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15화
쩌렁쩌렁한 리올라의 외침이 동굴 안을 매웠다.
비록 좀비가 돼버린 영웅이었지만, 리올라는 아직까지도 엘로함에 대해 존경심과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다.
"당장 이곳에서 나가라."
리올라는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겨우 손도끼를 쥐고 등을 돌렸다.
마음의 준비가 끝나기도 전에 엘로함의 숨통을 끊어버린 나 때문에 그녀는 엄청난 원망과 분노의 감정을 표출했다.
부족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과 경애하던 영웅의 죽음···.
나는 그녀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지 못했다.
“다시 만났으면 좋겠군, 리올라.”
우두커니 서 있는 리올라를 두고 굴 밖으로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직 좀비로 변하지 않은 자주색의 거인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그들에게 치료 약을 건네 좀비화가 멈출 수 있도록 도왔다.
“먹어라.”
“...고맙습니다.”
“한 방울만 먹어도 충분하니 조금만 먹어라.”
그들은 인간인 나를 보고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지만, 내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는 린돌프를 보고 안심이 된 듯 치료 약을 받아들였다.
낮벼락 부족의 마지막 한 명까지 치료 약을 먹이고 동굴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젠장···. 이젠 어쩌면 좋지?’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걸까?
조금 급하긴 했지만···. 하마터면 리올라가 죽을뻔했잖아?
'아오. 나보고 어쩌라고.'
본의아니게 리올라와의 관계가 악화된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내가 원하는 목표를 위해선 그녀가 반드시 필요한데···.
예상치 못한 일 때문에 계획이 꼬였다.
“저기, 카이드로젠 황제님?”
등 뒤에서 린돌프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부족장님께서는 혼란스러우실 겁니다. 어릴 적부터 믿고 따르던 엘로함님이 좀비로 변해 죽어버렸으니까요. 그들이 함께한 시간만 해도 50년이 넘습니다. 일반적인 거인족의 관계보다 유대감이 몇 배는 더 끈끈했지요. 부족장님께서는 분명 카이드로젠님에게 악의가 있었다고 생각하시지 않으실 겁니다.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이젠 몸에서 자주색의 반점을 찾아볼 수 없는 린돌프.
그는 애써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리올라님께서 마음을 여실 거라 믿습니다. 저희를 포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카이드로젠님. 아직 좀비화가 진행되고 있는 다른 부족원이 많습니다.”
린돌프는 치료 약의 효과를 체감한 뒤로는 전적으로 카이드로젠을 신뢰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거인족을 구하러 왔는데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모습이 아이러니하군.’
혹시나 내 마음이 바뀔까 싶어 발을 동동 구르는 그의 모습이 귀엽게 보였다.
나는 내가 원하는 그림을 위해 여기서 포기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낮벼락 부족의 부족장, 리올라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한 일.
반드시 그것을 손에 넣을 것이다.
“가서 리올라에게 전해라.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
고대 우트그라드의 거인은 인간들과 어울려 조화롭게 살아가길 원했다.
소수 민족인 그들이원한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국가를 이루어 살아가는 인간들이 부러웠고 단지 인간들과 어울려 하나의 친구, 혹은 동료가 되고 싶었다.
자신들이 가진 힘을 빌려주어 인간들과 유대감을 쌓았고 잠깐 동안은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간들은 거인족의 힘을 빌려 전쟁만을 일삼았다.
그들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전쟁터에 나가 또 다른 인간을 죽여야 하는 모순에 엄청난 환멸감을 느꼈다.
결국, 거인족은 인간에게 더이상 힘을 보태지 않고 교류를 끊은채 험난한 산악지대로 들어가 숨어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간들은 거인족을 가만두지 않았다.
수시로 찾아가서 전쟁에 힘을 보태달라고 떼를 쓰고 감정에 호소했다.
[우리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이오! 제발 좀 도와주시오!]
[우리가 맺은 유대감이 고작 이 정도란 말이오? 거인족!]
[입이 있다면 어디 말 좀 해보시오!]
억지스럽게 애원하는 인간들로 인해 우트그라드는 내부적으로도 적지 않은 갈등이 야기되었다.
젊은 피의 거인족들은 인간을 무시하고 종족의 안위를 챙겨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전성기가 지난 늙은 거인족들은 쉽사리 인간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했다.
상반된 의견을 가진 이들은 충돌했고 긴 시간을 대립하며 소모적인 논쟁을 이어갔다.
그들은 결국 통치자인 전쟁군주가 직접 나서 인간들에게 선포하며 비로소 상황을 매듭지었다.
[우리는 인간들 세상에 더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소이다. 힘이 필요하다면 이 비술을 익혀서 사용하시오. 이것이 우리가 줄 수 있는 마지막 호의오.]
우트그라드의 주술사들이 만들어낸 거인화의 비술.
인간의 육체를 한계까지 향상시켜 일시적으로 거인의 형상으로 변하는 엄청난 효과를 지닌 비술이었다.
이것을 사용하면 뼈가 피부를 뚫고 나와 팔과 다리가 거대해졌다.
거대해진 크기만큼 힘이 강력해지고 거인족 특유의 회복력과 방어력이 더해졌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이 거인화의 비술을 감당하기에는 몸이 쉽사리 버티지 못했다.
거인화 과정에서 느껴지는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은 거인으로 변하기도 전에 쇼크사로 죽어버리기 일쑤였다.
[이번엔 몇 명이나 거인화에 성공했나?]
[100명 중에 딱 2명이 거인화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 2명마저도 과도한 폭력성과 명령 불복종, 그리고 광기화···.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인원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런 젠장! 거인화의 비술은 때려치워라!]
거인족들은 힘을 얻은 인간들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에 순순히 힘을 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거인화의 비술을 선심 쓰듯 전달했고, 그 비술을 사용한 인간은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처절한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갔다.
정상적으로 거인화에 성공한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고 결국 인간과 거인의 관계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잉그람 대륙의 모든 국가가 거인화의 비술을 포기하고 눈을 돌렸을 때 오직 단 한 사람.
에즈만토스 왕국의 페이튼만이 포기하지 않고 우트그라드를 다시 방문했다.
[반갑소! 나는 에즈만토스 왕국의 왕, 페이튼이라고 하오! 거인족의 무용담에 심취하여 나도 모르게 이곳에 당도하게 되었소!]
[에즈만토스 왕국? 이런 작고 하찮은인간아. 왕이니 황제니 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가 일찌감치 너희들에게 선포하였거늘 어찌하여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단 말이냐? 지난번에 전달한 비술 말고는 우리도 더이상 방법이 없다고 했을 텐데···. 시답잖은 불평을 늘어놓을 생각으로 온 것이라면 당장 머리통을 박살 내주겠다.]
[우선 내 말을 들어주시오, 친애하는 거인 공. 거인족의 비술 때문에 방문한 것이 아니오! 나는 단지 그대들의 업적을 찬양하러 온 것뿐이외다!]
[흥! 누가 그딴 입바른 소리에 좋아할 것 같으냐?]
[그대들의 전투와 영웅담은 나의 모국에서 아직도 회자되고 있소이다. 심지어 저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도 시인들이 그대들을 노래하고 있소. 그대들은 명예롭게 싸웠고 나는 그것에 대해 깊이 감사하는 바이오.]
거인은 페이튼의 아부가 싫지만은 않은 듯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 난쟁이가 아주 아부가 찰지구나? 짧게 본론만을 얘기하라. 기꺼이 네 놈의 말을 들어주는 영광을 주겠다.]
[나의 모국은 현재 크나큰 위험에 처해있소. 에즈만토스의 모든 것이 경각에 달했소. 군사력이 없다면 나의 왕국은 멸망하고 말겠지···. 나는 그저 우리 왕국을 지키고만 싶은 것이오! 소중한 것을 잃는 고통은 그대가 누구보다 잘 알지 않소? 부디 한 번만 나를 도와주길 진심으로 간청하오!]
소중한 것을 잃는 고통.
거인족은 잉그람 대륙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평생을 동족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고 그것은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을 굳은 신념이었다.
간사한 페이튼은 거인족의 신념을 이용해서 감정에 호소했다.
그가 한없이 애처로운 눈빛을 쏘아대자 그 거인은 아주 조금만 호의를 베풀기로 생각했다.
[지키고만 싶다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인간들을 위해 싸워주지 않는다. 네 놈이 원하는 것이 뭐냐, 난쟁이?]
거인의 호의적인 모습에 신이 난 페이튼은 신이 나서 열변을 토했다.
[단지 거인화의 비술에 관해서 연구하는 것을 도와주었으면 하오. 우리 제국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많소. 과학자와 연금술사, 약초학자 같은 것들 말이오.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거인화의 비술을 부작용 없이 만들어 보고 싶소. 우트그라드에는 분명 신비한 기운이 있소이다. 이곳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머무른다면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소.
난 확신할 수 있소이다. 에즈만토스 왕국이 해내지 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오. 당신이 우트그라드의 인간 출입을 금지한 것을 알고 있소만 내게 한 번만 기회를 주었으면 하오! 그대들이 실험을 도와준다면 이 은혜는 대대로 잊지 않고 갚겠소이다!]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는 거인.
그가 생각하기에, 거인화의 비술이라는 것이 누군가 연구한다고 가능할법한 내용도 아니라서 페이튼이 우트그라드에 위험이 될만한 요소는 없다고 판단했다.
[어려운부탁도 아니군. 단, 조건이 있다, 페이튼. 어떠한 경우에도 우트그라드에 해가 되는 상황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그대를 도와주는 이유는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다는 의지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고 맹세해라.]
[당연하지! 내 페이튼이라는 이름 석 자를 걸고 맹세하겠네! 고맙네, 정말 고마워! 그나저나 이렇게 흔쾌히 도와주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소. 어찌하여 이렇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오?]
[인간들은 참으로 궁금한 게 많단 말이야. 도와주는 이유? 뭐, 한마디로 하면 네 놈의 아부가 조금 맘에 들었다. 나와 내 동료들이 인간들의 전투에 참여한 것은 오로지 평화와 조화를 추구하기 위해서였어.
하지만 그놈들은 우리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그저 피 맛에 길든 전쟁광으로 보는 시선이 있더군. 나야 그런 햇병아리 같은 놈들의 얘기는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전사한 내 동료들이 죽어서도 명예롭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한 치욕이 어디 있단 말인가?자네가 그 오해를 풀어주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이 생겼다, 뭐 그뿐이네.]
진지하게 자신의 철학을 알려주는 거인.
거인족에겐 죽어간 동료들의 명예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우트그라드의 전쟁군주! 그대의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소! 에즈만토스 왕국의 은인이 될 당신의 이름을 나에게 알려주겠소?]
거인은페이튼이 교활하게 미소 짓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먼 곳을 응시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나는 우트그라드의 전쟁군주. 하늘을 찢는 엘로함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