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14화
“그렇지 않으면 일족 전체가 좀비로 전염될 거야.”
소설 속의 우트그라드는 거인족 전체가 좀비로 변했다.
칸 제국을 침공했던 겔미르 또한 마찬가지.
“좀비? 처음 들어보는 단어로군, 너희 인간들은 이런 상태를 좀비라고 부르나 보지?”
“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죽여야 한다고? 그것 말고는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
“유감스럽지만···. 그게 최선이다.”
침묵하는 리올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지 가만히 서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거인이 좀비가 되어 멸망해버린 우트그라드.
그들이 멸망한 이유는 좀비라는 정보에 대한 무지함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동족을 절대 버리지 않는 거인족 특유의 굳은 결속 때문이었다.
수년간 종족 그 자체를 지탱해 온 그 결속력이 아이러니하게도 종족의 파멸을 촉진시키는 비극을 낳은 것이다.
아무리 좀비로 변했어도 언젠가는 원래 상태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은 그들은 결국 동료였던 좀비의 손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지금 리올라가 망설이는 이유도 분명 동족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리올라, 일단 이것을 먹어라.”
나는 그녀에게 치료 약이 담긴 물병을 건넸다. 팔다리에서 자주색의 멍이 군데군데 생긴 것을 보면 그녀 또한 좀비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치료 약인가? 고맙군.”
“한 방울만 먹어도 되니까 조금만 먹어라.”
리올라는 물병을 건네받고 터프하게 뚜껑을 열었다.
쿠콰콰캉
그때였다.
갑자기 굴속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벼락같은 소리.
귀를 찢는 듯한 굉음에 물병을 마시려던 리올라의 손이 멈췄다.
“또 시작이군.”
“안에서 누가 난동을 피우는 거지?”
“보여주지. 따라와라.”
엄청난 굉음에도 익숙한 일인 듯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는 리올라. 그녀의 뒤를 따라 가장 구석자리에 위치한 어느 병실로 입장했다.
여기는 다른 방에 비해 훨씬 널찍한 공간이었다.
특히 천장이 뻥 뚫린 것처럼 높이 솟은 천장.
나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리올라! 리올라!!”
엄청난 거구의 몸집을 자랑하는 한 거인이 등장했다.
거인족의 덩치가 크다는 것은 이미 눈으로 봤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지만, 이 거인은 다른 거인들보다 절반 이상은 커 보였다.
“크르르륵! 크아악! 리올라!”
이미 흉측하게 좀비화가 끝나버린 거인.
새빨개진 눈은 한눈에 보기에도 이미 가망이 없어 보였다. 고름이 터져버린 턱의 살점은당장이라도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수리부터 오른쪽 눈까지 이어지는 끔찍한 흉터는 이 거인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너덜너덜하게 뼈가 훤히 드러난 왼팔은 결박되어있는 쇠사슬 덕에 겨우 붙어있었다.
“리올라! 리올라! 칵! 칵! 이 엘로함은 건재하다!”
좀비화가 끝나면 보통 으르렁거리기만 할 뿐 대화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 거인은 또렷한 말투로 부르는 리올라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우리 부족의 영웅, 엘로함은 우트그라드에서 첫 번째로 좀비화가 진행됐다.”
“엘로함이라고?”
“그래. 그리고 보다시피 이렇게 좀비가 되어버렸지.”
“리올라! 가까이 와라! 크르륵!”
소설 속의 엘로함은 짧지만 임팩트있는 인물로 묘사됐다.
과거 낮벼락 부족의 부흥을 이끈 영웅.
그리고 좀비가 되어 칸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든 재앙.
그가 휘두르는 도끼의 파괴력은 한낱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버거웠다.
“리올라! 가까이 좀 와다오! 크라라라!”
“카이드로젠, 내가 아직 마음의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 이유다. 정말 좀비화가 끝나면 원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는 건가? 지금 저 모습을 봐라. 중간중간 의식이 돌아오는 것 같지 않나?”
엘로함은 섬뜩한 음성으로 리올라의 이름을 불러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그의 의지가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좀비가 기생하기 위해 삼은 숙주일뿐.
육신은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당신이 알고 있는 엘로함은 이미 죽었다.”
리올라는 엘로함을 흉내 내는 좀비의 음성 때문에 몹시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흔들리지 마라. 저건 너의 살점을 뜯어 먹고 싶은 좀비의 외침이야. 생전에 강했던 거인일수록 위험한 존재니 반드시 죽여야 해.”
“하아···.”
그녀도 아마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좀비로 변한 동족은 이미 그가 알던 동료들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자랑하는 치유 주술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동료들을, 이미 수십 차례나 경험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건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짓누르며 가까스로 입을 여는 리올라.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지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그녀는 무기가 보관된 벽장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손도끼를 움켜쥐었다.
좀비가 된 엘로함은 위험을 감지했는지 더욱더 소름 끼치는 쇳소리를 내며 흥분했다.
“크르르륵! 리올라! 리올라! 크르르륵! 카악! 카악!”
리올라는 엘로함을 앞에 두고 말했다.
“여긴 내가 알아서 처리하고 나갈 테니 자네는 자리를 피해줬으면 좋겠네.”
“일단 이 치료 약부터 먹어라.”
리올라는 치료 약을 한 모금 먹은 뒤 내게 건넸다.
“정 힘들다면 내가 처리해 줄 수도 있다.”
“건방진 소리. 이건 부족장인 내가 직접 끝내야 할 일이다.”
흔들리는 동공을 최대한 제어하는 리올라.
하지만 분명 동족을 제손으로 죽여야 하는 상황이 몹시 괴로울 것이다.
더구나 인간인 내가 보는 앞이면 더더욱···.
그녀의 부탁에 나는 굴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크르르륵! 리올라! 리올라! 죽인다! 카악! 카아아악!”
목을 긁어내며 악을 쓰는 엘로함.
좀비가 된 엘로함은 살기를 감지했는지 더욱 큰 목소리로 고성을 질러댔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병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리올라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혹시 동족이라고 끝내 숨통을 못 끊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칵! 칵! 크르르르르륵!”
우트그라드의 거인이 모두 좀비로 변해 멸망해버린 비극적인 사건.
그들은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도끼와 창을 손에 쥐고, 좀비가 된 동료들을 상대로 휘두르기 시작했으나 그 무기에는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다.
동족을 지키고 싶은 강한 결속, 유대감.
그 굳은 신념이 우트그라드를 멸망하게 만든 것이다.
‘음···.’
아무래도 리올라를 두고 나가는 판단은 썩 내키지 않았다.
“카라락! 칵! 칵! 리올라!”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괴성.
심상치 않은 소리에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리올라가 당해버린다면 내 계획에 크게 차질이 생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나는 슬그머니 벽에 붙어 방 안쪽을 엿보기로 했다.
“리올라! 리올라! 카라라락!”
여전히 섬뜩한 목소리로 리올라의 이름을 외치는 엘로함.
굴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던 엘로함은 손도끼를 들고 있는 리올라를 보더니 한층 더 강하게 폭주하기 시작했다.
쿠쿠쿠쿵, 챙그랑!
그는 피를 토해내며 자주색 반점들을 시뻘건 피로 물들였다.
그리고 온몸을 칭칭 감고 있던 쇠사슬을 마치 지푸라기처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엘로함, 진정 나를 죽일 생각입니까! 낮벼락 부족의 전쟁영웅이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까?”
엘로함을 향해 미련을 버리지 못한 리올라.
불길한 내 예상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리올라는 엘로함의 숨통을 끊어버릴 수 없다. 좀비가 된 동족 앞에서 마음이 약해 져버린 그녀는 엘로함을 죽일 수 없었다.
이미 피아식별이 불가능한 엘로함.
그는 마치 지금이 전성기인 것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할 기세로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뜯겨나간 쇠사슬은 어느새 너클처럼 엘로함의 주먹에 칭칭 감겨있었다.
‘이미 자아는 없을 텐데 설마 전투에 대한 본능인가? 낮벼락 부족의 전쟁영웅이라는 칭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니군.’
더이상 리올라를 지켜만 볼 수 없는 상황.
나는 그녀를 힘껏 밀어내며 엘로함과의 거리를 벌렸다.
“악!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이미 늦었다, 리올라. 여긴 나에게 맡겨라.”
“잠깐! 너는 그저 외부인이다! 내가 하겠다!”
본인이 해결하겠다고 외치는 리올라.
하지만 그녀의 눈에서는 어떠한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인족의 신념에 따라 차라리 동료의 손에 죽기를 선택할 가능성이 지극히 컸다.
리올라를 뒤에 두고 두 다리에 힘을 실어 엘로함을 향해 뛰어들었다. 반동을 이용하여 그 힘을 다리에서 허리로 그리고 어깨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으로 단숨에 엘로함의 목을 겨냥하고 휘둘렀다.
촤아악
“용서해라. 과거에 운명이 정해진 자. 엘로함이여.”
“크라라락!”
엘로함이었던 흉포한 좀비는 거칠게 달려들었다.
쇠사슬을 감은 주먹을 이리저리 내질러보았지만, 모두 허공이었고 그에 반해 황제의 검술은 치명적이었다.
좀비의 왼쪽 귀부터 턱, 그리고 목까지.
그렇게 좀비의 사지는 몸통으로부터 깨끗하고 완벽하게 베어졌다.
투두둑 쿠쿵.
낮벼락 부족의 영웅.
그의 육체는 힘없이 절단됐다.
마지막으로 엘로함의 머리가 힘없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며 움직임이 멈췄다.
이미 몸의 상처가 극심한 상태였던 엘로함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카이드로젠의 손에 절명했다.
‘따지고 보면 엘로함이 아니라 그저 좀비일 뿐이지만···.’
엘로함을 흉내 내는 좀비.
놈은 도륙이 난 후에야 비로소 조용하게 숨이 멈추었다.
‘리올라를 두고 밖으로 나갔다면 대참사가 벌어질 뻔했어.’
그녀를 지켰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칼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역시 거인족의 강한 결속은 하루아침에 바뀔 만큼 느슨하지 않았다.
‘으응?’
안도하던 순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위협에 오한이 느껴졌다.
갑자기 목에 차갑게 느껴지는 기운.
리올라는 들고 있던 손도끼를 내 목에 갖다 대고 엄청난 분노와 살기를 드러냈다.
“큭.”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침을 꼴깍 삼켰다. 목젖이 침을 넘기며 리올라의 도끼날을 살짝 때렸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저···. 저기 리올라.”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카이드로젠에게 이 정도로 노골적인 살기를 드러내는 자가 있었나?
이건 카이드로젠의 몸속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일 정도로 몹시 위협적이었다.
“이곳을 떠나라. 이방인···. 지금 당장···.”
“리올라, 그는 이미 늦···.”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