘의 가슴팍에 작살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작살을 다시 뽑아낸 후 다음 타겟에 쑤셔 넣으며 차례대로 골렘을 쓰러뜨렸다.
노인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낡은 작살 한 자루만으로 자연스럽게 상황을 타개했다.
“흐라아압!”
쩌렁쩌렁하게 동굴 안을 메우는 노인의 외침.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마지막 골렘까지 힘없이 고꾸라지며 소멸했다.
‘이 노인, 대체 정체가 뭐야!’
능숙한 솜씨로 정확하게 골렘의 약점을 공략하는 노인 파레호.
작살을 회수하는 노인을 보니 첫인상과는 다르게 그의 회색빛이 도는 덥수룩한 수염이 멋있어 보이기 시작했다.
“한 수 배웠습니다. 노인장.”
“더이상 나를 무시하지 말게나.”
“무시한 적 없다니까 자꾸 그러시네.”
“이제 다시 우리 아가씨를 고치러 가볼까? 자네의 눈빛을 보니 빨리 바다로 나가고 싶은 눈치로군.”
살기를 내뿜던 파레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범한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파레호는 이런 행동을 무한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의외로 골렘들을 잘 공략하며 살고 있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언젠가 죽는다.
그것도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 호루크 신전 안에서 혼자.
“노인장, 일단 우리 얘기 좀 하시지요. 난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어째서 인간을 배척하는 우트그라드에 당신 같은 인물이 들어왔는지. 호루크 신전의존재를 어떻게 알았는지.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들어왔는지도 말입니다.”
발걸음을 옮기려는 노인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마주치며 강한 어조로 그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심증은 있지만, 나는 그에게 확실한 증언을 듣고 싶었다.
“그 입 닥치라고 했다, 젊은 뱃사공. 어린 나이에 객사하고 싶지 않다면 거기까지 하는 것이 좋을 게야. 방금 내 모습을 보고도 나를 무엄하게 대하다니 자네는 미친 것이 틀림없어.”
“미친 것은 당신입니다. 이곳을 잘 둘러보세요! 진심으로 여기가 해안가로 보이는 겁니까? 이곳은 배가 출항하고 자시고 할 수 있는 바닷가가 아니란 말입니다!”
흔들리는 그의 눈빛에서 그가 내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미친 척도 하지 마세요. 노인장은 본인의 연기력을 몹시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허! 참, 그런 저급한 연기에 내가 속을 줄 아십니까? 대체 미친 척을 하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것이 뭡니까? 지금이라도 에즈만토스 왕국으로 돌아가면 용맹한 함장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입 닥쳐!! 끅끅···. 그 입 닥치란 말이다!!!”
파레호는 갑자기 서럽게 웃었다.
아니···.
그것은 웃는 건지 흐느끼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당신 같으면!!! 이 상황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나!!”
한참을 끅끅거리더니 갑자기 꽥하고 소리를 지르는 파레호.
“말해보세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는 기진맥진한 채로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이상 말할 힘조차 없는 건지 가만히 카이드로젠을 노려보던 그는 동굴의 구석진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또 다른 굴이 존재했다.
아담한 사이즈의 굴은 그가 직접 만든 듯 작고 투박했다.
거인족의 동굴 속에 인간의 굴이라니.
나는 노인을 잠시 내버려 두고 그가 가리킨 방향의 굴로 들어섰다.
또 다른 굴속의 어둠에 눈이적응하자 충격적인 장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이건?’
그것은 바로 수십 명의 인간의 뼈가 즐비한 무덤이었다.
‘이들이 호루크 신전을 공략하러 온 페이튼의 일당인가.’
에즈만토스 문양이 그려진 플레이트 갑옷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뼈다귀는 이들이 페이튼의 부하였다는 것을 보여줬다.
에즈만토스의 연금술사를 상징하는 자주색 로브.
마법사를상징하는 보라색 로브.
약초학사를 상징하는 연두색 로브까지.
에즈만토스의 다양한 직업군이 조직을 이루어 신전으로 파견된 모습이었다.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무덤은 파레호가 각별히 신경 쓴것으로 보이는 해골이 위치했다.
명판에 쓰여진 이름은 카일라 레딘.
다른 무덤과는 다르게 깔끔하게 관리 된 명판을 보며 이 자는 파레호가 아끼던 병사인 것 같았다.
“어우. 냄새.”
시체가 뿜어내는 역한 냄새 때문에 굴 탐방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서둘러 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후아!”
에즈만토스 왕국에서 파견된 인원 중, 살아남은 사람은 파레호 혼자였다.
그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파레호 공.”
우두커니 서 있는 파레호 노인.
작살을 들고 있던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나?”
“그렇습니다.”
파레호는 목소리를 깔고 음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