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16화
리올라는 카이드로젠에게 고함을 지른 후 한참을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릴 적부터 동경하던 낮벼락 부족의 영웅.
좀비가 돼버린 엘로함.
그리고 망설임 없이 한순간에 그의 목을 잘라버린 카이드로젠.
짧은 순간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머릿속이 뒤죽박죽 섞인 듯 어지러웠다.
“엘로함···.”
그녀도 사실 엘로함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트그라드의 단 한 명의 거인도 그러한 경우는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까.
자신이 자랑하는 상급 치유 주술도 무의미했다.
엘로함은 물론이고,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부하가 좀비로 변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이드로젠을 만나고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 그가 치료 약을 가지고 들었을때, 생체실험의 부작용으로 고통받는 거인들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일말의 기대감이 든 것이 사실이다.
혹시 엘로함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는 건가?
변하기 전 모습으로 치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이는 게 최선이다.]
카이드로젠이 뱉은 말이 아직도 리올라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는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린돌프를 치료했고 그녀 또한 자주색의 반점이 사라지는 것을 직접 경험했으니까, 그의 말은 신빙성이 있었다.
한낱 인간이 칸 제국의 황제랍시고 건방 떠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그의 행동에는 진심이 느껴졌다.
그가 안 된다면 안되는 것이다.
“하아···.”
리올라는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는 되지 않았다.
엘로함을 살리고 싶은 미련이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무엇보다 리올라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좀비가 돼버린 엘로함의 눈빛이었다.
자신을 친딸처럼 대해주던 그의 눈빛은 그녀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오직 피를 갈망하는 새빨개진 두 눈···.
이성이라고는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없는 짐승 같은 눈빛은 리올라의 소중한 추억을 얼룩지게 했다.
[카라라락!리올라! 리올라!]
좀비가 흉내 내는 엘로함의 목소리는 분명 엘로함과 다를 바 없었다.
엘로함 특유의 가벼운 듯 툭툭 던지는 친근한 음성.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엘로함의 잔소리를 들으며 전사로 거듭난 리올라는, 좀비가 엘로함의 목소리를 흉내 낸다는 사실이 불쾌하고 역겨웠다.
거기다 목을 긁으면서 내는 소름 끼치는 쇳소리까지.
엘로함의 의지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부족의 영웅이 처참하게 변해버린 모습을 보고 리올라는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부족장으로서 실격인가···.”
리올라는 엘로함을 포함한 자신의 부족이 점점 좀비로 변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떠한 해답도 제시하지 못했다.
부족장이라는 타이틀을 어깨에 짊어지고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재앙과도 같은 일.
만약 카이드로젠이 오늘 이곳을 찾지 않았다면 낮벼락 부족을 물론이고, 언젠가 우트그라드에 있는 거인 모두가 좀비로 변해 죽어버렸을 것이다.
문득 그녀는 그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우트그라드는 그동안 인간 전체를 적대하고 증오해왔는데 왜 그는 기꺼이 이곳에 찾아와서 호의를 베풀었을까?
과거는 과거일 뿐인데오히려 우리가 스스로 괜히 움츠러들어 벽을 세운 것이 아닐까?
“아직 그의 본심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카이드로젠은 페이튼과 달랐다.
무슨 일을 하든 뒤에서 지시만 내리며 수상한 꿍꿍이를 숨기던 페이튼과는 다르게 그는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우리를 도와주려 애썼다.
특히나 엘로함에게 당할 뻔한 나를 극적으로 구해주지 않았는가?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는데···.”
리올라는 엘로함이 사나운 기세로 달려들던 상황을 기억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엘로함은 리올라를 향해 거침없는 움직임으로 주먹을 내질렀지만, 그녀는 엘로함에게 도끼를 휘두를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다면 엘로함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허황한 바램.
명확한 근거도 없이 그저 요행이 통하기를 바라는 한심한 생각.
그것은 평소에 자신이 경멸하는 형편없는 위인들이나 하는 생각이라고 무시하던 그녀였다.
갑자기 카이드로젠에게 빽하고 소리 지른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고작 한다는 말이···.
[이곳을 떠나라! 이방인! 지금 당장!]
리올라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부여잡으며 지난 일을 후회했다.
낮벼락 부족의 부족장이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감정에 휩쓸리다니···.
카이드로젠은 이 빌어먹을 좀비화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지난날처럼 가만히만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이 나라는 그가 필요하다.”
머릿속으로 정리가 끝난 그녀는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오랜만에 나가는 동굴 밖이 낯설다고 느낄 찰나···.
그녀의 눈앞엔 또 다른 진귀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
“아···. 아니 이게 무슨···.”
드디어 나왔군.
그녀를 기다리는 상황이 슬슬 좀이 쑤실 무렵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하이야아.”
기지개를 켜며 리올라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는 마음을 어느 정도 추스른 듯 다시 침착하고 기품있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동굴 밖의 모습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놀라는 표정이 꽤나 볼만했다.
“리올라 부족장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와아아아!”
동굴 밖에서 무릎을 꿇은 채 리올라를 맞이하는 낮벼락 부족원.
그들은 내가 리올라의 마음이 풀리길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자발적으로 내 주위에 자리를 잡고 그녀를 함께 기다렸다.
스무 명도 채 남지 않은 소박한 인원이었지만 성장이 끝난 완전체의 거인들이 한 곳에 모여 있으니 마치 중대급의 군대를 연상시켜 보는 것만으로도 듬직한 풍채를 자랑했다.
우렁찬 목소리로 리올라를 반기는 부족원들.
나는 그 중심에 거만한 포즈로 거의 누워있다시피 앉아서 리올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게 나왔군. 마음의 정리는 잘 됐나?”
“마음의 정리라고 할 게 뭐가 있겠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거늘. 근데 네 놈들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
“카이드로젠님이 우리 부족을 돕겠다고 했습니다! 부족장님의 마음이 풀리셨으면 하는 마음에 저희도 같이 기다렸습니다!”
“부족장님! 몸 곳곳에 퍼지던 자주색의 반점이 드디어 사라졌어요! 카이드로젠님을 진정으로 믿어도 되지 않을까요?”
“우트그라드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이 나서 나에 대한 믿음을 내비쳤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나라 전체를 전염시켜 고통받게 만든 생체실험의 부작용.
자신을 포함한 우트그라드의 이름난 의술사조차 아무런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한 재앙.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한 인간이 찾아오더니 말끔하게 병을 고쳤다.
하루하루 절망 속에 살아가던 그들에게 나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낮벼락 부족원들은 손가락으로 휘파람을 불 만큼 내게 마음을 활짝 연 상태.
지금 중요한 건 리올라의 반응이었다.
“카이드로젠.”
“왜?”
“솔직하게 말해주게. 왜 우리를 돕는 것이냐?”
“아까 다 말하지 않았나? 우트그라드가멸망하지 않길 바란다고.”
“그런 표면적인 이유 말고 너의 진짜 속내 말이다.”
그녀의 단호한 음성에 요란하던분위기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부족원들은 숨을 죽이고 리올라가 꺼내는 얘기에 집중했다.
나는 비스듬히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뭐, 말해주는 거야 어렵지 않으니 흔쾌히 알려주마.”
“그래.”
“나는 우트그라드를 칸 제국의 속국으로 만들 생각이다.”
내 말에 리올라는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그게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나?”
“그렇다.”
“지금 우트그라드를 이끄는 젊은 거인들은 인간의 지배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싶어하는 마당에 인간의 속국으로 들어간다? 유감스럽지만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야.”
“좀비화로 망하기 일보 직전의 나라가 보일만 한 자세가 아닌 것 같구나. 내가 돕지 않는다면 너희 우트그라드는 반드시 자멸할 것이 뻔하다. 나라가 망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거인족으로서의 긍지인가? 내가 보기엔 그저 아집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비난하더라도 딱히 할 말은 없다. 우리 거인족은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살아왔을 뿐이다. 자존심 강한 거인들은 인간들의 지배를 받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다.”
리올라가 말하는 젊고 자존심 강한 거인은 필시 서리도끼 부족을 칭하는 의미일 것이다.
겔미르가 이끄는 서리도끼 부족.
그들은 우트그라드를 구성하는 부족 중 가장 강력한 부족임과 동시에 인간을 극도로 혐오하는 부족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겔미르의 의지를 꺾지 않은 한, 우트그라드는 순순히 칸 제국의 속국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찾아온 것이 아니겠나, 리올라.”
“무슨 뜻이지?”
“이미르 의식. 내가 겔미르와 이미르 의식을 치르겠다.”
나의 발언에 리올라를 포함한 낮벼락 부족원 전체가 귀를 의심했다.
"으응? 방금 뭐라고 하셨지?"
“카이드로젠님이 이미르 의식을?”
“그보다 그게 가능하긴 한 거야? 카이드로젠님은 인간이잖아.”
“나도 몰라. 저분의 의도가 뭔지 잘 모르겠어.”
칸 제국의 황제라는 인간의 포부는 어디까지인가···.
인간이 이미르 의식을 치르는 사례는 당연히 없었고.
본인이 직접 하겠다고 나서는 경우는 더더욱 없었다.
그릇부터 남다른 나의 행보를 평범한 거인들의 머리로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리올라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이었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잘 모르는 모양인데 단순히 겔미르와의 결투에서 이긴다고 우트그라드의 전쟁군주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거인족만이 전쟁군주가 되어 특수한 도구를 사용할 수···.”
“집결의 뿔피리.”
“뭐···. 뭐라고? 네 놈이 그것을 어찌 아느냐?”
“책에서 읽었다.”
“거짓말하지 마라! 카이드로젠!”
리올라는 책에서 읽었다는 나의 발언에 빽하고 호통을 쳤다.
‘진짠데···.’
이미르 의식을 통해 전쟁군주로 등극하면 거인족 전체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집결의 뿔피리를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는데 오직 전쟁군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이 도구는 사용자가 원할 때 거인족을 부릴 수 있는 환상의 아이템이었다.
뿔피리를 통해 명령을 내리면 그들은 전쟁군주의 명령에 죽음을 불사하고 따랐다.
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과거의 전쟁군주들은 이 도구로 하여금 다른 나라와의 전쟁 시 사용하곤 했다.
뿔피리를 사용할 수 있는 통치자를 전쟁군주라고 칭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 하나.
‘쿨타임이 일 년이나 되는 아이템이란 거지.’
일 년에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뿔피리는 아주 신중하게 사용해야 했다.
“그 사실을 어디서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카이드로젠. 당신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겔미르와의 이미르 의식을 치른다는 것도 어불성설일 뿐이다. 인간은 절대 전쟁군주가 될 수 없다.”
“리올라, 내가 왜 당신을 찾아왔는지 아직 깨닫지 못하겠나?”
그녀는 눈에선 동공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칸 제국의 황제가 알고 있는 것이 대체 어디까지일까 놀라는 표정이었다.
잉대연을 몇 번이고 정독했으니 거의 다 안다고 보면 되지만 그래도 몇 가지.
작가의 묘사가 부족한 부분은 도저히 유추하기 힘들었다.
“내가 모르는 게 하나 있지.”
“그게 뭐지?”
“진정한 거인화의 비술이 담긴 호루크 신전의 위치. 내가 추측하기로는 분명 리올라, 당신이 그 위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소설 속의 벤하트는 우연히 발을 헛디디며 굴러떨어진 곳에서 호루크 신전을 발견했다.
던전을 찾기 위해 벤하트처럼 아무 데나 굴러다니며 찾을 수는 없는 노릇.
카이드로젠으로 빙의한 이상 내게 주인공 버프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내겐 신전의 위치를 알고 있는 리올라의 도움이 필연적으로 필요했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나를 지켜보는 리올라.
그녀는 나를 가만히 쳐다만 볼 뿐 호루크 신전을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 것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더이상 놀랍지 않은 듯했다.
그저 칸 제국의 황제는 아는 게 참 많다고 생각하려나···.
“솔직하게 말해주니 고맙군. 궁금한게 하나 더 생겼다.”
“뭐냐.”
“당신이 겔미르를 꺾을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만약에 집결의 뿔피리를 손에 넣는다면 그것으로 무엇을 할 작정이냐? 과거에 인간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당신 적국과의 전쟁을 원하는 것이냐?”
“그렇다, 전쟁이다.”
리올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그런가···.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군. 거인들이 그런 식으로 이용당하는 것은 내가 원하지 않는다. 더이상 전쟁으로 인한 비극을 초래하고 싶지 않아. 우리나라는 너무나도 오랜 기간을 고통 속에 살아왔어.”
“내 적국은 페이튼이 있는 에즈만토스 왕국이다. 그와의 전쟁을 원하는 것은 우트그라드의 거인들도 피차일반이지 않나?”
“그···. 그건 그렇지만···. 자네가 뿔피리를 다른 목적으로 남용할 수도 있지 않은가?”
리올라의 걱정은 일리 있었다.
그만큼 뿔피리가 가진 힘은 거인족을 맹목적으로 이끌 수 있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라, 페이튼을 죽이고 나면 자네한테 반납하겠다.”
“반납한다고? 뿔피리를?”
리올라는 내 발언이 믿기지 않는 듯 반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트그라드 역사적으로 전쟁군주가 뿔피리를 자진 반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목숨을 걸고 치르는 이미르 의식은 우트그라드의 통치자가 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지만, 사실은 이 뿔피리를 얻기 위해서 치르는 허례허식에 불가했기 때문이다.
소위 전지전능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고 표현하는 뿔피리.
거인족인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군.”
“하!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본 적 있나?”
“아직 없지···.”
나는 머뭇거리는 리올라에게 강하게 어필했다.
“그럼 믿어라! 칸 제국의 황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