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12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거인.
고요하던 골짜기엔쩌렁쩌렁한 고성이 울려 퍼졌다. 커다란 덩치에서 나오는 울림은 마치 앰프 스피커를 튼 것처럼 시끄럽게 울렸다.
“무슨 일인가?”
“어? 어?”
잠시 후 동굴 안에 있던 낮벼락 부족이 하나둘 밖으로 나와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린돌프! 자네 거기서 뭐 하냐?”
“침입자다! 옆에저건 인간이야!”
“아니 뭐야? 인간이 왜 여길!”
나를 발견하곤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갖추는 낮벼락 부족.
젠장, 일이 커지면 안 되는데···.
일단 쓰러져 있는 린돌프라는 거인에게 다가가 강제로 입을 벌렸다.
“이걸 삼켜라. 순순히 내 명령에 따라야 살 수 있다.”
“크하학! 이 개자식, 뭐 하려는···.”
한 손으로 턱을 붙잡고 입을 닫지 못하게 움켜쥐었다.
아귀힘은 거인족에게도 밀리지 않는 수준의 카이드로젠.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물병을 빠르게 꺼내 린돌프라는 거인의 목구멍으로 흘려 넣었다.
그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 채 아등바등 몸부림을 치며 식도를 타고 들어가는 정체불명의 액체를 삼켰다.
“가만히 누워서 몸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집중해라. 어차피 아킬레스건이 끊어져 움직이지 못할 테지만.”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린돌프.
아직 흰자가 빨개진 상태는 아니니까 분명 약효가 있을 것이다.
“저 자식이 뭔가를 먹였다! 한 놈은 동굴로 들어가서 리올라 님께 상황을 보고해라!”
“인간은 절대 살려 보내지 않는다. 우트그라드에 어딜 감히 인간이 들어오는가!”
“너는 내가 반드시 죽인다. 이 벌레 같은 인간 자식아.”
린돌프에게 뭔가를 강제로 먹이는 내 행동은 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위협을 가하는 낮벼락 부족.
‘아이고야···.’
부족 전체와 적대적으로 맞선다면 내 계획이 틀어질 것이분명했다.
일단 대화를 시도하자.
말이 통한다면 이 상황이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이다.
“린돌프는 곧 괜찮아질 거다. 리올라의 상태는 어떤가?”
“그의 사지를 처참하게 꺾어놓고는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이냐? 우리를 능멸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 미친놈아!”
“린돌프가 받은 고통의 곱절로 갚아주도록 하마.”
아무래도 그의팔을 90도로 꺾어놓은 것이 문제였나······.
시각적으로 두드러지게 보이는 린돌프의 팔은 부족 원들의 전의를 불타오르게 했다.
“전투를 준비하라!”
동료애가 강한 거인족들이 이런 상황을 곱게 넘길 리 없었다.
‘젠장.'
점차 악화하여가는 상황.
카이드로젠과 낮벼락 부족원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조금씩 다가왔다.
“네 놈들은 은인을 몰라보는 천하의 몹쓸 족속들이구나. 칸 제국의 황제가 친히 너희들을 살펴주러 왔는데 이게 무슨 경우 없는 행동이냐?”
카이드로젠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그 말을 들은 낮벼락 부족은 기다렸다는 듯이 격분하며 내게 돌진.
동료가 당한 수모를 갚아주려 전력으로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칸 제국이고 뭐고 뭐 어쩌라는 것이냐? 우리가 언제 네 놈보고 살펴달라고 부탁이라도 했느냐?”
머리를 향해 살벌하게 휘두르는 돌망치.
나는 몸을 비틀며 가볍게 공격을 흘려보냈다.
동시에 뒤쪽에서 스피어를 날리며 급습하는 거인 하나.
카이드로젠의 허리를 움켜쥐었지만, 가공할 악력으로 거인의 손아귀를 풀어냈다.
“무···. 무슨 힘이!”
백스텝을 밟으며 돌망치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멀리서 투포환을 던지는 거인을 발견.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큼지막한 돌덩이를 손으로 가볍게 캐치했다.
그리고 살짝 힘을 주어 돌덩이를 으스러뜨렸다.
바스락거리며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돌덩이.
“하압!”
왼쪽 측면에서 예리하게 파고드는 창 질.
유연한 움직임으로 창끝을 허공으로 흘려보냈다. 허공에서 갈 길을 잃은 창을 두 손으로 잡아 반으로 부러뜨렸다.
“으아악! 뭐냐 네 놈은!”
“힘 좀 꽤나 쓰는 놈이다, 방심하지 마라!”
인간인 카이드로젠의 무력에 낮벼락 부족은 매우 놀랐다.
일개 일간이 거인족인 자신들을 힘으로 압도하다니···.
놈들에게 이런 광경은 아마 살면서 처음 보는 광경일 것이다.
‘낮벼락 부족은 우트그라드에서 가장 전투력이 떨어지는 부족이지. 덕분에 어느 정도 시간 끌기는 어렵지 않겠어.’
우트그라드는 3개의 거인 부족으로 구성되어있었다.
그중에서 낮벼락 부족은 치유를 제1 덕목으로 삼는 가장 평화적인 색깔을 가진 부족.
실제로 몸을 맞대보니 확실히 카이드로젠의 무력에는 한참 못 미치는 모습이었다.
“칸 제국은 너희들을 치료할 수 있다. 그러니 그만 발악하고 내 명령에 따라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들을 향해 소리쳤지만, 그들은 여전히 분노로 씩씩거렸다.
“바보 취급하는 것도 적당히 해라. 인간! 우리가 또 배신자 족속에게 속을 것 같으냐?”
“건방지기 짝이 없군. 기필코 죽여버리겠다!”
쓰러져있는 린돌프를 곁눈질로 바라보았지만, 아직 약효가 보이지 않았다.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선 부작용을 치료할 수 있다는 근거를 보여줘야 해.’
쿠구궁
계곡 위에선 발석거로 연상되는 공성 병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집채만 한 바위를 가죽 주머니에 넣어서 발포할 준비를 하는 거인족.
동시에 도끼와 돌망치를 든 보병이 나를 중심으로 각을 넓히며 에워쌌다.
‘오호.’
전투 부족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의 전술은 구사할 줄 안다는 건가.
“흐이야아압!”
놈들은 다시 전형을 갖추고 달려들었다.
나는 사각을 주지 않기 위해 지속적으로 사이드 스탭을 밟으며 횡으로 이동했다.
날아드는 투포환을 회피하는 건 덤.
쿠앙!
“이번엔 반드시 잡는다!”
“쏴라!”
계곡 위에 배치된 공성기가 일제히 무언가를 발사했다.
메테오처럼 쏟아지는 돌덩이는 순간 태양을 가리며 그늘을 만들어냈다.
개수는 어림잡아 10개.
10개의 돌덩이가 한 번에 쏟아진다면 내게 피할 공간은 없었다.
‘그럼 피할 공간을 만들어야지.’
피하지 못한다면 카이드로젠답게 파괴한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끝낸 뒤, 나를 향해 정확히 날아오는 바위로 주먹을 날렸다.
콰가가가강!
“크하하! 저 멍청한 자식! 드디어 잡았구나!”
“우트그라드의 광물에 대해서 모르는 모양이다! 하하하!”
‘어라.’
나는 주먹을 날린 자세 그대로 땅속에 박혀버렸다.
“벨라늄을 맨손으로 부수려 하다니 아주 오만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구나!”
“멍청한 자식!”
거인들이떠드는 소리를 듣고 소설 속의 내용을 떠올렸다.
잉대연의 세계관에서 가장 무거운 소재인 벨라늄.
우트그라드의 대장장이들이 그들만의 비법으로 연마하여 만든 벨라늄은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중량과 더불어 높은 수치의 경도와 강도를 자랑했다.
거인족만 전용으로 사용하는 이 물질은 효율성이 떨어져 소설 속에서 크게 등장하지 않았다.
‘이러니 내가 기억이 안 나지.’
카이드로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벨라늄을 맨손으로 격파하기에는 역부족.
이 빌어먹을 돌덩이는 제쳐두고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흣차.”
두더지처럼 땅을 파서 벨라늄 덩어리의 자중에서 벗어났다.
옆으로 땅을 판 뒤 다시 지상으로···.
잠시 후 흙먼지를 날리며 거인들 앞에 날렵한 움직임으로 재등장했다.
“후아.”
폐 속 깊숙이 느껴지는 신선한공기.
새삼스레 공기의 소중함을 느끼며 옷에 묻은 흙을 탈탈 털어냈다.
“뭐야? 저놈은 대체!”
“저···. 저게 진정 인간이란 말인가?”
승리를 예감했던 거인들은 멀쩡히 살아 돌아온 나를 보고 경악했다.
“옷이 더러워졌잖아. 자식들아.”
“아···. 아니···.”
놈들은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저놈이 진정 인간이란 말인가?
‘사실 그건 나도 궁금한 부분이긴 해.’
그저 칸 제국의 황제는 검성의 자질을 갖춘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설정만이 떠오를 뿐.
무엇이 카이드로젠을 이렇게 괴물로 만들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의 무력은 말 그대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
‘역시 대단하구나.’
문득 소설 속의 카이드로젠이 멘탈을 잘 부여잡고 주인공과 함께했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궁금해졌다.
상대적으로 주인공인 벤하트의 활약상이 줄어드니 전개가 밋밋했으려나?
아무튼···.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거인족을 향해 다시 한번 대화를 요청했다.
나는 더이상의 불필요한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봐! 나는 너희를 속이려는 것이아니다! 대화를 나누자. 거인족!”
“전열을 가다듬어라!”
“아! 아니 잠시만!”
“놈은 혼자일 뿐이다!”
우렁찬 목소리로 다시 전투준비를 하는 낮벼락 부족.
일관성 있게 대화를 거부하는 그들을 향해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올랐다.
이건 분명 카이드로젠의 의지뿐만이 아니라 나의 의지도 합쳐진 감정이었다.
“이런 멍청한 거인족들! 커다란 머릿속에 달고 다니는 뇌는 장식용이더냐? 칸 제국의 황제가 너희를 살펴준다고 하면 무릎을 꿇고 떠받들어도 모자랄 판에! 감히 창을 겨누고 돌덩이를 떨어뜨려? 지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미개한 족속들이구나!”
촤악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고 거인족에게 돌진했다.
양쪽에서 날아오는 창끝을 뒤쪽으로 텀블링을 하며 회피.
그와 동시에 춤을 추듯 움직이는 검은 거인이 쥐고 있던 창 자루를 모조리 두 동강 내버렸다.
이어서 머리로 날아오는 돌망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간결한 움직임으로 황제의 검을 휘둘렀다.
파사삭
돌망치가 매끈한 단면을 드러내며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계곡 위에선 발석거가 다시 벨라늄을 포격 할 모양새.
벙찐 표정으로 서 있는 거인을 도움닫기 삼아, 단숨에 발석거가 있는 정상으로 뛰어올랐다.
촤아악
지렛대와 밧줄을 모조리 끊어버리고 발석거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벨라늄을 옮기던 거인들은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하는 모습.
그들을 무시하고 다시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육탄전으로 달려오는 거인의 안면을 칼등으로 강하게 후려쳤다.
“크아악!”
이어지는 콤보는 360도, 540도, 720도 뒤돌려차기.
카이드로젠의 현란한 움직임에 거인들은 우수수 나가떨어졌다.
마치 검무를 추는 듯한 매사에 절도있는 동작은 내가 봐도 경외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거인 한 명의 가슴팍을 무심하게 걷어차며 마무리했다.
“커허헉! 이···. 이건 도대체···.”
그들은 카이드로젠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 전의를 상실한 듯 움직임이 둔해졌다.
멀찌감치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 이거 서리도끼 부족에게 도와달라고 해야하는 거 아니오?”
“그런 치욕이 어디 있소이까! 우리는 우리만의 힘으로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소!”
떨리는 목소리로 전투 부족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낮벼락 부족.
확실히 낮벼락 부족은 카이드로젠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돌망치나 창, 벨라늄을 이용한 공성병기는 카이드로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허공만을 갈랐다.
게다가 순수한 근력에서도 월등한 격차가 존재했다.
“이 정도 했으면 어느 정도 깨닫는 바가 있지 않나?”
“크윽!”
“대체 왜 대화를 거부하는 건가?”
나는 웅성거리는 그들을 향해 다시 한번 대화를 시도했다.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