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13화
“크흑···. 인간 따위에게 이런 수모를···.”
“그 입 닥쳐라, 이 약해빠진 부족아!”
인내심이 바닥난 나는 낮벼락 부족을 본격적으로 꾸짖었다.
“네 녀석들이 그렇게 고집을 부리기에 일족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 아니냐? 낮벼락 부족은 우리만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참나, 그런 허울뿐인 말들로 인해 부족이 몰살당해도 상관없다는 건가?”
문장 하나하나 낮벼락 부족의 치부를 후벼 파는 팩트 폭행에 그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저기 린돌프라는 거인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죽이고도 남았지. 어딜 감히 나의 호의에 이딴 식으로 대응한단 말인가! 칸 제국의 황제인 나와 네 놈들의 격의 차이가 아직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냐? 일부러 자네들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않으려 신경 쓰는 것도 지쳤다! 우트그라드를 구원해줄 마음도 싹 사라질 판이다! 지금부터 덤벼드는 놈들은 기필코 도륙을 내줄 터이니 어디 원한다면 그렇게 해보아라!”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들을 뒤로하고 쓰러져있는 린돌프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뭔가 변화는 있나? 몸속에서 타는 듯한 열기는 어찌 됐나?”
“조···. 조금 괜찮아진 것 같기도···.”
“...같기도? 분위기 파악 안 되나?”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카이드로젠의 얼굴.
린돌프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대답을 정정했다.
“화···. 확실히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 칸 제국에는 뛰어난 의사가 한 명 있거든.”
나는 히죽 웃으며 안심했다.
대마법사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에린이 의술에도 뛰어나다는 것은 엄청난 호재였다.
다행히 그녀가 만든 치료 약이 린돌프에게 먹혀드는 모양이었다.
아직 린돌프의 몸에는 고름이 덕지덕지 남아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차분하게 안정된 것이 느껴졌다.
“린돌프! 어찌하여 인간에게 존대한단 말인가!”
“그···. 그치만 정말 효과가 있습니다! 몸에서 펄펄 끓던 열기가 가라앉았단 말입니다!”
“칸 제국의 황제가 인내심이 없다는 소문을 못 들었냐? 더이상 길게 말하고 싶지 않으니 잘 들어라! 이 약해 빠진 것들아.”
숨을 죽인 채 내 말에 집중하는 낮벼락 부족.
인제야 대화를 하려는 마음이 생긴 것인지···. 놈들은 나의 도발적인 발언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키는 그들에게 나는 마지막으로 최후통첩을 날렸다.
“리올라를 내 앞으로 데려와라. 나는 카이드로젠이다.”
**
낮벼락 부족원은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려대며 한참을 고민했다.
과연 그를 부족장님과 만나게 해도 괜찮은 걸까?
다들 눈치만 보던 그때···.
“죄송하지만 그분은 환자들을 돌보느라 바쁘십니다. 제가 동굴 안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린돌프가 벌떡 일어서며 동굴 안내를 하겠다고 외쳤다.
우려하는 거인들의 눈빛들이 많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이드를 자청했다.
“이쪽입니다. 카이드로젠님.”
“그래. 얼른가지.”
앞장서는 그의 뒤를 따라 걷는 터널같이 깊숙한 동굴.
에린의 치료 약이 린돌프의 상처를 말끔히 치유한 듯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크아아악! 너무 아파! 머리가 너무 아파!”
“더이상은 못 참겠소! 나를 죽여주시오! 리올라 부족장!”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거인들의 비명소리가 동굴안에서 울려퍼졌다.
“제발! 차라리 죽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생체실험의 부작용을 겪고 있는 거인들은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며 애원했다.
린돌프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내게 물었다.
“정말 저희를 구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련한 눈동자로 애원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린돌프.
그는 카이드로젠에게 사납게 달려들던 때와는 다르게 지극히 온순한 말투였다.
‘저 모습이 원래 린돌프의 모습이겠지.’
페이튼이 망치고 간 생체실험은 우트그라드의 거인족을 뿌리째 분열시켰다.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완전히 자아를 잃어버리게 되는 부작용은 거인족 스스로 동족을 죽여야 할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좀비처럼 변해버린 그들을 잠재울 방법은 숨통을 끊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임을 당한다!]
[죽여라, 그게 너와 피를 나눈 동료들일지라도 예외는 없다.]
[살아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 살기 위해서 죽여라!]
소설 속의 거인들이 눈물을 삼키며 뱉었던 대사들이 생각났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린돌프가 만약 치료 약을 먹지 않았다면 잉대연의 시나리오대로 동족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대답했다.
“당연히 구해줄 수 있지. 칸 제국의 황제에게 불가능이란 없어.”
**
잠시 후 널찍한 홀이 등장했다.
홀의 양쪽으로는 고통으로 울부짖는 거인들이 움직일 수 없도록 쇠사슬에 포박되어 있었다.
그런 동료의 모습에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좌절하는 거인들.
이미 적지 않은 숫자의 거인들이 자주색의 몸으로 변해버렸다.
“저분이 저희 낮벼락 부족의 부족장. 리올라 님이십니다.”
정신없이 환자들의 사이를 뛰어다니는 거인.
리올라의 모습은 부족장으로 보이기보다는 일반 부족원으로 보일 정도로 상태가 엉망이었다.
기다란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상처가 드러났으며 신발은 신지 않고 맨발로 뛰어다녔다.
소설 속 묘사 그대로 매우 검소하고 인간적인 모습.
“부족장님! 여기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린돌프의 부름에 리올라는 고개를 들었다.
인간이 찾아왔다는 보고를 미리 들어서인지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리올라의 걸음걸이는 잠깐이었지만 어딘가 기품이 느껴졌다.
“린돌프, 넌 괜찮냐? 몸 색깔이 돌아온 것 같은데?”
“전 괜찮습니다, 리올라 부족장님! 이 분이 주신 약을 먹었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희망에 신이 난 린돌프.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듣자 하니 칸 제국의 황제시라고?”
“그렇다. 다른 말로는 우트그라드의 구원자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우리를 도와주는 이유가 뭐냐?”
“나는 우트그라드가 멸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뭐냐고.”
이유?
이유야 당연히 네 놈들이 칸 제국을 멸망시키는 놈들이니까 미리 막으려고 온 거지.
좀비가 돼서 쳐들어오면 그야말로 난감하지 않겠냐.
‘그리고 에즈만토스 왕국과 전쟁할 때 써먹고 싶기도 하고.’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리올라의 물음에 답했다.
“페이튼을 죽이려면 자네들의도움이 필요하다.”
“페이튼을 알고 있나?”
“알다마다. 그는 나의 아버지를 죽였다.”
“하! 이런 공감대가 있다니. 나도 아버지를 잃은몸이다.”
“유감이군.”
그녀의 말대로 리올라와 카이드로젠은 교집합처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리더가 되었고 아버지를 일찍 잃은 것.
그리고 소설 초반부에 죽음으로써 이야기가 끝나는 것까지.
그녀의 목소리는 비록 틱틱거리는 무미건조한 말투였지만 뭔가 강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내가 그대들을 돕겠다.”
“당신이 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그래.”
“무슨 수로?”
사실 어떤 원리로 병이 낫는지는 모른다.
다만 에린 킨드라가 페이튼보다 더 높은 클래스의 마법사라는 것만 알고 있을뿐···.
“네 옆의 린돌프를 봐라.”
린돌프는 리올라에게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는 장담한다 이건가···.”
“그렇다.”
“고맙긴 한데, 이건 나만 설득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우트그라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나 말고도 다른 부족의 의견이 중요···.”
“서리도끼 부족의 겔미르. 혹시 그가 벌써 전쟁군주가 되었나?”
리올라는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겔미르까지 알고 있다니. 칸 제국의 황제는 아는 게 많군.”
“뭐, 이 정도는 기본이지.”
“아직 이미르 의식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가 전쟁군주가 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는 우트그라드에서 가장 강한 부족장이야.”
리올라는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르 의식.
그것은 간단하게 얘기하면 맞다이 의식이다. 이들은 맞다이를통해 누가 가장 강한 부족장인지 가려낸다.
낮벼락 부족의 리올라.
서리도끼 부족의 겔미르.
그리고 고동치는 대지 부족의베누.
상기 3개의 부족은 이미르 의식을 통해 우트그라드의 통치자를 선출하게 된다.
현재 우트그라드에서 가장 강한 거인은 서리도끼 부족의 겔미르.
오직 강함만을 추구하는 서리도끼 부족의 수장인 그에게 대항할 수 있는 다른 부족은 없었다.
소설 속 겔미르는 이미르 의식을 통해 어렵지 않게 우르그라드의 전쟁군주가 되었고 곧이어 칸 제국을 멸망시키는 주역이 됐다.
“겔미르는 너희 인간들에게 가장 깊은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 몇십 년간 열리지 않았던 이미르 의식을 부활한 것은 그가 강력히 원했기 때문이다.”
“전쟁군주가 돼서인간을 심판하려고?”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다행인 것은 아직 이미르 의식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
내게 어느 정도 시간은 있었다.
“그럼 일단 그를 설득해보는 것이 어떤가? 내가 거인들을 치료해줄 수 있다고 말이지.”
“아니. 겔미르는 그 어떤 인간도 믿지 않아.”
“음···.”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어. 그의 태도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겔미르가 우리 인간에게 증오심을 느끼는 이유는 페이튼 때문이라고 보면 되나?”
“그건 아니다. 거인족에게 수모를 준 인간이 어디 페이튼뿐만인 줄 아느냐? 역사적으로 너희 인간들은 일관성 있게 거인족을 무시해왔다. 우리와 조화롭게 지내려는 노력은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그저 무섭다는 이유로 무시하며 밀어내지 않았는가?”
“그건 그렇지.”
“자네가 우릴 돕는 건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역사를 손바닥으로 덮을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녀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감했다.
페이튼은 그저 도화선에 불을 붙였을 뿐 폭약은 칸 제국을 포함한 다른 인간들이 지속적으로 쌓아오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앞으론 달라질 것이야. 칸 제국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당장 유의미한 결과를 보여줄테니 일단 여기 있는 환자의 상태부터 확인해 보자고.”
리올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두컴컴한 복도를 들어갔다.
잠시 후 등장한 병실로 급조한 듯한 방.
상황은 생각보다 처참했다.
너저분한 헝겊의 가림막을 걷어내자 역한 썩은 내가 코를 찔렀다.
“아까 홀에도 환자들이 많던데 그게 다가 아니었나?”
“그자들은 변해버린 지 얼마 안 됐다. 여기로 옮길 새도 없이 순식간이었지.”
담담하게 얘기하는 리올라.
그녀가 침착하면 할수록 부족원을 잃은 슬픔이 사무치는 듯했다.
병실로 들어서자 사나운 눈빛으로 째려보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거인들.
이미 새빨개진 눈빛으로 변한 그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작은 조의를 표했다.
“크르르르! 키약! 칵! 칵!”
“킥! 킥! 그르릉!”
목을 긁으며 불쾌한 쇳소리를 내는 거인들. 이들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단연코 좀비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나 영화로 자주 접해 본 좀비는 나에게 친숙하다면 친숙한 존재.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지극히 폭력적임.]
[생명체를 사냥하며 좀비 바이러스를 전염시킴.]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야 죽일 수 있음.]
잉대연에 나오는 좀비 또한 마찬가지다. 안타깝지만 좀비화가 끝난 거인은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 없었다.
소위 말하는 골든 타임을 놓쳐버린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여기 있는 거인들은 살릴 수 없다. 이미 좀비로 변해버렸어. 지금 시점에서는 저들이 약을 삼키지도 않을뿐더러 가까스로 먹이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약의 효과는 없을 것이다.”
한마디 한마디 입을 열 때마다 리올라가 듣고 싶지 않은 단어만을 얘기해야 하는 상황.
사형선고를 내리는 의사의 마음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좋지?”
“여과 없이 말해도 되나?”
“물론···.”
정답은 하나였고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모두···. 죽여버리는 게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