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11화
어마어마한 괴력을 가진 거인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괴력을 가진 그들은 의외로 소설 속의 시나리오에 미친 영향력은 미미했다.
그 이유는 칸 제국을 멸망시키는 데 일조함과 동시에 거인족들도 모두 멸종되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초반부에 이야기가 끝나버린 그들은 더이상 잉대연의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았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육체를 가지고 있었지만, 일족의 멸망을 막을 수 없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평화를 추구하고 인간을 돕고 싶어하는 마음.
그 마음을 악용한 인간이 있었을 뿐이다.
‘범인은 바로 에즈만토스 왕국의 페이튼.’
페이튼이 주도한 거인화 생체실험.
그는 거인의 피를 이용해 인간을 거인으로 만든다는실로 말도 안 되는 실험을 시도했다.
목적은 칸 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는 군대를 만들기 위함.
마법사들이 주를 이루는 에즈만토스 왕국은 군대의 힘이 비교적 약했다.
상대방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해야 하는 전쟁에서 체력이 허약한 마법사들만 가지고는 칸 제국을 정벌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이튼이 생각한 교활한 묘안은···. 거인족의 피를 이용해 자신의 군대를 키우려는 속셈이었다.
[이 약을 거인족에게 몰래 쑤셔 넣은 다음에 경과를 지켜보자. 놈들의 피가 우리와 섞였을 때 무슨 반응이 나오는지 몹시 궁금하단 말이야.]
그는 영양제라고 속인 실험 약을 거인족에게 투약했다.
본인도 모르게 실험 약이 주입된 거인족들은 엄청난 발작 증세를 보이며 고통 속에 몸부림쳤다.
발작을 일으킨 환자들은 며칠 이내에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려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고 주위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다.
페이튼의 실험은 그야말로 대실패였다.
[갑자기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냐? 어찌하여 다들 정신을 못 차리고 미쳐가고 있단 말이냐!]
[통치자시여. 아무래도 페이튼이 주입한 영양제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를 데려와서 심문해보겠습니다.]
[설마 페이튼 때문이겠느냐?우리가 그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는데!]
자신을 의심하는 낌새를 눈치챈 페이튼은 부작용을 일으킨 거인들을 남겨두고 잽싸게 본국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인간을 돕고 싶은 마음에 페이튼을 진심으로 믿고 소통했던 거인족.
그들은 그가 배신하고 도망갔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페이튼은 우리를 이용한 겁니다! 이 찢어 죽일 자식!]
[일단 환자부터 챙겨라! 동료를 챙기는 것이 우선이다!]
[페이튼···. 내 기필코 그놈의 머리통을 도끼로 갈라놓을 것이다.]
나중에야 사건의 전말을 파악한 그들은 인간에 대한 극한의 혐오감정이 마음속에 뿌리내렸다.
그리고 이 인간 혐오증은 훗날 칸 제국을 침공하는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페이튼, 이 괘씸한 자식 때문에 나한테 불똥이 튀게 할 수는 없지.’
소설 속 내용을 상기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런데 시작부터 닥친 첫 번째 난관···.
진실을 밝히기 위해선 일단 아무 거인족이라도 만나야 하는데 첩첩산중의 산속에서 그들이 어디 있는지 찾기란 쉽지 않았다.
거인이니까 눈에 잘 띌 줄 알았는데···. 이건 크나큰 오산이었다.
우트그라드에 도착한 지 벌써 수 시간이 지났지만, 거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무가 너무 커서 시야 확보가 너무 어려워. 거인족들이 사는 곳이라 그런지 죄다 큼직큼직해서 뭐하나 보이는 게 없네.’
마음속으로 커다란 나무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찰나, 카이드로젠은 눈 깜짝할 사이 나무를 향해 점프해서 발길질했다.
공중에서 휘리릭 회전하며 540도 강력한 뒤돌려차기 한방.
충격을 받은 나무는 우지끈 소리를 내며 반으로 접혔다.
쿠궁
조용하던 숲에 울리는 요란한 소리.
놀란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시야가 확보되려면 아직 멀었군. 숲 전체를 밀어버려야겠어.”
당연한 얘기지만, 나무 하나 박살 낸 것으로는 시야 확보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타앗
지름 30cm 정도 되는 나무를 한 손으로 뿌리째 뽑아냈다.
잡초 뽑듯이 가볍게 뽑아낸 후 여러 개를 어깨에 들쳐메니 어느 정도 느껴지는 중량감. 뽑아낸 나무를 한곳에 모아놓고 식물 줄기를 이용해 묶었다.
성벽을 깨는 충차처럼 둥그스름하게 만든 나무몽둥이. 이 나무몽둥이를 두 손으로 잡고 머리 위로 붕붕 돌리기 시작했다.
“하압!”
쾅쾅쾅
육중한 무게의 나무몽둥이가 주변 지형을 파괴했다.
큼지막한 나무나 바위산, 너나 할 것 없이 몽둥이에 혼쭐이 나는 상황.
나무들은 도미노처럼 쓰러지고 바위는 으깨져 박살이 났다.
“이제 좀 낫군.”
어느 정도 휘두르고 보니 확보된 만족스러운 시야.
그러자 계곡 너머에 있는 커다란 형상의 누군가가 보였다.
“드디어 만났군, 거인족!”
놈은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미쳤소?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요? 감히 인간이 여길 들어오다니. 서리도끼 부족에게 걸렸다면 필히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오. 당장 여기서 나가시오!”
멀찍이 서 있던 그는 나를 향해 빽하고 소리 질렀다.
아직 성장이 진행 중인지 2m 정도밖에 안 되는 작고 어린 거인.
카이드로젠이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숲의 터전을 보고 불만을 토로했다.
‘침착하자.’
내가 우호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최대한 친절하게 다가가는 것이 포인트.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반갑다. 나는 칸 제국의 황제다. 당장 리올라에게 안내해라.”
가능한 카이드로젠이 낼수 있는가장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걸었지만···. 인사를 들은 거인족은 바램과는 다르게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우리 터전을 박살 내는 놈이무슨 낯짝으로 웃는 것이오? 진짜 미친 게 틀림없군! 우리 부족장님을 당신이 어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절대 만나게 해줄 수 없소.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시오.”
그래 뭐, 여기까진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위.
역시나 우트그라드 전체적으로 인간에대한 혐오감정이 이미 팽배한 듯했다.
게다가 내가 숲을 어지럽히는 모습을 보았으니 부정적인 인식은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급한 데 뭐 어쩌겠나.
“본론부터 말하지. 리올라를 살리고 싶지 않나?”
“뭐···. 뭣?”
작은 거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리올라를 살리고 싶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당황한 듯 침묵했다.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며 상황 파악을 하려는 모습.
“좋은 말은 내가 해야 할 것 같군. 열받게 하지 말고 당장 안내해라. 이 난쟁이 똥자루 같은 놈아. 리올라가 죽으면 네가 책임질 거냐?”
카이드로젠은 머뭇거리는 거인을 보고 답답한 듯, 하고 싶은 말을 맘껏 내뱉었다.
‘젠장. 가만히 좀 있어라. 너는···.’
카이드로젠의 호통에 이름 모를 거인은 당황하여 발만 동동 굴렀다.
‘처음 보는 인간이 어떻게 부족장님을 알고 있지? 정말 살릴 방법이 있는 건가? 하지만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야. 나무를 뽑아서 몽둥이를 만드는 인간이라니. 우리 숲을 이런 식으로 해치는 인간은 본적도 없어. 부족장님께서 인간은 절대 믿지 말라고 하셨는데···. 허나 정말 그가 부족장님을 살릴 수 있다면?’
그는 얼굴만 봐도 속이 훤히 보이는 아주 귀여운 친구였다.
“야, 책임질 거냐고? 네 놈이 리올라를 죽일 셈이냐?”
나는 더이상 시간을 주지 않고 다시 한번 질문했고, 그는 작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젠장,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부족장님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겠소만, 내가 데려왔다고는 말하지 마시오. 감히 인간을 부족장님께 데려가다니 무슨 화를 볼지 모르니 말이오.”
**
리올라를 만나기 위해 그를 따라 이동했다.
땅에서 느껴지는 바삭바삭한 얼음기.
척박하다 못해 회색빛이 감도는 숲.
재앙이 닥친 우트그라드의 색깔을 보여주는 듯 하나같이 우울하고 생기가 없었다.
목적지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간간이 들리는 거인의 고함소리.
누가 지르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소리에선 한없이 깊은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여기까지 안내해주겠소. 저기 앞에 보이는 동굴 안에 리올라 님이 계시오.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오. 발작을 일으킨 거인들이 많아 당신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 말이오.”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안내를 마친 작은 거인은 숲속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이내 사라졌다.
리올라가 부족장을 맡은 ‘낮벼락 부족.’
거인족 중에서도 유독 자연 그대로 공존하길 원하는 그들은 다른 부족과는 다르게 집도 짓지 않고 자연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갔다.
집을 짓는 행위조차 자연을 파괴한다나 뭐라나.
산속 깊숙이 위치한 계곡 골짜기나 동굴이 이들의 주요 서식지였다.
“너무 아파! 머리에 대못이 박힌 것 같습니다!”
“페이튼, 이 빌어먹을 자식!”
“부족장님, 여기도 부작용이 심각합니다!”
“온몸에 고름이 차오르고 시뻘게졌어요!”
“차라리 날 죽여줘, 저들처럼 미쳐버리고 싶진 않아! 제발 부탁이야. 너무 고통스러워!”
생체실험의 부작용이 상당 부분 진행된 듯 동굴 안은 환자들이 지르는 처절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젠장···. 늦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서둘러 동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잠깐, 너 인간이냐?”
등 뒤에서 들리는 불쾌한 목소리.
갑자기 등장한 목소리에 조금 놀랐다.
뒤를 돌아보니 4m에 육박하는 완전체의 거인족 한 명이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런 기척이 없었는데 언제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거지?
거인족들이 덩치에 비해 기도비닉이 우수하다는 묘사가 기억나긴 한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놀란 눈치군. 우리라고 뭐, 쿵쾅거리며 요란하게 이동하는 줄 알았나? 이 멍청한 인간 자식. 무슨 낯짝이라고 여기까지 들어온 거지?”
눈앞에 비친 거인의 모습은 이미 생체실험의 부작용으로 온몸에 고름이 찬 상태였다.
피부의 고름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터져나가며 진물이 흘렀다.
역병에 걸린 듯 자주색으로 변한 피부는 이미 부작용으로 고통받은 지 오래됐음을 짐작하게 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난다면 아예 정신이 나가버린다.
“좋은 말로 할 때 방해 하지 마라. 리올라를 만나러 왔다.”
카이드로젠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거인의 반응은 차갑다 못해 한기가 서렸다.
“미친놈. 우리 부족장님의 이름을 입에 담다니, 진정 죽고 싶은 것이로구나.”
소설 속 묘사에 따르면 눈 색깔이 빨갛게 변한 거인은 어떤 방법으로도 치유할 수 없다고 했다.
몸이 자주색으로 변했다면 다음 증세는 눈이다.
그 말인즉슨···.
저 거인은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자아를 완전히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감히 우트그라드에 오다니! 기꺼이 죽여주마!”
그는 말이 필요 없다는 듯 노골적인 살기를 내뿜었다.
확실히 페이튼이 심고 간 인간에 대한 혐오증은 가히 최고조였다.
쿠앙
놈은 등에 메고 있던 도끼를 들고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거인족에게 어울리는 어마어마한 크기.
그는 수직으로 도끼를 강하게 내리꽂았다.
콰가강!
내가 서 있던 자리는 거인의 공격으로 묵사발이 났다.
“잠깐 멈춰봐!”
“흐아아아압!”
“네 놈은 위험하다니까!”
말없이 땅에 박힌 도끼를 뽑아 들고 다가오는 거인.
그는 다시 맹렬한 기세로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쿠콰쾅
커다란 도끼의 파괴력이 강력하긴 했지만, 카이드로젠의 날렵한 움직임 덕분에 거인의 공격은 수차례 허공만을 갈랐다.
‘놈의 공격이 느리긴 한데···.’
실수로 한번 맞기라도 한다면 위험할 수 있는 파괴력.
힘으로 제압하면 거인족의 반발이 클 텐데 어찌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요리조리 잘도 피하는구나. 한 번만 걸리면 된다. 반쯤 죽여놓고 실컷 가지고 놀다 버려주마.”
그는 잔뜩 흥분해서 씩씩거렸다.
“음···.”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순 없는 상황이니 일단 뭐라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내게로 돌진하는 거인.
나는 그의 도끼질을 고개를 살짝 숙이며 흘려보내고 명치에다 정권을 찔러넣었다.
“크허억!”
다음은 걷지 못하게 아킬레스건을 끊어주고···.
“끄어억!”
팔 하나를 부러뜨려 도끼질을 멈췄다.
“아아악! 이 벌레 같은 놈이!”
거인은 우두둑하며 부러지는 뼈 소리와 함께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질렀다.
이제 육중한 무게의 도끼를 한 손으로 들 순 없을 터.
이어지는 콤보는 리드미컬하게 들어가는 하이킥이었다.
“하압!”
비록 거인의 키가 커서 로우킥을 갈긴 셈이지만···.
그는 강한 충격을 받은 듯 바닥에 쓰러졌다.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니 날 원망 마라.”
“이게 고의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이냐? 이거 진짜 미친놈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