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10화
솔라스트림 동부광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휘감는 장미 줄기 여관.
이곳은 예로부터 몰락한 가문의 귀족이나 가난한 사냥꾼 같은 변방의 무리가 주로 찾는 주점 겸 여관이었다.
본래 칸 제국의 하층민들이 이곳의 주 고객층이었으나 카이드로젠이 폭정을 시작한 이후로는마법사들의 방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으랏차차.”
가게 문을 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주인장.
그는 손님들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든 돈만 낸다면 자신의 손님이라는 신조다.
주인장의 확고한 신념 덕분에 이곳, 휘감는 장미 줄기 여관은 구린 네이밍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 터를 잡는 데 성공했다.
“어서 오세요.”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들어오는 사내.
그는 습관처럼 자신의 신분을 숨기려 노력했지만 노련한 주인장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휘감는 장미 줄기 여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법사분.”
마법사라고 불린 사내는 말 없이 한참을 가게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가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과거 카이드로젠의 폭정이 이어지던 시절.
이 술집이 마법사들의 아지트로 알려져 제국의 군사들이 들이닥친 적이 있었다.
마법사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았던 그 사건.
안전하다고 판단했던 동부광장의 허름한 술집은 순식간에 마법사들의 피로 물들며 비명소리로 가득 찼던 곳이다.
“왠지 낯이 익은 분이신 것 같지만 예의상 말씀드리겠습니다. 가게 내에서 마법은 금지되어있고요, 숙박을 하시면 바인 한잔이 공짜입니다. 뭐 나머지 기본적인 사항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바로 주문하실래요?”
천천히 남색 후드를 벗으며 얼굴을 드러낸 사내.
알렉스였다.
“늘 그렇듯 친절하시군요. 주인장. 혹시 멀릭 오지 않았습니까?”
“멀릭이라면···. 신사분과 자주 동행하시는 더벅머리에 깡마르신 분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아직 가게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인장은 요즘 들어 부쩍 자주 찾아오는 알렉스와 멀릭을 기억했다.
“그럼 먼저 한잔하면서 기다려야겠군요. 괜찮은 거 있으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주인장. 가격은 상관없소이다.”
“마침 잘 됐군요. 안 그래도 괜찮은 바인이 들어왔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주인장은 선반을 뒤적거리며 고급스러운 포장지로 싸인 바인을 꺼냈다.
“뷔네플레르 산 에폴릭 바인입니다. 요즘 시국에 이만한 품질의 바인은 찾아보기 힘들지요.”
“고맙습니다, 주인장.”
주인장은 능숙한 솜씨로 마개를 따서 알렉스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좋은 시간 보내시길.”
알렉스는 바인을 홀짝이며 상념에 잠겼다.
그는 카이드로젠이 벌인 충격적인 그때를 다시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자신이 뽑은 검으로 자해를 하며 상상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사과를 했던 카이드로젠.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내며 결국 기절해버린 황제를 보며 마법사들은 같은 고민에 빠졌다.
황제의 행동이 진심일까?
아니면 폭군 황제의 우발적인 기행일까?
알렉스는 카이드로젠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마법사들을 이해시키려 노력했지만···.
적지 않은 무리는 아직 멀릭의 의견처럼 그를 믿지 않는 모습이었다.
[알렉스, 그는 카이드로젠일세!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폭군 황제라는 말이오!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길 바라오!]
황궁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멀릭은 분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알렉스에게 소리쳤다.
그는 카이드로젠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며 아쉬워했다.
‘멀릭의 말대로 내가 틀렸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의 행동에는 정말 진심이 느껴졌단 말이다···.’
알렉스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는 분명히 황제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었다.
비록 카이드로젠 특유의 오만하면서 건방진 눈빛은 여전했지만, 그 속에는 어딘가 참회하고 있는듯한 진중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알던 카이드로젠과는 어딘가 다른 분위기까지 풍겼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말이다.
[헛소리하지 말라니까! 알렉스!]
[멀릭의 말이 맞소!]
[왜 자꾸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시는게요!]
하지만멀릭을 비롯한 여러 마법사는카이드로젠을 믿지 않았고 동시에 알렉스의 의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카이드로젠을 죽이고 싶어했다.
“하아.”
알렉스는 황제와 마법사가 가진 상충된 입장을 모두 이해했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섣불리 확신할 수 없었다.
“뭘 그리도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나?”
멀릭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는 주인장에게 알렉스와 똑같은 바인을 달라고 주문하며 옆자리로 와서 합석했다.
“아, 왔는가 멀릭?”
“그려. 뭐 하고 있었나? 내가 좀 늦었네.”
“그냥 뭐···. 얼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네.”
“젠장. 또 카이드로젠 얘긴가?”
멀릭은 인상을 구기며 알렉스를 노려봤다.
“내가 말했지 않은가. 그의 행동은 또 다른 기만일 뿐이라고. 카이드로젠 그 악독한 인간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는데 일조한 마법사 길드를 찾을 때까지. 아니, 찾고 나서도 모르지. 우리에게 향하는 이 증오가 언제쯤에 멈출지. 내 생각에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 같소. 왠지 아시오?”
멀릭이 얘기하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알렉스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레스 빌라트 황제를 죽이는데 일조한 마법사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말이오!”
“그래. 그건 나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네.”
“그런데 왜 자꾸 흔들리는 것이오?”
“하지만 황궁에서의 일을 생각해보게, 멀릭. 카이드로젠의 행동에는 진심이 느껴졌소. 그는 진정으로 바뀌고 있소이다.”
탁
멀릭은 바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탁자를 향해 과격하게 내려놓았다.
“내가 밤마다 무슨 꿈을꾸는지 혹시 아시오?”
“...”
“죽은 아내가 피를 흘리며 울고 있는 꿈을 꾸고 있소. 그것도 매일! 난 차라리 그 자리에서 카이드로젠이 콱 죽어버렸으면 했소이다. 당신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를 용서하고 싶은 건지 아직 잘 모르겠소. 사람 쉽게 변하는 거 아니오, 알렉스.”
멀릭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바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바인 한 병을 말끔히 비워버린 그는 주인장에게 바인 한 병을 더 달라고 주문했다.
“..오자마자 내가 너무 흥분한 것 같군. 미안하네.”
“그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소. 나 또한 일가족이 몰살해버렸으니까 말이오. 멀릭. 더이상 강요는 안 하겠네. 일단 자네가 기운을 좀 차렸으면 좋겠군.”
알렉스는 바인을 들어 멀릭의 빈 잔에 살짝 부딪혔다.
옆에서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주점의 주인장이 그들의 빈 잔에 바인을 따라주며 말을 붙였다.
“카이드로젠 황제가 자해를 했다는 소문이 정말 사실이었나 보군요.”
“그게 벌써 그렇게나 소문이 퍼졌소?”
“당연하고 말고요. 여기에 술 마시러 오는 마법사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멀릭은 머쓱한 듯 창밖을 바라봤다.
“허허, 근데 그거 아십니까? 지난밤에 칸 제국의 행정관이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그간 여기 동부광장 같은 빈민촌을 신경 쓰는관리는 없었는데 말이죠.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조만간 재정 지원이 나올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게 정말입니까?”
“저도 처음에는 안 믿기더라고요.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허허.”
“제국의 관리가 뭐라고 합디까?”
“평소에 동네 치안을 어떤지. 마수가 갑자기 뛰쳐나와 거리를 활보하지는 않는지. 그리고 이곳 여관 장사는 할 만한지 시시콜콜 한 것까지 다 물어보더라고요.”
“세상에 참 별일이 다 있군요.”
“그렇지요? 허허 참. 누구나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가던 사소한 일들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둘씩 얘기하기 시작하니 반나절이 훌쩍 지나갑디다! 하하하!”
멀릭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바인을 홀짝였다.
“흥.”
솔라스트림 동부광장은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닌데 삶의 수준은 극명하게 갈렸다.
휘황찬란한 보석과 산해진미를 담은 음식들로 하루가 멀다고 축제가 끊이질 않는 황궁과는 달리, 동부광장은 그야말로 거지들이 판을 치는 빈민촌이었다.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건물들은 허름하기 짝이 없었고 주민들이 자력으로 생활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자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행인이나 용병들을 보며 구걸을 하기 일쑤였고 간혹 성에 차지 않으면 소매치기까지 일삼았다.
벌건 대낮에는 배고픔을 못 이긴 주민들이 강도로 변해 설치기도 하는 무법지 같은 곳이 바로 솔라스트림 동부광장이었다.
휘감는 장미 줄기의 여관장처럼 술과 숙식을 제공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생활은 상위 1%에 들 정도로 이곳의 생활 수준은 최하위 중의 최하위였다.
당연하게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잠시 거쳐 가기만 할 뿐 아무도 정착하여 살려고하지 않았다.
“카이드로젠이 이런 빈민촌까지 신경을 쓰다니···. 정말 의외로군. 이전에 아레스 빌라트 황제조차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무관심한 지역인데 말이오.”
“하하하! 이러다 저희 여관의 집값이 훌쩍 뛰어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 이거 집을 팔고 이사를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벌써부터 고민이 되는군요!”
“건투를 빕니다. 주인장.”
“하하! 뭐 어찌 됐든! 그때는 제가 최고급 바인을 여러분께 한턱 쏘겠습니다!”
넉살 좋게 웃어 재끼는 주인장.
그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한참을 웃어댔다.
“알렉스.”
“응?”
“백번 양보해서 황제가 자네 말대로 변하고 있다, 혹은 이미 변했다고 칩시다. 하지만 당장은 이렇다저렇다 확신하기 이르오. 그건 당신도 알고 있겠지?”
“당연히 알고 있네. 카이드로젠이 원래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내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 말이오.”
카이드로젠의 손에 죽은 알렉스와 멀릭의 가족.
특히나 멀릭은 눈앞에서 카이드로젠의 손에 죽어버린 아내를 기억하면, 당장이라도 분통이 터져 미쳐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카이드로젠이 저지른 패악질을 잊기에는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게. 어차피 우리에게 남는 것이 시간 아닌가?”
“하아.”
“아내의 일은 다시 한번 유감이네, 멀릭.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모르겠군.”
“난 괜찮네.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러는가.”
“힘내시게나.”
“나 혼자 이런 아픔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단지···.”
멀릭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단지···.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소.”
“...”
“아무래도 조금 많이···.”
그의 상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알렉스는 뭐라고 위로해도 그의 마음을 치유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축 처진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바인을 홀짝이는 알렉스.
그들은 그렇게 밤이 새도록 서로의 잔을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