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07화
각 지역에 공문을 보내서 피해받은 마법사들에게 내용을 전달하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황궁을 방문했다.
월드컵 경기장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강당이 바글바글할 정도.
오랜만에 칸 제국의 고위급 인사들도 한자리에 모였다.
폰 그라츠를 포함한 그라츠 가문이 오른쪽에 무리 지어 앉아있었고 에린을 포함한 나머지 대신들은 왼쪽에 위치했다.
‘폰 그라츠, 저 알코올 중독자 자식. 어제도 거하게 한잔 땡겼나 보군.’
재상의 얼굴은 숙취가 심한 듯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이따금씩 물통에 있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려 강당으로 입장하고 있는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예상보다 꽤 많은 숫자.
나는 에린을 향해 이쪽으로 와보라는 손짓을 했다.
“근데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 아냐? 이게 다 피해받은 마법사들이라고?”
“크게 놀랄 일은 아니십니다. 폐하께서는 제국 안에 모든 마법사를 못살게 구셨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알겠다.”
“위로금은 대표자 몇 명만 추려서 하사할 예정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옥좌에서 일어서자 웅성거리던 강당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그들은 내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28년 류지상 인생에 이런 관심은 받아본 적이 없어 속이 울렁거리는 듯싶다가도, 카이드로젠은 이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상황이 익숙한 듯 금세 차분해졌다.
나는 강당에 앉아있는 마법사들을 내려다보며 연설을 시작했다.
“다들 알다시피 그대들을 황궁에 초대한 이유는 지난날 나의 과오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다.”
첫 문단부터 술렁이는 장내.
마법사들은 이미 공문으로 황제의 의도를 알고 온 상태였지만, 카이드로젠의 음성으로 직접 들으니 느낌이 다른지 사뭇 놀란 눈치였다.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내 뜻을 전달하겠다.”
슬쩍 폰 그라츠의 얼굴을 보니 눈코입이 모두 벌렁거리고 있었다.
카이드로젠이 과오와 용서란 단어를 입에 담다니 놀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에린은 대견하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일들은 짐이 진심으로 미···. 미익···.”
“...”
“미···. 미아···.”
“폐하?”
황제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따가운 눈빛이 느껴졌다.
설마 오늘도 영락없이 고집을 부릴 생각인 거냐?
찌질이 카이드로젠?
“미···. 아 미치겠군! 다들 내 말에 집중하고 있나?”
“...”
순식간에 얼어붙은 장내 분위기.
젠장! 미안하다는 말은 포기하자.
카이드로젠 이 자식은 찐이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이 자리는 자네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불렀다. 다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물론 내가 저지른 만행이 쉽게 치유되진 않을 것이다. 죽은 자들을 보상할 수는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고작 이런 위로금으로 말이지.
하지만 오늘처럼 노력은 해보겠네. 지금 당장 앙금이 풀리지 않더라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주길 바란다. 분명한 것은 칸 제국은 그대들이 필요하다.”
이 광경이 재밌다는 듯 씨익 미소를 짓는 폰 그라츠.
그 외의 그라츠 가문의 사람들은 알쏭달쏭한 표정을 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칸 제국은 지금 위기다! 에즈만토스 왕국은 호시탐탐 잉그람 대륙의 질서를 어지럽힐 궁리를 하고 있다. 과거 선제께서 진작에 멸망시킬 수 있는 나라를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푸셨는데 천하의 극악무도한 배신자 집단들은 그런 아버지를 배신해서 죽였다. 선제께서 당하신 수모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카이드로젠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다시 웅성거리는 장내 분위기.
말을 끊고 마법사들의 반응을 살폈다.
군중 속에 앉아있던 한 명의 마법사.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그가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면서 발언을 시작했다.
“선제께서 당하신 수모를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당연히 동감하는 바이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저지른 만행이 더 크게 다가오고 있소.”
나는 황제의 기억을 되짚어 그가 누군지 알아냈다.
“당신이 죽인 내 아들이 몇 살이었는지 아시오?”
무서울 정도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는 마법사.
그는 카이드로젠이 탑에 가둬버린 아이의 아버지였다.
이름은 알렉스 머피.
아이 이름은 이안 머피였나?
“당연히 기억이 안 나시겠지요. 내 아들은 겨우 10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였소. 10살짜리 마법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나 아시오? 겨우 파이어볼 하나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애송이란 말이오!”
알렉스는 아들을 생각하며 점점 감정이 고조되었다.
“극악무도하다는 표현은 바로 당신한테나 어울리는 말이오! 정신 나간 폭군 자식! 마법사들을 못살게 굴땐 언제고 갑자기 이런 환대를 하는 저의가 무엇이오? 에즈만토스 왕국에 거듭 패퇴를 당하다 보니 우리가 그리워진 것이오?”
“카이드로젠! 나 팰튼의 목표는 당신의 모가지를 따는 것이다!”
“우리 프레드 가문은 팰튼의 발언에 동조한다!”
“카이드로젠 당신은 황제로서 자격 박탈이오!”
“양심도 없는 이 미친 자식!”
카이드로젠의 만행을 떠올리며 극도로 흥분한 마법사들.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황궁 안에 시종들이 그들을 말려보려 애를 써봤지만 그들의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폰 그라츠를 포함한 에린마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
당황한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심한 반발에 나조차도 몹시 당황스러웠다.
‘젠장! 이거 사태가 너무 심각하잖아.’
“평소처럼 해보시지! 카이드로젠, 폭군답게 한번 날뛰어봐라!”
한껏 도발하는 마법사 무리.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잣됐다. 이걸 어쩌지?’
그들을 내려다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던 찰나에 순간···.
촤악!
카이드로젠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옥좌에서 내려와 위협적으로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알렉스의 뒤에는 수많은 마법사가 있었지만, 황제가 이렇게까지 즉각 반응할 줄 몰랐는지 다들 뒤로 한 두 발짝 물러났다.
하지만 아무리 검술이 뛰어난 카이드로젠이라도 이렇게 많은 마법사를 상대로는 역부족인 것이 사실.
나라면 진작에 오금이 지렸을 상황이었지만 카이드로젠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알렉스 머피, 그대를 기억하고 있다. 피의 능선에서 당신을 포함한 무리를 쫓아갔었지.”
“...”
“알렉스, 당신은 유능한 마법사다. 그대의 마법이 아니었다면 그 무리는 내가 분명 다 죽여버렸을 것이다.”
속박에 일가견이 있는 알렉스로 인해 꽤나 애를 먹었던 카이드로젠이었다.
오른손에 검을 들고 천천히 읊조리는 황제.
알렉스를 포함한 분노에 찬 수많은 마법사가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대의 말대로 내가 폭군처럼 날뛰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그건···.”
“마법사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있으니 황제가 우습게 보이나 보구나. 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잉그람 대륙을 호령하는 칸 제국의 황제란 말이다.”
카이드로젠 특유의 오만방자한 말투.
그의 발언 하나하나가 마법사를 포함한 황실의 대신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언제 돌발행동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
폰 그라츠는 근위병들을 더 불러오라고 급하게 손짓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모두가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촤악!
“폐···. 폐하!”
황제의 검이 순간 번뜩였고 새빨간 피가 흩날렸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에린을 포함한 폰 그라츠.
그리고 마법사들까지 눈을 의심하게 하는 상황.
카이드로젠의 의지로 행해진 돌발행동이 눈 깜짝할 사이 벌어졌다.
나 자신조차 내가 저지른 일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 이런 미친!! 카이드로젠!!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시종들이 수건을 들고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
“폐하! 폐하의 옥체가!”
시종들의 손길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카이드로젠의 다리.
이 정신 나간 황제는 난데없이 자신의 허벅다리를 검으로 베어버린 것이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허벅지는 이내 새빨간 피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비켜라, 아직 할 말이 끝나지 않았느니라.”
시종들을 돌려보내는 카이드로젠.
챙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당황하는 알렉스의 앞에서 단검으로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단검이 살을 파고들며 내는 쩌걱거리는 소리에 속이 메스꺼웠지만, 가만히 카이드로젠의 의지가 만드는 행동에 집중했다.
카이드로젠 그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진심을 다하고 있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오? 진짜로 미친 겁니까? 난데없이 왜 자해를 하는 거요?”
“미쳤냐고? 그럴지도 모르지. 모두가 날 미친놈이라고 불렀으니까.”
“...”
“하지만 내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이 정도로는 그대들이 받은 고통에 비견 될 수 없다는 것이네.”
푸욱
왼쪽 팔뚝을 찔렀다.
푸욱
이번엔 아랫배.
푸욱
이번엔 허벅지.
수도꼭지가 열린 듯 피가 줄줄 흘러나왔고 점차 현기증이 느껴졌다.
황실의 대신들이 소리치며 그를 말리려 했지만, 카이드로젠은 그들을 강경하게 거부했다.
붕대로 지혈을 하던 시종의 손길을 뿌리치고 알렉스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폭군 황제다. 인성은 더할 나위 없이 이기적이지. 그대가 알아줄지는 모르겠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내 진심을 표현하고 있는 거라네.”
푸욱
“비...비겁한 자식. 이런 식으로 나오면 누가···.”
푸욱 푸욱 푸욱
살갗을 뚫고 들어가는 단검의 메스꺼운 소리.
알렉스를 포함한 수많은 마법사는 이런 황제의 행동에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제국의 권력을 남용하고 마법사들을 가혹하게 핍박하는 폭군 황제.
그가 검을 뽑아 자신의 몸을 난도질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소설을 정독한 나 또한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젠장.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어느덧 발밑은 피로 흥건해졌고 장내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카이드로젠 황제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숨을 죽였다.
“알렉스···. 내가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카이드로젠.
그의 진심에 알렉스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미안하네.”