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09화
에린의 치료가 끝난 후 다시 침대에 발라당 누워 잠을 청했다.
빙의된 이후로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던 황제의 중압감.
잠시 이를 내려놓으니 일순간에 피로가 몰려왔다.
“흐아암.”
나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아주 딥한 단잠에 빠졌다.
그로부터 몇시간 후.
커튼 사이로 비쳐오는 따사로운 햇살에 조금씩 잠에서 깼다.
“으응?”
왜 이렇게 개운하지?
놀랍게도 내 몸의 상태는 이보다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최상이었다.
카이드로젠의 경이적인 회복력.
타고난 그의 회복력 덕분에 내 몸은 금세 정상적인 궤도로 올라와 있었다.
‘사실 내 몸이 아니라 카이드로젠의 몸이지만.’
여기저기 단검으로 난도질한 그의 몸에는 작은 생채기만 있을 뿐···.
얼굴에 보이는 적당한 핏기는 혈색 또한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을 알렸다.
‘이놈은 진짜 괴물이구만.’
비록 에린이 치유 마법을 걸어준 탓도 있었지만, 피를 그렇게나 많이 쏟았는데 이 정도로 멀쩡하다니!
나는 카이드로젠의 몸을 만지작거리며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아무리 급소를 피해가며 단검으로 찔렀다고 해도 근육과 살점이 모조리 찢겨져 나갔는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뻔뻔할 정도로 멀쩡한 육신.
‘카이드로젠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뻔뻔함이구나.’
성격만큼이나 뻔뻔한 그의 신체 능력.
나는 새삼스럽게 황제의 수준에 감탄했다.
소설 속에서는 비록 잔혹한 폭군 황제로 일찍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가진 능력은 결코 주인공과 비교해봐도 뒤처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벤하트보다 더 센 거 아냐?’
근육에 살짝만 힘을 줘도 불끈거리는 근육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황홀했다.
‘내가 운동한 것도 아닌데 단박에 식스팩이 생기다니.’
완전 공짜.
문득 카이드로젠으로 빙의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런 행인1이나 엑스트라로 빙의했다면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하고 끝나버리지 않았겠는가?
“흡! 흡!”
나는 한참을 거울을 들여다보며 이리저리 포즈를 취했다.
‘이 녀석···. 생긴 건 참멋있단 말이야.’
잔잔한 근육들이 보기 좋게 자리 잡은 몸을 보고 있자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건 완전 모델 뺨치는 수준!
“폐하?”
손님이 찾아왔는지 시종이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카이드로젠의 육체에 거하게 취해 애써 그의 부름을 외면했다.
“저···. 저기···. 폐하?”
시종은 애원하는 목소리로 재차 불렀다.
“어. 그래. 무슨 일이지?”
“에린 킨드라가 알현을 요청합니다.”
“들라하라.”
다시 찾아온 에린.
그녀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고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근엄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폐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안녕히 자긴 했다마는, 언제부터 아침 인사를 했다고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느냐.”
“폐하께서 언제 황궁을 비우실지 몰라 이걸 미리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에린은 주섬주섬 가져온 보자기를 풀었다.
“그게 뭐지?”
보자기를 벗겨내니 영롱한 붉은 빛의 갑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뜻 보기에도 매우 견고해 보이는 갑옷.
에린은 칭찬을 바라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게 뭐냐?”
“폐하의 옥체를 지켜줄 갑옷입니다.”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하는데 갑옷이 웬 말이냐? 무거워서 거추장스럽겠구나.”
나는 갑옷을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저를 너무 과소평가하십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에린은 갑옷을 치켜들며 보란 듯이 흔들었다.
“40인치로 정확히 허리까지 떨어지는 길이에, 은으로 코팅하고 탄성이 뛰어난 능철석으로 제조한 어깨 이음쇠에 야전에서의 수납을 위해 장인이 수 개월간 직접 무두질한 주머니도 있으며···.”
이러쿵저러쿵···.
“어이.”
“예. 폐하?”
“내 스타일 아직 모르겠나?”
“아. 아닙니다.”
“그렇게 길게 말해봐야 잘 모르겠으니 한마디로 정리해라.”
에린은 당황하여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갑옷을 한마디로 하면 잉그람 대륙에서 이보다 뛰어난 내구성을 가진 갑옷은 없을 겁니다. 게다가 제가 직접 경량화 마법을 걸어두어 폐하께서는 갑옷을 입으신 지도 모를 정도로 가볍고 편안함을 느끼실 겁니다. 부디 폐하의 안위를 위해 이 갑옷을 거두어주시길 간곡하게 요청드립니다.”
에린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갑옷을 들고 내게 전달했다.
그녀의 말대로 갑옷은 런닝 쪼가리처럼 가볍다 못해 흐물거렸다.
‘이게 정말 내구성이 좋은 갑옷이라고?’
상식적으로 믿기지 않지만 여기는 소설 속이다.
나는 새삼스레 의문은 가지지 않기로 하고 그녀에게 갑옷을 받아 단숨에 착용했다.
부드럽고 보송보송한 착화감.
갑옷을 착용하자마자 단박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오우야! 이거 지리는데?”
정말 런닝 쪼가리를 입은 것처럼 가볍고 편했다!
실크처럼 찰랑거리는 매끄러운 느낌!
겉보기에는 철제 장식이 달려있어 무겁고 불편해 보였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과연 에린의 말처럼 갑옷을 입고도 몸을 움직이는데 불편한 점 하나 없을 정도로 편안한 착용감을 자랑했다.
“그런데 폐하, 지린다는 게 무슨 의미 신지요? 설마···.”
“설마 뭐?”
에린은 자신이 혹시라도 말실수할까 염려하는 듯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언가를 바지에 지리셨다는 뜻인···.”
“그 입 다물 거라. 갑옷은 고맙게 받겠다.”
나는 그녀의 말을 자르고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검은색 도브를 어깨에 둘렀다.
허리춤엔 검 한 자루와 단검 하나.
그리고···.
“내가 준비하라고 한 건 가져왔나?”
“여기 있습니다.”
“고맙군.”
나는 에린에게 부탁한 물건을 건네받고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마쳤다.
“그런데 폐하. 어디 가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 우트그라드.”
에린의 질문에 무심하게 대답했다.
목적지를 들은 에린의 표정이 잠시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폐하의 뜻을 믿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
우트그라드. 거인족의 땅.
칸 제국 북서쪽 끝자락에 있는 이곳은 소수의 거인족이 부족국가의 형태로 위치했다.
이곳은 워낙 험난한 지형지물로 인해 외부인의 방문이 힘들었다.
거기다 거인족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싫어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우트그라드는 잉그람 대륙의 세계관에서 미지의 땅 그 자체였다.
‘물론 나는 제외지만.’
우트그라드의 거인들은 조화를 중시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종족이었다.
인간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자발적으로 변방에 위치하여 살아갔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 생기고···.
그 사건은 거인족이 칸 제국을 침공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난 꼼짝없이 죽음 목숨이다.’
나는 소설 속 내용을 상기하며 우트그라드를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파앗
가공할 힘으로 지면을 박차며 속력을 끌어올렸다.
발길을 한번 내디딜 때마다 으깨지는 바닥.
볼품없이 박살 난 바위와 돌부리는 그의 무지막지한 힘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어우야.’
주변의 시야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카이드로젠은 보통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문득 우사인 볼트도 달리기로는 카이드로젠에게 상대도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눈앞에 보이는 허름한 판잣집.
‘폐가인가? 저건 살짝 옆으로 피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던 나는 판잣집을 피해가기 위해 살짝 방향을 틀었다.
콰아앙!
‘으응?’
방향을 틀려는 나의 의지를 무시한 채 눈 깜짝할 사이 판잣집을 향해 들이박은 카이드로젠.
불도저처럼 돌진해서 판잣집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이···. 이런 미친!”
옆으로 살짝 비껴가면 될 것을!
카이드로젠은 무식하게 판잣집을 부숴버리고 앞으로 전진했다.
이 새끼 이거 진짜 도라이인가?
혹시나 사람이 안에 있었다면 어쩔 뻔했어!
잠잠하다 싶더니 누가 폭군 아니랄까 봐 아주 과격하게 티를 냈다.
이번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이 정도는 비켜 갈 수 있···.’
파직
이번에도 카이드로젠은 정면으로 돌진했다. 날아 차기로 나무의 상단을 발로 걷어차 가볍게 부러뜨리고 나뭇가지를 도움닫기 삼아 앞으로 튀어나갔다.
‘너 왜 이래?’
카이드로젠의 폭주하는 주행 방식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새끼 이거 나 몰래 술 먹었나?’
한 몸속에서 공존하는 이상 나 몰래 뭔가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카이드로젠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미친 듯이 앞을 향해 질주했다.
‘그래도 판잣집에 비하면 나무 한 그루 정도야···.’
나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상황을 합리화했다.
실제로 나무 한 그루 정도는 아주 소소한 터프함이었으니···.
멀찍이 보이는 집채만 한 바위.
‘저건 아무래도 무리겠지. 크기가 너무 커. 점프해서 넘어가자.’
...라고 생각했지만 내 의지와는 다르게 카이드로젠은 큼지막한 바위를 향해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들었다.
콰아앙
이젠 헛웃음이 나올 지경.
카이드로젠은 바위에 주먹을 질러 넣더니 보란 듯이 산산조각을 내버리고 길을 만들었다.
일부러 나에게 시위라도 하는 듯 한술 더 뜨는 카이드로젠.
나한테 뭔가를 어필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이렇게 가는 길이 최단거리라서?
‘뭐가 됐든 이건 확실하게 알겠다.’
카이드로젠은 명백히 도라이가 분명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불변의 진리!
‘아이고 내 팔자야···.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나는 카이드로젠의 기행을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그의 괴팍한 성격을 하루아침에 바꿀 순 없을 테니···.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미세하게 변한 공기의 흐름은 목적지와 가까워졌음을 느끼게 했다.
우트그라드에 가까워질수록 땅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퍽퍽한 대지와 매섭게 몰아치는 북풍은 제국의 성벽이 주던 안락함을 상기시켜주기에 충분했다.
‘어느새 여기까지 왔군.’
점점 황궁과 멀어질수록 류지상은 불안했지만, 카이드로젠은 투지가 점점 불타오르는듯한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 혼자 황제로 빙의했다면 오래 못 살지 않았을까 싶다.
무모하고 비이성적이긴 하지만 담대한 칸 제국의 황제 카이드로젠.
언제든지 그와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속 한구석이 든든했다.
‘나의 지식과 카이드로젠의 무력을 합친다면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생존을 위한 굳은 결의를 다지며 잠시 후 거인족의 나라.
우트그라드에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