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08화
카이드로젠이 적신 피로 흥건한 바닥.
황제가 스스로를 난도질하여 피떡이 된 것도 모자라, 귀를 의심하게 하는 충격적인 발언까지. 칸 제국의 인사들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경악했다.
“화..황제가 방금 뭐라고 한 거예요?”
“미안하다고 한 것 같은데?”
“황제가 미안하다고 할 리가 없잖아? 잘못 들은 거 아니오?”
“저···. 저거 저러다 진짜 죽는 거 아냐?”
수군거리는 마법사 무리.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고집불통 카이드로젠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다니!
마법사들은 카이드로젠의 행동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굴렀다.
“어떠냐? 알렉스. 내 진심이 전해졌느냐? 그대는 현명한 마법사니까 내 진심을 느끼고도 남았겠지.”
“그···. 그건···.”
“아니냐? 내 진심이 아직 부족한가 보군.”
알렉스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했는지, 다시 자신의 몸을 찌를 준비를 하는 카이드로젠.
이번에 단검이 향한 곳은 자신의 목이었다.
“폐하! 위험합니다, 제발 그만두시옵소서!”
다급하게 외치는 에린.
하지만 황제의 행동은 진심이었다.
에린의 외침은 가볍게 무시하고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아무리 회복력이 뛰어나다지만 이러다 진짜 죽겠어 미친 황제야!’
망설임 없이 단검을 자신의 목으로 가져가는 카이드로젠.
마법사를 포함한 황궁 안에 사람들은 두 눈을 질끈감았다.
타앗
피로 물든 새빨간 단검이 경동맥을 뚫어버리기 일보 직전.
황제의 움직임, 동시에 나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게 무슨 짓이냐, 알렉스?”
“더이상의 자해는 그만두시오.”
“내가 왜?”
속박 마법에 일가견이 있는 알렉스.
알렉스는 카이드로젠이 움직일 수 없도록 단단히 움켜쥐었다.
이미 몸이 만신창이가 돼버린 황제는 속박을 풀어버릴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옴짝달싹 못 하고 그 자세 그대로 멈춰버린 카이드로젠.
“네 손으로 직접 끝내고 싶다 이거냐?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내가 당신처럼 잔혹할 거라 생각하지 마시오.”
“재밌군. 그럼 어쩌자는 것이지?”
알렉스는 잠시 침묵했다.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철천지원수.
그의 실력이라면 만신창이가 된 카이드로젠을 어렵지 않게 목을 졸라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망설였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카이드로젠을 죽이고 싶었지만, 막상 용서를 구하는 그를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전투 불능 상태의 상대에게 차마 공격 마법을 시전하지 못하는 알렉스.
“알렉스! 자네가 못하겠다면 내가 하겠다! 카이드로젠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지 않은가!”
“프레드 가문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 황제를 죽이고 나도 여기서 죽겠다!”
황궁 안에서 대놓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움직임.
카이드로젠을 향한 분노로 인해 그들의 결의는 단호했다.
죽음을 불사하며 카이드로젠에 대항하겠다는 의지.
여기서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한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마법사들과 화해는 절대 불가능하다.
‘다행히 내가 지시하기 전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미리 일러뒀지.’
폰 그라츠를 포함한 황제 친위부대는 거리를 두고 주시하고 있을 뿐 상황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에린도 마찬가지.
“비켜라, 알렉스! 내가 카이드로젠의 숨통을 끊어주겠다.”
몇몇 마법사들은 알렉스를 대신해서 황제를 처단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중에서도 프레드 가문의 멀릭이 가장 위협적으로 달려드는 모습.
침묵하던 알렉스는 그 모습을 보더니 그들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뭐...뭐야?”
“크윽! 뭐 하는 짓이냐?”
“뭐냐! 왜 나를 묶는 것이냐?”
멀릭을 포함한 마법사들은 순간 시간이 멈춘 듯 모두가 정지했다.
속박 마법에 통달한 알렉스는 뛰쳐나오던 마법사 무리를 단번에 움켜쥐었다.
일순간에 아크로바틱한 동작으로 모두 정지해버린 모습은 단연 압권.
알렉스는 다시 담담한 얼굴을 하고 그들을 향해 말했다.
“그대들의 마음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당장이라도 카이드로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소.”
알렉스는 황제를 등지고 마법사들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나 또한 황제를 죽여버리고 싶소이다. 내 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오.”
“그런데 왜 우리에게 마법을 시전하냐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이오? 알렉스! 당장 이 마법을 푸시오! 안 그러면 당신도 내가 죽여버리겠소이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자의 이름은 멀릭 프레드.
카이드로젠에게 아내를 잃은 비운의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분기탱천하여 소리 질렀다.
믿었던 알렉스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자 격분하여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시뻘게진 얼굴로 알렉스를 노려보는 멀릭.
“이 자리에서 그를 죽인다면 우리도 그와 같은 살인자가 되는 것이오. 우리는 그동안 카이드로젠의 비이성적인 행동에 분노를 느끼지 않았소? 비록 그가 내 아들을 죽인 원수지만 나는 도저히 그를 내 손으로···.”
“내가 죽여준다니까! 뭐가 문젭니까 알렉스! 이 멀릭은 살인자가 돼도 상관없소! 제발 부탁이오, 제발 이 속박을 풀어주시오!”
“친애하는 멀릭. 나와 같은 고귀한 마법사가 카이드로젠과 같은 살인자가 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소. 부디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오.”
“제발! 알렉스! 제발!!”
악을 쓰는 멀릭에게 다가가는 알렉스.
“물론 카이드로젠을 용서했다는 의미는 아니오. 하지만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사죄하고 있소이다. 믿기지 않지만, 그는 우리가 여기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사죄를 할 작정이었소. 처음부터 용서를 구하기 위해 우리를 초청한 것이오. 그걸 어찌 알 수 있냐고? 멀릭, 주위를 한번 둘러보시오.”
멀릭은 알렉스의 말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피투성이가 된 황제의 뒤에는 칸 제국의 고위급 인사들이 전투 의지를 보이지 않고 상황을 조용히 관망하고 있었다.
적지 않은 숫자의 근위병들도 마찬가지.
아무리 상대가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검사들만 있다고 하더라도 숫자에는 장사가 없었기 때문에 전투가 벌어진다면 마법사들이 결국에는 전멸할 것이 뻔했다.
황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이라도 여기 있는 마법사들을 모두 죽여버릴 수 있을 것이다.
“멀릭, 우리 조금만 두고 보는 건 어떻겠소? 마법사들은 언제나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것을 그대도 잘 알고 있지 않소. 그리고 저기 저분을 한번 보시오.”
알렉스가 가리킨 손가락에는 에린이 앉아있었다.
칸 제국뿐만 아니라 잉그람 대륙 전체를 통틀어봐도 그녀만 한 클래스의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실력뿐만 아니라 겸손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모든 마법사의 롤모델인 것은 덤.
에린을 알아본 알렉스는 계속해서 마법사들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나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소. 에린 킨드라가 어떤인물인지는 다들 알 것이오. 황제가 에린을 처형시킨다는 소문을 분명 들었는데···. 하지만 보다시피 그녀는 멀쩡히 살아있소이다.”
알렉스는 에린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며 예의를 표했고 에린은 슬픈 눈빛으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뒤늦게 에린을 발견한 마법사들은 적잖이 놀란 눈치.
“칸 제국의 대마법사. 모든 마법사가 존경해마지않는 그녀가 황제의 편에 서 있소.
심지어 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했는데도 말이오.나는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봤을 때 황제가 분명 변화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소. 아니면 이미 변했을지도 모르지. 그대들도 알겠지만, 카이드로젠이 처음부터 폭군 황제였던 것이 아니오. 간혹 난폭한 언행을 일삼긴 했지만 돌아가신 아레스 빌라트 황제처럼 총명했소이다.”
“알렉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겁니까? 카이드로젠을 용서하자는 겁니까?”
멀릭은 답답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카이드로젠에 원한이 없는 마법사들은 여기에 아무도 없을 것이오. 다만 나는 그저 눈앞의 감정에 사로잡혀 마법사가 지녀야 할 긍지를 저버린 채, 살인을 저지르고 싶은 마법사는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소.”
알렉스의 소신 있는 발언에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한 장내.
그들이 동요하는 이유는 바로 마법사들의 율법 중 하나인 살생을 금한다는 규율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마법을 다룰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타고난 그들은 함부로 마법의 힘을 남용하지 않도록 평생을 절제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아갔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는 사실 카이드로젠을 죽이고 싶은 마음보다는 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소?”
그의 발언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마법사가 하나둘 늘어났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카이드로젠과 알렉스.
“다들 힘든 건 잘 알고 있소이다. 그렇지만 우리···.”
알렉스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마법사들을 바라보며 힘주어 얘기했다.
“카이드로젠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는 게 어떻겠소?”
**
알렉스가 마지막으로 뱉은 말을듣고 있던 찰나, 나는 정신이 흐릿해지며 결국 기절해버렸다. 얼마나 기절했는지도 모를 만큼 깊은 잠에 빠졌다가 한참 후에 눈을 떴다.
내가 있는 곳은 황제의 푹신한 침대 위.
주위를 둘러보자 에린이 눈을 감고 마법을 시전하는 것이 보였다.
각종 버프 및 치료 마법에 능한 에린은 카이드로젠을 빠른 속도로 치유했다.
‘후아...진짜로 뒤지는 줄 알았네.’
아찔했던 그 순간을 회상하는 와중에 카이드로젠의 행동에 감탄했다.
기를 쓰고 미안하다는 말을 거부할 땐 언제고 알렉스에게 미안하다고 할 줄이야.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알렉스에게 사과하는 장면은, 어느 누가 보더라도 마음이 약해질 만큼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폐하, 정신이 드십니까?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눈을 뜬 황제를 발견하고 몸상태를 체크하는 에린.
“크흠! 애초에 아무렇지도 않았니라. 일부러 급소를 피해가며 찔렀으니 말이지.”
“그런 것 치고는 꽤 오래 기절하셨습니다, 폐하.”
“알렉스의 혓바닥이 생각보다 길더구나. 그건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내가 기절을 하다니 피를 많이 흘리긴 한 모양이군.”
고맙다는 인사는 사치인가.
자신을 치유해준 에린에게 허세나 부리는 카이드로젠.
칸 제국의 황제라지만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어린아이 같았다.
“그나저나 마법사들 반응은 어땠나?”
“폐하와 알렉스 덕분에 유혈사태는 없었습니다. 큰 소동 없이 황궁을 빠져나가 돌아갔습니다.”
에린의 말을 듣고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도 마법사들과 화해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을 뿐 계획을 세심하게 준비하지 못했다.
그저 '황제가 친히 사과하는데 당연히 받아주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을 가진 것이 사실이었다.
‘그만큼 카이드로젠이 가진 권력은 막강했으니까.’
마법사들의 반발이 심했을 때를 회상하면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괜히 섣부르게 일을 벌였다가 싹 다 망치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카이드로젠의 돌발 행동 덕분에 상황을 잘 만들 수 있었다.
‘확실히 황제는 황제인 건가?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결단을 절대 내리지 못할 거야.’
어느 누가 자신의 몸을 난도질해가면서 고해성사를 하겠는가.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카이드로젠이 죽음으로써 마법사에게 사죄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일부러 급소를 피해가며 단검을 찔렀으니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을까?
‘이것이 칸 제국의 황제가 가진 담대함.’
새삼 카이드로젠이 가진 능력에 대해 실감했다.
23살 어린 나이에 제국의 황제가 된 카이드로젠.
금수저 중의 금수저를 타고난 그는 패시브처럼 가진 권력 이외에도 자신의 능력을 갈고닦기 위해 쉼 없이 정진했다.
칸 제국이 강대국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건 아레스 황제의 존재뿐만이 아니라 그의 아들 카이드로젠 또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다.
오늘 카이드로젠은 검술 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센스나 결단력도 상당하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폐하. 다음부터는 이런 일을 계획하실 거라면 미리 귀띔이라도 부탁드립니다. 저 말고도 황실의 대신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에린은 원망 섞인 목소리로 부탁했다.
“하! 칸 제국을 이끄는 주력들이 고작 이 정도에 놀라고 그러느냐? 앞으로 놀랄 만한 일들이 많을 것이니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 이르거라.”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에린을 보고 가볍게 코웃음을 치는 카이드로젠.
에린은 의아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설마···. 오늘과 같은 일이 앞으로 더 있을 예정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